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채무자 1년새 급증
“한달에 80만원 버는데 카드 이자만 월 50만원”
“한달에 80만원 버는데 카드 이자만 월 50만원”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쓰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31일 서울 중구 명동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 사무실에서 만난 이명수(가명·44)씨는 가까스로 입을 뗐다. 이씨는 이날 신복위로부터 ‘사전채무조정’(프리워크아웃) 승인을 받았다. 이씨의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지난해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난 이후였다. “불황으로 실직 1년 전부터 월급을 못 받았습니다. 대리운전을 했는데, 한달 수입은 80만원밖에 안 되더군요. 생활비 등으로 필요한 170만원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월셋집으로 옮기고 지출을 줄였지만 1년 이상을 버티긴 힘들었다. 이씨는 할 수 없이 6개월 전부터 신용카드 다섯장으로 현금서비스를 시작했다. 빚을 내 빚을 갚는 돌려막기였다. “한달 이자만 50만원이었습니다.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더군요.” 카드 하나가 연체되자 잇따라 다른 카드도 이용이 중지됐고, 결국 이씨는 신복위를 찾았다.
이씨 사례는 저소득·저신용 계층이 어떻게 빚의 수렁에 빠져드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실직, 사업 실패, 질병 등으로 소득이 줄면서 빚을 지게 되고, 결국 빚을 내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 경우다. 신용회복위원회와 신용정보회사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이런 돌려막기식 저신용 채무자들이 지난해부터 크게 늘고 있다. 게다가 경기가 둔화되고 정부가 가계대출의 고삐를 죄고 있어 이씨처럼 한계상황에 내몰린 계층이 추가로 채무 불이행자의 문턱을 넘어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돌려막기’로 버티고 있는 채무자들의 정확한 실태는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여러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은 ‘다중채무자’의 규모로 추정할 뿐이다. <한겨레>가 신용회복위원회에 의뢰해 올해 상반기에 사전채무조정을 신청한 5731명을 분석한 결과, 3군데 이상 빚을 진 다중채무자의 비율이 무려 84.4%에 이르렀다. 6곳 이상이라고 답한 경우도 27.3%나 됐다. 카드사·저축은행 등 여러 금융기관에서 높은 이자를 물어가며 돌려막기를 하다가 감당이 안 되자 채무조정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가장의 위치에 있는 30~40대가 전체의 68%를 차지해 자칫 가정해체와 같은 사회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높다.
이미 사전채무조정 이전 단계부터 다중채무자가 급증하고 있다. 저신용자들이 가장 손쉽게 이용하는 카드론 대출자 가운데 다중채무자는 2009년 말 163만명에서 지난해 말 191만명으로 불과 1년 사이에 28만명이 늘었다. 다중채무자의 비중도 2009년 54.6%에서 지난해 57.3%로 증가했다. 나이스신용정보 관계자는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다중채무자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는 2003년 카드사태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2000년 말 신용카드 대출 가운데 40.7%에 머물던 다중채무자 비중이 2002년 말엔 57.2%로 급등하면서 채무 불이행자가 속출했고 결국 카드대란으로 비화했다. 경고등은 이미 켜진 셈이다. 금융감독당국의 한 관계자는 “저축은행의 경우 30일 이상 연체자 가운데 대출금을 결국 못 갚는 비율이 80%를 넘을 정도로 소액신용대출 부실이 커지고 있다”며 “이를 방치할 경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 이어 금융불안의 새 뇌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돌려막기로 한계상황에 이른 저소득·저신용 계층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이들의 부담을 줄이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참여연대 이헌욱 변호사는 “다중채무자들이 채무 불이행자라는 고통에 빠져들기 전에 채무조정을 통해 부담을 줄여주는 게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며 “이들의 연체규모, 소득상태 등을 고려한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명 김지훈 기자 mis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