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불황에 빠진 증권업계에 인력·조직 감축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 먹구름이 끼어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증권업계 앞다퉈 ‘희망 퇴직’ 압박
투자형태 변화·투자인구 축소 등
‘증권업 사양화’ 따른 불황이 원인
정부 정책도 중소업체 퇴출 유도
투자형태 변화·투자인구 축소 등
‘증권업 사양화’ 따른 불황이 원인
정부 정책도 중소업체 퇴출 유도
대신증권에 근무하는 ㅇ(49) 차장은 얼마 전까지 사무실과 식당 등을 찾아다니며 하루에 명함 10개를 모아야 했다. 실제 ‘영업’을 했는지 회사 쪽에 증명하기 위해서다. ㅇ차장은 대신증권에서 운용 중인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의 대상자다. 그는 영업 지점을 2주에 한 번씩 바꿔 돈다. 본사에 가 있는 동안에는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 대상자가 되면 3개월 만에 직원 평균치를 웃도는 영업성적을 내야 하고, 실적을 못 내면 월급이 반으로 깎인다. 3개월이 더 지나면 대기발령을 받는다.
‘전략적 성과관리’는 대신증권이 2년 전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대신 도입한 ‘직원 성과 개선’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지난 17일 대신증권은 결국 올 상반기 중으로 “희망하는 직원에 한해 명예퇴직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대신증권이 명시적으로 인력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밝힌 것은 창사 52년 만에 처음이다. 대신증권은 2011년 932억원의 영업이익이 2012년 8억원으로 줄어든 데 이어, 지난해에는 114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런 불황은 비단 대신증권만의 상황이 아니다. 국내 62개 증권사는 2013 회계연도(2013년 4월~2014년 3월)에 1098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28곳이 적자였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한화투자증권이 350명의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일부 증권사들은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전체 증권사 임직원 수는 2011년 말 4만4055명에서 지난해 말 4만243명으로, 증권사 지점 수는 같은 기간 전체 1856개에서 1534개로 감소했다.
올해 ‘희망퇴직’에 내몰리는 증권맨들의 인원수는 더 커지고 있다. 삼성증권이 지난 11일 300~500명 규모의 희망퇴직 계획을 밝힌 데 이어 17일에는 하나대투증권이 직원들에게 희망퇴직 신청서를 첨부한 메일을 보냈다. 합병이 진행 중인 우리투자증권과 엔에이치(NH)농협증권도 희망퇴직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모두 ‘희망’퇴직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많은 증권사 직원들은 ㅇ씨처럼 실적압박을 받다 자의반 타의반 회사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증권업계는 원래 더 좋은 조건을 따라 회사를 옮기는 경우가 많고, 주식시장이 불황일 때 일부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주식시장이 호황으로 돌아서면 쉽게 재취업이 이뤄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 불황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투자행태의 변화, 증권투자인구의 축소 등으로 인한 구조적인 성격이 짙어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이재진 우리투자증권 노동조합 위원장은 20일 “거의 모든 회사들이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전처럼 회사를 나온 뒤 다른 회사에 재취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증권업계 자체가 끝 모를 불황에 빠진 상황이라 누구도 편한 마음으로 구조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도 대형 증권사만 살리고 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증권사 인수합병(M&A) 활성화 방안, 지난 8일 증권사 영업용순자본비율(NCR)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모두 소형 증권사의 퇴출을 유도하는 내용이다. 김경수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노조 대외협력국장은 “정책적인 움직임까지 증권업계 축소를 부추기고 있다. 노동자에게 모든 희생을 떠넘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ㅇ씨는 “명퇴를 하면 위로금은 받을 수 있겠지만, 신청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모든 증권사가 사람을 줄이는 마당에 지금 회사를 나가는 것은 사실상 이 업계에서는 끝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20년 넘게 이 일만 하며 살아왔는데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대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을 봐서라도 버텨볼 생각입니다.” 증권맨들은 ‘잔인한’ 4월을 맞고 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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