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압박을 받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싱크탱크 전환을 포함한 쇄신안 마련을 위해 개최한 회원사 사장단모임에 주요 그룹 대부분이 불참하는 파행이 빚어졌다. 전경련은 15일 아침 서울 시내 모처에서 회원기업들의 의견 수렴을 위해 주요 그룹 사장단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회의 시간과 장소, 참석기업, 회의내용은 일체 비밀에 부쳤다. 전경련은 기업들이 언론의 눈치를 보지않고 보다 활발히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비공개로 하는 것이라며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전경련의 불투명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봄 어버이연합 불법지원 의혹과 지난 9월말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 모금 관련 정경유착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도 모두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결국 기자들이 주요 그룹에 일일이 물어보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겨레> 확인 결과 삼성·현대차·에스케이 등 10대 그룹 중에서 회의에 참석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곳은 엘지 하나뿐이다. 10대 이하 중에서도 두산·신세계·씨제이·효성 등 주요 그룹 대부분이 불참했다고 밝혔다. 전경련 임원도 “자세한 설명은 못하지만 참석 기업이 적었다”고 털어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의가 제대로 진행될리 없다. 참석한 그룹의 한 임원은 “주요 그룹들이 대부분 불참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회의 진행이 안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런 파행은 어쩌면 예정됐던 일이라 할 수 있다. 전날 회의 개최 사실이 미리 흘러나온 뒤 주요 그룹들이 모두 불참 의사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때 연기설이 돌았는데, 전경련은 무슨 생각인지 회의를 강행했다. 불참 그룹들은 국회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가 진행 중이고, 특별검사 수사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 참석이 어렵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속내로는 현 시점에서 전경련이 회원사들을 불러모으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불만이 강하다. 5대그룹의 한 임원은 “정경유착 주역으로 꼽히는 전경련이 주도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기업들에 큰 부담이다. 국민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주요 그룹의 집단 불참은 전경련 수뇌부가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10대그룹의 한 회장은 “전경련은 (회의 소집에 앞서) 대국민사과를 먼저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경유착 의혹이 제기된 지 석달이 가까워지도록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안한 전경련 수뇌부가 쇄신안 도출을 주도하는 게 국민에게 진정성있게 비쳐지겠느냐는 지적이다. 전경련의 허창수 회장과 이승철 부회장 등 수뇌부가 직접 책임지는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혀를 차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경제5단체의 한 임원은 “전경련이 환골탈태를 통해 싱크탱크 전환과 같은 쇄신안을 내놓으려면 대국민 신뢰 회복과, 전경련 주인격인 회원기업의 적극적인 협조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회장·부회장이 먼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답답해했다.
하지만 전경련은 이런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견 수렴을 위한 회원사 회의를 계속 강행할 계획이다. 전경련 모임이 당분간 ‘주인 없는 잔칫상’ 같은 모습이 이어질 전망이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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