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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내 농사보다 마을 일 먼저…평생을 한결같이

등록 2013-10-15 18:41수정 2013-10-15 20:03

안성의료생협의 초대 이사장을 지낸 천생 농부 이수청씨가 허름한 축사에서 젖소를 돌보고 있다. 사람 좋아하고 마을 일에 나서느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못하지만, “손잡아주고 안부 물어주는 이웃이 많아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안성의료생협의 초대 이사장을 지낸 천생 농부 이수청씨가 허름한 축사에서 젖소를 돌보고 있다. 사람 좋아하고 마을 일에 나서느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못하지만, “손잡아주고 안부 물어주는 이웃이 많아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는 농부다] 농촌 지도자 이수청씨
“시골살이가 어떠냐고요? 예나 지금이나 개떡같이 살지요. 한결같아요. 개떡이란 게, 참 수수하고 구수하잖아요.”

파안대소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천생 시골사람이다. 평생을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았고, 내 일보다 마을 일을 먼저 챙겼다. 경제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지만, 사람을 얻었다는 자부심으로 산다. “사람이 제일 좋아요. 만나면 손 한번 잡아주고 안부 묻고 걱정해 주고…, 주위에 그런 사람이 많으면 삶이 넉넉해져요. 그래야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죠.”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쌍지리의 이수청(62)씨. 어떤 사람은 그를 이사장이라 부르고, 때로는 회장으로 때로는 이장으로 불린다. 오래전에 마을 청년회장을 시작으로, 1992년부터 6년 동안 안성군 농민회장을 했고 마을 이장도 4차례나 했다. 94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협동조합병원인 안성의료생협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농민회장 하기 전에는 옛 민정당의 청년위원장도 했다. 타고난 마을 지도자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보수와 진보 쪽 단체에서 두루 활동을 하셨어요. 민정당 일에 참여하다가 나중에 농민회와 의료생협의 길로 들어섰죠. 이사장님한테는 이거나 저거나 다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마을 잘살게 하자는 한결같은 마음의 발로였죠.” 김보라 안성의료생협 전무는 “개떡 좋아하고 걸걸한 이 이사장이 있었기에 농민들의 병원인 안성의료생협이 탄생할 수 있었다. 추진력이 짱”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도회지로 나가고 싶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은 아예 안 들었어요. 저희 형제가 5남6녀인데, 아들로는 막내인 저 혼자 시골에 남았네요. 마을에 남아 일을 하다 보니까 새로운 것에 눈을 뜨고, 그게 그저 좋고 그러면서 푹 빠져들었어요. 집구석 망하는 줄도 몰랐죠.(웃음)” 그는 “내가 먼저 나선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초대 청년회장, 초대 농민회장, 초대 의료생협 이사장을 맡게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안성의료생협 설립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유쾌한 농군의 목소리가 한껏 겸손해졌다. 농약 남용으로 인한 고통이 컸지만, 병원 문턱이 높아 농민들이 쉽사리 병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의료생협이 뭔지도 잘 몰랐고 제가 특출나게 한 일도 없어요. 의료생협 하자면 좋은 의사 선생님 구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잖아요. 우리는 그게 어렵지 않게 해결됐어요. 의료봉사 왔던 젊은 선생님들이 먼저 팔 걷어붙이고 나섰거든요. 제 기억에 그때 의사 선생님들이 일반 의사의 3분의 1 정도 월급만 받았던 것 같아요.” 그는 “1993년에 정부 지원 한푼 없이 안성농민의원의 문을 열었다. 273명의 농민 발기인들이 1억2000만원의 출자금을 모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안성의료생협의 조합원은 이제 9000가구 이상으로 늘어나고, 출자금도 10억원 가까이로 크게 불어났다. 뒤이어 생겨난 전국 여러 의료생협들의 모델이 됐음은 물론이다.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이씨 모습.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이씨 모습.

청년회장, 농민회장, 이장에
한국 첫 의료생협 이사장까지
고향 지키며 오로지 “마을 잘살게”
경제적 풍요 대신 사람 재산 모아
“예나 지금이나 개떡처럼 살지요”

김보라 전무는 “의료생협의 실무를 잘 모르면서도 생활 언어로 마을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놀라운 재주를 지닌 분이다. 그런 추진력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이에요. 안성의 고삼농협 임직원들도 큰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하다가 수년 전에 우리 의료생협으로 옮겼어요. ‘농협에서 어떻게 의료생협을 외면할 수 있느냐’고 이 이사장이 엄하게 야단치고 몰아쳤거든요.”

집안 살림과 농사 이야기로 들어가자 ‘행복한 농사꾼’의 목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생업은 40마리의 젖소를 사육하고 2만㎡의 벼농사를 짓는 일이다. “낙농은 새벽과 오후에 하루 두 차례 꼭 착유(젖 짜기)를 하고, 늘 젖소를 살피고 돌봐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유방염 같은 병에 쉽게 걸려요. 그런데 쭉 마을 일에 나서다 보니 소홀해졌던 거죠. 제가 1976년부터 낙농을 시작했는데도 이 정도 규모밖에 안 돼요. 우유업체의 쿼터를 제대로 못 받았어요.” 해마다 치솟는 수입 사료 값도 그의 발목을 잡는다. “전체 수입의 75% 이상이 외국에서 수입한 사료 값으로 들어가요. 톱밥, 볏짚, 약값으로 추가 지출을 해요. 제 손에 쥐는 돈이래야 원유 판매 수입의 고작 15%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모든 낙농가가 다 그래요.” 마을 일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그는 젖소 돌보는 데에 정성을 쏟고 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모든 게 돈이에요. 트랙터를 굴리고, 집을 난방하는 데도 다 돈이 들어가죠. 2만㎡ 벼농사만으로는 전혀 살림이 안 돼요. 힘들고 모자라더라도 낙농을 계속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내 나이 벌써 60줄인데 지금 와서 다른 것을 시작하기도 어렵고요. 인건비 같은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덜 쓰자는 생각이에요. 우리 소들이 병들지 않게 잘 보살펴야죠. 소는 계속 관심 갖고 살펴봐줘야 해요.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나 행동이 다르다 싶으면 늦지 않게 수의사를 부르고요.”

그래도 그는 하루하루 마음이 넉넉하다고 했다. 나눌 수 있는 이웃이 많기 때문이다. “제가 평생 모은 가장 큰 재산은 사람이에요. 마을 일에 나서면서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가 적지 않았어요. 하지만 잘못 살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잖아요. 마을에서도 이장을 네번이나 했으니 더 바랄 게 없죠.”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가 바지를 붙잡았다. 아내 장춘자(57)씨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안식구가 아니었다면 농사꾼이 어떻게 바깥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적극적으로 거들어준 것은 없지만 나서지 말라고 붙잡은 적이 전혀 없었어요. 속상할 때도 많았을 텐데요. ‘바깥일 하지 않으면 우리가 경제적으로 덜 어려웠을 것’이라고 푸념한 적도 없었어요. 나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참 고맙고 많이 미안해요.”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던 아내 장씨는 축사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착유 시간인 오후 5시가 가까웠던 것이다. 남편의 사진을 촬영할 때도 아내는 젖소 뒤로 슬그머니 얼굴을 감췄다. 그날따라 쪽빛으로 물든 가을 하늘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농사꾼 부부, 그들의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안성/글·사진 김현대 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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