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코리아가 2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안규문 밀레코리아 대표(왼쪽부터), 마르쿠스 밀레 회장, 악셀 크닐 최고경영자, 고희경 밀레코리아 새 대표. 밀레코리아 제공
“밀레 회장이 한국에 온다는데, 다른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오늘 저하고 작별파티하러 온다는 거다.”
안규문(65) 밀레코리아 대표는 독일 밀레 본사의 마르쿠스 밀레 회장과 악셀 크닐 마케팅·세일즈부문 최고경영자의 한국 방문 소식에 처음에는 의아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밀레코리아 10돌 기념식 때 한국을 찾은 밀레 회장은 다른 게 아니라 안 대표의 퇴임을 축하하려고 1년 만에 다시 방한한 것이었다.
밀레 회장은 27일 안 대표의 퇴임 기자간담회에 함께 참석해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분의 퇴임은 축하할 일이고, 또 오늘이 안 대표 생일이라 기뻐할 일이 두 개나 있어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밀레코리아에서 일한 지 14년 만에 정년퇴임을 맞았다. 그는 밀레코리아를 이끄는 동안 진공청소기·드럼세탁기 등의 매출을 410%(2005년 대비) 성장시켰다.
전문경영인이 안 대표처럼 ‘오너’의 축하를 받으며 정년퇴임하는 것은 한국에서 흔한 일은 아니다. 전문경영인들이 인사철이 아닌데도 갑자기 물러나거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밀레 회장이 보여준 신선한 풍경은 모범적 ‘가족경영’ 사례로 꼽히는 이 회사의 경영철학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밀레는 1899년 밀레 가문(지분 51%)과 진칸 가문(49%)이 공동 창업을 했다. 현재 4세대가 회장을 맡고 있는데, 가문별로 자녀 수에 따라 남녀 상관없이 지분을 나눠 증여하고 있다. 창업주 가문 간 협력뿐만 아니라 전문경영인의 능력도 융합시킨다. 최고경영진은 두 가문에서 경영수업을 통해 철저히 능력을 평가받은 회장 2명과 전문경영인 3명(마케팅·재무·기술)으로 이뤄진다. 중요 사안은 5명이 만장일치로 결정하는데, 창업자 가문 출신이든 전문경영인이든 똑같이 1표씩을 행사한다.
전문경영인인 악셀 크닐 최고경영자는 “만장일치 때문에 경영 속도가 더딜 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이 제도 때문에 더 강력한 경영이 가능하다. 타협한다는 게 아니라, 찬반 의견을 검토하고 상대방을 설득해 최선의 결론을 찾아 공동 책임을 진다”고 설명했다. 월풀 등에서 일하다 2014년 밀레에 합류한 그는 “밀레를 선택하고 바로 밀레 가족으로 인정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문화를 바탕에 둔 밀레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여느 기업보다 강조한다. 밀레 회장은 “개인적으로 (기업을) 인체 세포와 비교하는데, 세포는 성장도 하지만 분열도 된다. 성장이 빨라 너무 빨리 분열되면 암세포도 된다. 꾸준한 성장이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로 밀레코리아를 이끌게 된 고희경(47) 대표도 “독일에 가 첫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너무 빨리 움직일까봐 걱정돼서 경영진이 ‘천천히, 천천히’ 하라고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경험했던 기업들은 주주들 이익을 위해 ‘빨리빨리’ 경영을 했는데, 달랐다”고 했다.
밀레 회장과 크닐 최고경영자는 이날 저녁 안 대표 퇴임 기념 파티에 참가한 뒤 28일 독일로 돌아간다. 이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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