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 한겨레 김경호
장 교수 “신자유주의 대안 아니다” 조목조목 비판
장하준이 화제다. 최근 출판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대흥행 뿐 아니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및 ‘부자 감세’ 등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날 선 비판도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장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는 지난달 15일 한겨레경제연구소(원장 이원재)가 개최한 ‘2010 아시아미래포럼’ 특별강연 ‘기업-정부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에서도 지난 30년간 세계 경제에 드리웠던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논리와 그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또 금융위기 뒤 세계 여러 나라가 기업과 정부 관계의 재설정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무턱대고 가장 ‘최신’이란 이유로 영미식 신자유주의 논리를 대안으로 삼을 게 아니라, 산업정책 및 규제 개혁, 소유구조 재편 등에서 저마다 경험을 최대한 살릴 것을 주문했다. <하니티브이>는 영어로 진행한 장 교수의 특강을 번역·편집해 싣는다. 아래는 번역 전문이다.
기업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재고 - 동아시아 사례를 중심으로
(Rethinking the Relationship between Business and Government - with special reference to East Asia)
정부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설명 방식으로 지난 30년을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정설에 대한 검증부터 해보겠습니다. 요컨대, 기본적으로 정부의 개입이 적을수록 기업에는 유리하며, 그렇기에 경제에도 좋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적절한 기업의 소유구조를 가능케 하기 위한 법적 규제 (완화) 등의 조처 등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경영자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런 시각은 처음에 미국과 영국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흔히 이들 나라에서 주주 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시각이 항상 지배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야 나타난 현상이지요. 1981년 미국 뉴욕의 피에르 호텔에서 있었던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 CEO의 연설은, 이 시각이 미국과 영국에서 빠르게 확산하던 때의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업의 유일한 목표는 주주 가치 극대화라고 했습니다. 그게 아마 분수령이었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미·영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한 이런 설명은, 지역에 따라 미·영 금융자본의 자본 시장의 점진적 침투와 더불어 천천히 퍼져가기도 했습니다. 많은 유럽 나라들이 그랬습니다. (아오키 교수 말씀대로) 프랑스가 한 예가 되겠죠. 하지만, 한국이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그랬듯이, 급작스런 정책 변화에 따라 갑작스레 유입된 곳도 있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자유주의의 정설에는 세 가지 기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경제에도 좋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은 1953년 미 국방장관에 임명된 찰리 윌슨 제너럴모터스(GM) CEO가 의회의 인사청문회에서 한 유명한 말로 잘 요약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민간 기업 출신 인사가 국가 안보의 이익을 다루는 자리에 과연 적절한지 확인하고 싶어했는데, 그는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뜻이고, 기본적으로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경제에도 좋다”고 설명하는 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분명 그렇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에 기초한 경제입니다. 정부 소유 기업이 많은 나라도 있겠지만, 민간 기업이 훨씬 많지요. 그러니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경제에 좋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업의 이익을 북돋워주는 일입니다. 기업의 이익을 북돋워야 자연히 국가경제도 흥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물론 이 시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정설 두 번째 기둥은 기업 이익을 위해 정부는 최소한 개입하고 최대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정부 개입은 일본의 ‘대규모소매점포법’의 예처럼 기업에 대한 금지 규정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대규모소매점포법은 대규모소매점을 열기 위해선 사실상 역내 모든 중소 규모 상점을 설득(매수)해야 하도록 했고, 이는 80년대 미일간 경제분쟁에서 아주 중요한 논쟁점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법안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정부가 나서 민간기업이 뭔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또 한편, 정부 개입은 일본이나 한국의 많은 산업정책처럼 기업 이익을 거스르는 강제 규정일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정주영씨에게 연락해 파산시키겠다고 위협하며 내키지 않는 조선회사를 강제로 만들도록 시킨 것이 대표적인 강제 규정으로서의 정부 개입 사례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주장은 어떤 종류의 정부 개입이든 좋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정부가 본질적으로 그들이 개입하려 하는 이(기업)들만큼 정보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기업이 뭔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인데, 어떻게 정부가 와서 그걸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정부는 기업만큼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더 적은 정보를 갖추고 내린 결정의 질적 수준은 당연히 더 많은 정보를 갖추고 내린 결정에 미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정부가 더 잘 알지도 못하고 관련 민간 기업만큼 정보를 갖추지 못했다면, 정부로서는 기업은 경영진에 맡기고 그냥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거죠. 