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 펴내
처음부터 딱 선을 그었다. ‘신정아 사건’에 관련된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그 전제로만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이란 제목을 단 책에서 그 문제에 대해 약간 거론하기는 했다. “이른 바 ‘신정아 사건’으로 그분(노무현 대통령)께 커다란 누를 끼쳤다. 비록 법원이 신정아씨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건 세상과 나의 문제일 뿐이다. 아내에게야 평생 사랑으로 대신할 길이 있겠지만, 먼저 가신 노무현 대통령께는 참회할 방법이 없으니 팽생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인터뷰는 그가 책을 펴낸 직후인 1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8층 접견실에서 이뤄졌다. 때마침 블로그 ‘변양균.com’(omnipresentrevolution.tistory.com)을 개설한 날이었다. 블로그에 올린 첫 글은 모병제 도입을 검토하자는 제안이었다. 신정아 사건에 얽혀 2007년 9월 정책실장에서 물러난 뒤 4년4개월 동안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그는 지금까지 쌓은 경제정책 경험을 살려 사회에 일부라도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했다.
애초 밝힌 다짐대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경제’관련 사안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신정아 사건은 물론 민주통합당 대표 선거 따위 정치 분야에 대한 질문에도 극도로 말을 아꼈다.
-지난주 금요일(13일)에 ‘봉하마을’에 갔었다고 들었다. 소회는?
=제 입장에서 보면, 부족한 참모다. 저 한테는 정말 너무 잘해주셨는데…. 잘 해줬다는 게 직급을 높여줬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건 일부다. 그것보다는 나를 존중해줬다. 알아줬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처럼, 정말, 저를 알아봐줬다.
그런 은혜를 입은 것에 비하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다. 괴롭히고, 마음 상하게 했다. 책 낸 배경도, 90%이상 그런 의미다. 대통령의 진정한 뜻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책 내고, 제일 먼저 노 대통령한테 드려야 했다. 묘소에 참배하고 한권 놓아 드렸다. 부족한 저가 책을 냈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이렇게 적어서….
-권양숙 여사도 만났을 텐데, 나눈 얘기는?
=여러가지 있지만, 책에 대한 것은 ‘정말 고맙다’고 하시더라. (노 대통령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해 준 것에 고마울 뿐이이라고.
-펴낸 책에서 참여정부의 ‘비전 2030’에 대해 많이 할애했다. 현재적인 의미를 지닌,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가? (2006년 8월 발표된 ‘비전 2030’은 동반성장을 통해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키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의 기반을 다져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복지사회 비전을 담은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려는 것인지, 계획을 세운 거다. 성장하면 할 수록 양극화되고, (중간 아래는) 빈곤화된다. 그게 디제이(DJ·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경기부양은 기능적인 대응일 뿐이다. 그것으로는 구조적인 문제, 해결 못한다. 그 해법을 제시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비전 2030’이 나온 게 참여정부 말기였다. 언론이 알아주지 않아 섭섭했다고 책에 썼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마무리 ‘구원투수’ 집어넣어야할 시점에서 ‘선발투수’ 내세운 것처럼 뜨악했다는 지적, 받을 만하지 않았는가?
=연구소에서 낸 보고서 형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비전 2030’은 재정운용계획서다. 재정을 얼마 투입해서 어떻게 한다는 집행 전략서다. 전 단계에서 준비가 필요한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부터 논의가 이뤄졌다. 3~4년 걸린 작업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만든, 재정운용 계획서이고, 최초의 전략계획서였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통의 부족이라고 봐야겠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찬성 뜻을 밝히고 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미국과 맺는 자유무역협정은 상품의 무역을 확대하는 것 이상으로, 서비스 및 투자와 연관돼 법과 제도의 변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한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굉장히 다양한, 폭넓은 개방이라는 점은 맞다. 협상 과정에서 이쪽 저쪽, 서로 양보한 부분 있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자신있다, 개방해야겠다는 당위성에 입각해서 한 거다.
-개방해야한다는 기본 태도를 감안할 때 책에서 한-중 에프티에이에 대해선 반대 뜻을 비친 것은 일관성을 잃은 게 아닌가?
=원칙적으로 개방을 해야하는데, 그것을 하더라도 우리 쪽 피해가 많은가, 아닌가는 따져봐야 한다. 미국은 전반적으로는 우리와 보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과는 상충되는 것이 굉장히 많다. 중국과 맺는 에프티에이는 조심해서 추진해야한다.
-유럽형을 지향했던 노무현 정부의 국가발전 전략과, 한-미 에프티에이 추진은 상충되는 것 아니었던가?
=한-미 에프티에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다. 한-미 에프티에이 뿐 아니라 개방할 때 생기는 중요한 과제가 노동자, 근로자의 문제다. 지금도 보완 대책 얘기할 때, 산업별 피해대책, 경쟁력 대책만 거론한다. 핵심은 그게 아니고, 근로자 문제여야 한다. 실업자 보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개방으로 경쟁이 격화되면 탈락자가 생겨날 수 있다. 기업과 기업간 경쟁도 벌어지지만, 더 중요한 건 이쪽 노동자와 저쪽 노동자의 경쟁이다. 그것을 빼고 딴 논쟁을 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개방을 할 때는 실업자 대책에 중점을 둬야 한다.
