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들 증산에 경쟁적 가격 인하
원유 공급과잉 당분간 해소 힘들어
디플레 우려로 수요도 침체 못벗어
저점 놓고 전문가들 의견 엇갈려
원유 공급과잉 당분간 해소 힘들어
디플레 우려로 수요도 침체 못벗어
저점 놓고 전문가들 의견 엇갈려
미국산 서부텍사스유(WTI)가 새해 두번째 거래일 장중에 40달러대로 내려선데다 장외 전자거래에서도 40달러대가 이어져 5년8개월여 만에 배럴당 50달러 선이 사실상 붕괴됐다. 당분간 원유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해소될 기미가 없는데다 새해 들어 그리스발 유로존 위기와 글로벌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유가 급락 속도는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다.
5일(현지시각)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유 2월 인도분 선물가격은 5% 넘게 급락하며 50.04달러로 간신히 50달러 선을 지켰다. 같은 날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2.29달러 내려 50.98달러로 떨어졌고, 유럽산 브렌트유 선물가격은 3.31달러 내려 53.11달러까지 밀렸다.
하루 낙폭이 5~6%에 이르는 연초 유가 급락은 중동과 러시아의 원유 수출 확대와 증산, 가격 인하 소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날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사는 2월 원유 수출 가격을 발표했는데, 전반적으로 가격인하 경쟁을 이어가며 시장점유율을 사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특히 미국 수출가는 배럴당 0.6달러를 낮췄는데 다섯달 연속으로 가격을 인하한 것이다. 다만 아시아 수출 가격은 1월에 이례적으로 2달러나 낮췄던 것을 0.6달러 끌어올려 기존 인하폭을 줄였다.
앞서 이라크 석유 부처는 이달부터 원유 수출량을 하루 330만배럴로 늘릴 것이라고 4일 밝혔다. 이라크의 12월 수출량은 1980년 이래 최대치인 하루 294만배럴까지 올라갔다. 유가 하락으로 재정에 고통을 받는 러시아도 적극적 증산에 나선 게 확인됐다. 러시아는 12월 하루 1066만배럴의 원유를 생산해 전달보다 0.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1991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미국이 셰일에너지 혁명을 통해 신생 에너지대국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기존 산유국들은 증산과 가격 인하로 맞서고 있는 모양새다. 이러다 보니 원유 공급 과잉은 당분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유로존의 디플레이션 우려 확대는 수요 측면의 불안을 부추겼다. 유로존의 12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0%에 수렴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올 상반기 마이너스 물가 진입 예고장이 날아온 상태다. 국제유가 추이는 원유 수급상황뿐 아니라 앞으로 글로벌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내포하고 있는 지표다. 저유가의 긍정적 측면인 생산비 절감과 소비여력 확대라는 수혜는 2분기 정도 시차를 두고 나중에 찾아온다면, 글로벌 경기에 대한 우려는 실시간으로 반영된다. 새해 유가 급락세가 빨라진 것은 올해 글로벌 경기에 대한 새해 벽두의 이런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올해 유가의 바닥이 어디인지, 언제 저점을 통과할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해 9~10월만 해도 극단주의자의 주장으로 치부됐던 유가 40달러 시대는 실제 도래했고, 시장에서는 배럴당 20달러에 베팅하는 움직임도 드러나고 있다. 최근 미국 경제전문 매체인 <마켓워치>는 원유 투자 전문가의 말을 따서 올해 6월 20달러에 원유를 팔 권리가 있는 풋옵션 매수에도 투자자들이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유가가 저점을 통과하는 기간도 길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애초 올 상반기 저점으로 겨울철 난방 수요가 끝나고 정유업계가 유지보수에 들어가 가동률이 낮아지는 4~5월께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낙폭이 커지면서 저점이 일찌감치 찾아왔다가 약간 반등한 뒤 4~5월께 다시 저점을 찍는 식으로 바닥 구간이 길어질 조짐이 짙다는 얘기가 나온다. 엔에이치투자증권의 강유진 애널리스트는 “미국 셰일에너지 광구 가운데 생산 비용이 가장 낮은 곳들이 40달러대 초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가경쟁은 합리적 수준에선 40달러대 초반 이하로 갈 이유는 없다”면서도 “원유시장은 투기심리와 세력이 강한 분위기라서 1월 말 유럽 중앙은행 통화정책 회의와 그리스 선거 등의 변수에 따라 단기적으로 비이성적 낙폭을 보일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