또 하나의 꽤 논리적인 주장이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 기둥은, 만약 정부가 기업 이익 증진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위한 ‘좋은’ 제도입니다. 기업 경영자들이 주주들, 곧 궁극적인 주인들의 이익에 호응하도록 보장하는 제도인 셈입니다. 많은 경제 이론이 설명하듯이 주주 이익을 위한 경영은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국가경제에 대한 기업의 기여도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선 이상적인 기업 소유구조는 앵글로-아메리카식 제도의 가장 이상적인 버전일 텐데,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비율이 높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파산 전 GM의 이사회는 모두가 사외이사들이었습니다. 누구도 경영 쪽 관계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소액주주들이 잘 보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두 요소는 내부자들이 경영 성과를 조작하거나 경영진 스스로 급여를 결정할 수 없도록 한 조처입니다. 사외이사와 소액주주들에 의한 강력한 외부 감시를 통해 내부자들이 경영 체계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셈입니다. (앵글로-아메리카식) 이상적 기업 소유구조의 두 번째 특징은,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인수를 쉽게 만들어놔서 실적이 좋지 않은 경영진은 금세 교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경영자는 항상 경쟁 압력에 노출되는 구조입니다. 셋째로는, 정부 소유나 직원 경영권을 허락하지 않아, 정치적이지 않고 경제적인 논리로 기업이 경영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정부가 완전히 소유하는 기업만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사기업이 상당 부분 정부 소유로 돼있습니다. 예컨대 독일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은 회사가 위치한 지방정부가 지분 약 19%를 소유합니다. 니더작센 주 정부가 실제 지분 19%를 갖고 있는 겁니다.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는 2차대전 후 사주가 나치에 부역했다고 해 국유화되면서 100% 프랑스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비록 많은 지분을 팔았지만, 오늘날까지도 정부는 여전히 30%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비록 전적으로 정부 소유가 아니더라도 정부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례는 많습니다. 아오키 교수님이 말씀하신 독일의 공동 결정 시스템도 이런 관점에서는 부정적이겠지요. 정부 소유나 직원 소유는 항상 경영진에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를 강제하게 될테니까요. 1980년대 이후를 지배하게 된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나라들은 기업에 대한 규제를 줄였고, 산업정책을 폐기했으며, 앵글로-아메리카식으로 기업 소유구조를 재편했습니다. 심지어 독특한 정부-기업 관계로 유명했던 일본과 한국마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변화는 한국보다 덜 극단적이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기업-정부 관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실제 이론적, 경험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기업에 좋은 것이 반드시 나라에 좋다는 것은 잘못된 가정입니다. 일단, 일부 기업에 좋을 수도 있는 일은 다른 기업에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은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업 이익을 증진시켜준다고 할 때 누구의 이익을 이야기하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겁니다. 다른 예로, 금융 부문은 지난 30년간 규제완화의 혜택을 어마어마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물 부문은 이 과정에 따라 상처를 입어왔습니다. 최근의 금융 위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빠른 수익을 요구하는 금융 부문의 지속적 압박이 많은 기업들을 망가뜨렸습니다. 제너럴일렉트릭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근의 금융 위기 뒤 잭 웰치는 주주 가치 극대화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아이디어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자신이 제안한 걸 그렇게 얘기하다니, 이를테면 마치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거죠. 금융 부문에 너무 많은 권력을 주면 실물 경제는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각적인 수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금융 시장은 좋아하지 않죠. 단기 수익을 내려면 장기간이 지나야 수익이 돌아오는 것에 대한 투자는 중단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연구개발을 줄이고 직원 훈련도 줄이는 등 투자를 최소화시킵니다. 처음엔 주가가 오르고 주주들이 좋아하니 좋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사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겠지요. 하지만, 20~30년 뒤엔 다른 회사에 추월당할 겁니다. 유동적인 주주들의 단기 이익에 부응할 필요가 없었던, 그래서 제품력을 키우는 데 투자한 기업들이 있었겠지요. 