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만 ‘봉’ 만드는 전세대책
30분에 버스 1대 수도권 외딴 곳도 두배 올라
반전세 옮기고 대출금 늘리느라 임신도 미룰판
정부, ‘세입자 보호’커녕 DTI완화 연장 검토
30분에 버스 1대 수도권 외딴 곳도 두배 올라
반전세 옮기고 대출금 늘리느라 임신도 미룰판
정부, ‘세입자 보호’커녕 DTI완화 연장 검토
정부가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의 연장 등을 통한 ‘집값 띄우기’로 전세 수급 조절을 검토하고 있으나, 이는 전국적으로 700만가구에 가까운 무주택 세입자층을 더욱 궁지로 몰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 집값은 무주택자들이 사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인데다, 대출 여건을 완화해 세입자들의 주택매입 수요를 확대하는 것은 이미 위험수위에 이른 가계부채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정책인 탓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한나라당이 10일 전세·물가 대책을 위한 당정협의를 예정한 가운데, 집값 부채질 대신에 근본적으로 무주택 세입자층의 주거 안정을 보장할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8일 경기도 화성시에 사는 임아무개(38·주부)씨는 “버스 딱 한 대가 30분에 한 차례 들어오는 외딴 아파트인데 전셋값이 두배로 올랐다”며 “집 얘기만 나오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말했다. 임씨 부부는 할 수 없이 지난 설 직전에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주기로 하고 부랴부랴 인근에 ‘아파트 반전세’를 구했다. 2년 전 103㎡짜리 아파트를 5000만원 전세로 들어왔는데, 집주인이 전세금을 9500만원으로 두 배나 올려서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기 때문이다. 임씨네는 남편 월급 170만원이 수입의 전부로, 수십만원씩 들어가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외딴곳으로 이사온 터였다. 임씨는 “어떻게든 월세를 피해 돈을 모아 보려고 남편이 출퇴근 네시간 거리를 감수하며 이사를 왔는데 또다시 월세 30만원에 기존 전세대출 이자까지 매달 40만원을 넘게 내야 할 처지”라며 “1억~2억 전세금이 있는 사람이야 대출을 받아 집 살 궁리를 해볼지 몰라도 우리 같은 사람은 입는 것, 먹는 것을 줄여서 다시 월세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기 집을 살 수도, 치솟는 전셋값을 감당할 수도 없는 무주택 세입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에서 자기 집에 사는 ‘자가점유율’은 1995년 53.3%를 기록한 뒤 2005년 55.6%, 지난해 말 현재는 56~57%로 추산된다. 자가점유율이 5년마다 고작 1%포인트쯤 오른 셈이다. 그동안 주택 공급은 꾸준히 증가해, 1995년 86%이던 주택보급률(가구수 대비 주택수의 비율)은 지난해 말 111.9%로 높아졌다. 결국 주택이 크게 늘어나더라도 전체 43% 가구의 대부분은 뛰는 집값을 따라잡지 못해 셋방살이를 벗어나기 힘든 셈이다. 통계청이 파악한 가구 현황을 고려하면 이런 세입자층은 700만 가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과 일본, 미국의 몇개 주 등에서 두루 채택한 임대차 갱신권과 임대료 상한제 같은 세입자 보호막이 없다 보니 무주택 세입자층의 주거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또 치솟는 전·월셋값은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감소시키고 ‘삶의 질’에 곧바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 실제 맞벌이 신혼부부인 신아무개(32·여·경기도 성남 분당)씨는 “2년 전 66㎡ 아파트에 1억1000만원으로 전세를 들어왔지만 이번에 7000만원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아 첫아이 임신 계획까지 미루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금 전셋집도 늙으신 부모님이 6000만원의 대출 원금과 이자를 떠맡아서 마련한 것”이라며 “2년간 5000만원을 모았는데 그걸 다 쏟아붓고도 대출을 더 내야 한다니 기가 막힌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처지에 놓인 무주택 세입자들한테 정부는 오히려 ‘집값이 오를 수 있다’는 신호를 주면서 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로 거래 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다. 주택임대 수요를 매매 수요로 돌리면 전세 수급이 개선되고 주택경기도 활성화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하지만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부)는 “현재 집값은 이미 과중한 빚에 시달리는 가계가 더 무모하게 빚을 져야 집을 살 수 있는 수준”이라며 “정부 의도대로 주택 매매 경기가 활성화되더라도 집값이 오른다면 전셋값은 내리는 게 아니라 따라서 더 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무주택 세입자한테는 주거 불안을 가중시키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더 멀어지게 하는 상황만 초래한다는 얘기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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