북유럽도 철저히 경쟁을 하게 만든다. 기업간 경쟁은 물론이고, 노동자들도 무한대로 경쟁을 해서 노동생산성이 높다.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되 실업자 보호대책을 잘 세워놓고 있다. 우리는 실업 보험의 기간이 너무 짧다. 금액도 적고, (보호를 받기 위한) 요건도 너무 까다롭다. 너무 짧고 너무 적고 너무 까다롭다. 실업 보험과 실업자의 생계보호는 국가가 완비해 줘야 한다. 그 대신 노동의 유연성을 높여주면 된다.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을 당하는 현실을 수용하고, 다른 데로 옮겨갈 여지와 시간을 주자는 것인가?
=구조조정 당하는 것을 겁내지 않도록 만들어주자. 재취업까지도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물론 섬세한 설계가 필요하다.
-노동자의 패자부활전?
=그렇다. 작장도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실업에 벌벌 떨고, 잘리면 어떡하나, 이런 식으로 내몰아선 안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복지 확대다. 그게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이기도 하다. 실업 보험 뿐 보조도 해줘야한다. 인간적인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갖춰줘야 한다. 의식주, 의료, 교육, 치안 이런 정도에 대한 보장은 기본이다.
기본수요를 해결해주고 나면 직장에서 떨어져 나와도 좀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지금은 잘리면 당장 나락으로 떨어진다. 집안에 누가 중병에 걸려도 나락에 떨어진다. 애들 교육비 때문에 쩔쩔 맨다. 이런 부분을 국가가 해결해줘야 한다.
-재정 수요가 크지 않을까?
=우리 경제 수준에서 이것을 안하고 있다는 게 이상한 것이다. 이것을 하지 않고는 성장하는 것 자체가 빈곤성장이고, 양극화 성장 밖에 안된다.
-참여정부가 양극화, 부동산 문제 해결에서 실패한 것 아닌가?
=그런 비난, 제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핵심 참모로서 내 역량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조금 변명을 해보면, 양극화와 고용없는 성장은 당시 세계적인 조류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엄청나게 밀어닥친 거다.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비전 2030을 낸 것도 그 일환이었다. 또 부동산 문제 풀려고, 종합부동산세 만들고 했다. 그 효과를 이명박 정부에서 누리는 거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그걸 두고 ‘노무현의 역설’이라고 했다.
-재벌 문제에 대한 의견은?
=대기업과, 재벌의 문제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은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 문제는 재벌의 행태다. 자영업자 수준의 가족경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벌이 빵집, 꽃집, 커피숍, 중고 자동차 매매업, 세탁소까지 운영한다. 영세 자영업자가 가족경영을 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게 부분적으로는 노동 유연성과 관련돼 있다고 나는 본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못 자르도록 경직돼 있다보니, 신규 채용이 거의 안 이뤄지고 있다. 재벌이 운영하는 빵집, 커피숍 봐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재벌그룹 직원, 아니다. 아웃소싱(외부 조달)으로 들어온 이들이다. 그런 데만 재벌들이 투자하고 있는 거다. 그렇게 얽히고 설킨 문제다.
재벌이 그런 데 못들어 오게 당장 막는 기능적인 대응만으로는 풀 수 없다. 구조적 대응을 해야 한다. 분배 개혁, 노동 개혁, 재벌 개혁 이 세가지를 해야 한다. 복지를 통해 기본 수요를 채워주고,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재벌 개혁에는 시민단체의 힘이 필요하다고 본다. 시민단체가 규제하고 감시도 해야 한다.
-블로그를 개설했는데. 취지는?
=정책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아무나 필요한 쪽에서 가져다 쓰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대해 비판과 토론이 이뤄질 거다. 그렇게 진화된 상태에서, 정책을 선택할 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져다 값지게 썼으면 좋겠다는 거다.
-기부가 권력과 지위의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경계하자는 인상적인 표현을 책에서 봤다. 재벌 총수, 대형 금융회사들의 기부에도 이런 속성이 들어있다고 봐야할까?
=재단을 설립해서 하는 것은 기부가 아니다. 또 다른 자기 조직을 만들고 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부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맹점도 많다. 유럽 나라들을 보면, 기부가 작다. 국가가 기본적인 걸 해주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복지 정책, 그것은 국가의 몫이다. 국가가 나서서 해주면 국민의 권리가 되지만, 재단이나 기부로 할 경우 비체계적이어서,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정책실장 퇴임한지 4년 넘었다. 그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주로 책을 읽었다. 등산 다니고, 산책하고, 자전거도 좀 탔다.
-블로그 이름(omnipresent revolution)에 담긴 뜻은?
=온·오프 세력 할 것없이 ‘다같이’ 모여서 세상을 좀 바꿔보자는 의미다. ‘다같이’ 광장에 모여서, ‘다함게’ 변혁하는 정책을 ‘다같이’ 만들어보자는 거다.
-블로그에 올린 첫글이 모병제 제안이던데.
=군대도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다. 청년실업 문제의 한 해법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팽개쳐놓은 문제를 한번 다뤄봤다. 군대가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좋은 일자리다. 생명과 자유가 구속된다는 점을 빼면…. 우리나라의 국방비가 북한의 국내총생산(GDP)과 비슷하다. 모병제 얘기를 해볼 때가 됐다.
-앞으로 계획은?
=당분간 블로그에 글을 쓸 것이고, 경제적 활동도 좀 할 생각이다.(그는 셋톱박스 업체 휴맥스와, 바이오기업인 코리아본뱅크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민주통합당 대표 뽑는 선거 보시고 어땠는가?
=더욱 더 블로그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들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내가 그동안 쌓았던 정책 경험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김영배 김경욱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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