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연기금 등 투자원칙 엄격
뇌물 등 부패 기업은 철저 외면
기업들 ‘우린 피해자’ 주장하지만
피해자라도 투자원칙엔 위배
국내 연기금·금융사 기준 없고
금융위는 담당부서조차 없어
“이제라도 세계 기준 맞춰가야”
뇌물 등 부패 기업은 철저 외면
기업들 ‘우린 피해자’ 주장하지만
피해자라도 투자원칙엔 위배
국내 연기금·금융사 기준 없고
금융위는 담당부서조차 없어
“이제라도 세계 기준 맞춰가야”
#1. 롯데 계열사는 올해 미국에 공장 신축을 계획하던 중 비자금 수사로 자금 유치에 한동안 애로를 겪었다. 이 사정을 잘 아는 롯데 계열사 관계자는 “에이치에스비시(HSBC), 아이엔지(ING), 미즈호 등 외국 금융사로부터 16억달러를 조달받을 계획이었지만, 비자금 수사로 이들 기관이 자금 공급에 난색을 표했다. 에이치에스비시 등은 비리 연루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 않는다는 유엔책임투자원칙(UNPRI)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이어 “수사가 마무리되면서 자금 공급이 이뤄졌지만 준법경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2. 한화는 네덜란드연기금(APG)이나 노르웨이투자관리청(NBIM)의 투자 대상에서 수년째 배제됐다. 한화가 1974년 방위산업체로 지정된 이래 일반 탄약과 미사일, 다연장 로켓 등 특수무기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대대적으로 외신을 타면서 롯데나 한화그룹처럼 글로벌 연기금이나 금융사들이 투자나 자금조달을 외면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국내 대기업들은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출연과 관련해 강압을 당한 피해자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책임투자 원칙’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책임투자 원칙은 기업의 재무적 성과뿐만 아니라 환경·사회적책임·지배구조(ESG)까지도 고려 대상으로 삼는다. 유엔책임투자원칙은 6가지 원칙을,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는 10가지 원칙을 내세운다. 여기엔 투자 대상 기업들이 뇌물 등 부패와 연루되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28일 네덜란드연기금 박유경 기업지배구조 담당 이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재판 결과가 나와봐야 입장을 정리할 수 있지만 한국 기업들이 설사 피해자로 드러난다 해도 투자원칙에 위배된다. 원칙은 외압이 있더라도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것인데, 이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이어 “더욱이 한국 기업들은 내부 행동규범을 통해 준법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지키지도 않았다. 향후 기업들이 관련 규정을 강화하도록 유도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투자를 철회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연기금이나 금융회사들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금융사인 아이엔지는 누리집에서 “2008년 유엔책임투자원칙에 서명했다. 이 원칙에 따라 투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난 4월 기준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등 글로벌 연기금을 포함해 60여곳이 유엔책임투자원칙에 서명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사회책임경영(CSR)을 강화해왔으나, 이번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스스로 성과를 허물었다. 삼성전자는 2005년 행동규범을 만들어 제1원칙으로 ‘법과 윤리를 준수한다’고 명시했고, 해마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펴냈다. 현대차도 2008년 유엔글로벌콤팩트에 가입했다. 이번 게이트를 통해 준법경영은 허상으로 드러난 상태다.
더구나 국내 금융회사들 역시 글로벌 금융사들과 달리 부패 기업과의 거래를 규제하는 내부 규정을 정립하지 않아 책임투자원칙을 강조하는 글로벌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이번 게이트로 뇌물죄를 받더라도 거래 제한에 나설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는 이 문제를 검토할 담당 부서조차도 없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책임투자를 살펴보는 곳이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국민연금공단은 지난해 국민연금법을 개정해 ‘투자 대상과 관련한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의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의무화해 ‘고려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종오 사무국장은 “정부는 물론이고 금융사들도 책임투자 원칙에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제라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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