“책에 ‘비자금’이라고 써놓으니까 이학수 삼성 전 부회장 쪽에선 비자금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어서 이번 소송을 걸지 않았나 싶다.”
<이건희전>의 지은이 심정택씨가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이 출판사와 저자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1심에서 14일 승소했다. 심씨는 삼성이 수십억원을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보낸 ‘국정 농단 게이트’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사이 이 전 부회장과 법정에서 다퉈왔다. 이 전 부회장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을 ‘소유’할 수 있게 만든 사건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배정 당시 삼성의 ‘2인자’였다. 19일 전화로 만난 심씨는 “올해 2월 책을 내자마자 소송 통보서가 굉장히 빨리 날아왔다”며 “이 전 부회장이 삼성의 입장을 대변해 비자금 문제가 다시 불거지지 않게 책을 덮으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 부회장이 문제 삼은 내용은 ‘삼성생명 소속 부동산팀들이 관여하여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동산을 사들이면서 이학수 부회장의 강남 부동산 매입도 같이 추진했다’, ‘삼성특검에서 드러난 4조원의 차명 비자금의 사용 및 배분과 관련하여 이학수 부회장과 이건희 회장 사이에 이견이 생겨 이 회장의 심근경색이 발병했다’, ‘이학수 부회장의 재산이 5조원 정도’ 등 다섯 가지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일부 과장은 있지만 중요한 부분이 허위라고 단정하기 어렵고, 이학수 전 부회장이 내용이 허위라고만 주장할 뿐 자신의 재산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명하거나 증거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며 심씨 손을 들었다.
심씨는 1993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자동차사업 추진 등의 일을 하다 1999년 퇴사했다. 경제 칼럼을 쓰다 지난해 초 <삼성의 몰락>을 쓴 뒤 올해 초 <이건희전>을 출간했다. 심씨는 이 전 부회장이 “책을 광고해서는 아니되며 책 내용이 담긴 게시물을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게시해서는 안 된다”는 소송을 낸 뒤 홍보가 안 돼 <이건희전>이 잘 팔리지 못했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허물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 거대한 자본이 책 내용을 가지고 소송을 하는 것은 표현과 생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원래 <이건희전>으로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이번 촛불집회를 보면서 한국 사회와 삼성이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지 조명하는 작업을 계속 하려고 한다.”
이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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