또 심지어 기업에 전반적으로 좋은 것이 있다고 해도, 예컨대 기업 세금 감면이나 환경 규제 완화처럼 말이죠, 그래도 전 사회적으로는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정부는 기업의 이익과 나머지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신고전주의 경제학도 ‘시장 실패’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개인과 기업이 이른바 ‘합리적’으로 이익을 추구해도 사회적으로는 차선의 결과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시장 중심의 경제학이라 해서, 기업의 이익이 항상 온 나라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기업 친화적이란 게 더 적은 규제를 뜻한다는 것도 잘못된 믿음입니다. 많은 규제는 사실 기업에 이롭습니다. 우선, 어떤 기업 활동이 단기적으로는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공통된 자원을 망가뜨린다고 할 때,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업을 도와주게 됩니다. 예컨대 개별 은행이 공격적으로 대출을 내주면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은행이 똑같이 하고 나서면, 지금처럼 모두가 결국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 식의 대출 행위는 결국 구조적인 붕괴 위험을 높이기 마련이지요. 또 다른 예는 19세기 유럽의 어린이 노동입니다. 당시 유럽에선 어린이 노동이 만연해 있었는데, 사회 개혁가들이 이를 규제하려 하자 많은 기업가들은 환영하고 나섰습니다. 그들 얘기는 이랬습니다. “우리도 안다. 너덧 살 어린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고 위험한 작업 환경에 노출되는 일을 시키면, 결국 기업에도 좋지 않다. 노동력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에 의한 공통된 규제가 없으면, 어린이 노동을 원치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손해를 보게 된다. 어린이 노동이 장기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개의치 않는 다른 고용주들도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고 있다면 우리도 쓰지 않을 방도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규제를 환영한다. 그 덕에 어린이 노동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다른 고용주들이 어린이 노동을 쓰면서 우리 기반을 약화시키진 않을 테니까.” 물론, 모든 기업인들이 이렇게 지지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 계몽된 경영자들은 그러했습니다. 때때로 개별 기업이 할 수 있는 것을 제약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모든 기업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경영에 불이익을 준다 해도 말이지요. 또한, 어떤 활동이 단기적으로는 개별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든 기업의 전체적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때, 이를 강제하는 규제도 기업을 도와주는 게 됩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기업은 직원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직원 교육에 신경 쓰지 않는 다른 기업에 뺏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경제학 이론은 정부가 모든 기업에 직원 교육을 강제하도록 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봅니다. 기업이 인재를 뺏길 걱정 없이 교육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지요. 그런 규제가 없다면 기업은 자기 회사에서만 쓸 수 있는 기술만 가르치려 듭니다. 그래서 다른 고용주에게는 쓸모없는 노동력을 만들어버리면, 노동력의 유동성을 저해하는 등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선 정부가 직원 교육을 강제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업 활동을 돕는 셈이 됩니다. 독일처럼 한발 더 나아가 ‘국가 철강 자격증’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직원들의 교육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기업을 돕는 겁니다. 정보량의 차이 때문에 정부의 결정이 기업 스스로 결정보다 못하다는 믿음은, 맞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주장은 상황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 가장 많은 정보를 갖추고 있고 그렇기에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합니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만약 근접성이 더 나은 결정을 보장할 수 있다면, 어떤 기업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죠. 지난 2000년 떠오르던 인터넷 기업 아메리카온라인(AOL)이 미디어 기업 타임워너를 인수했을 때의 상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수에 대해 회사 밖에선 많은 회의론이 나왔지만, 인수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여겼습니다. 스티브 케이스 당시 AOL 회장은 “미디어와 인터넷의 지형을 바꿔놓을 역사적 인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수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당시 타임워너의 대표였던 제리 레빈은 지난해 초 “세기적 최악의 거래”였다고 털어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걸 훌륭한 생각이라 했다는 거죠.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상황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상황 속에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해당 기업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당시 시장 상황마저 무시한 정부의 산업 정책이 결국 성공한 사례도, 특히 동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한국의 몇몇 사례를 들어보면, 전 세계의 회의론 속에서도 정부가 주도한 포스코나,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현대가 추진했던 현대조선(현대중공업) 등이 있습니다. 금성전선(현 LS전선)의 경우, 1960년대 초 금성은 섬유 분야로 진출하고 싶었지만 정부는 ‘돈이 있으면 전선 회사를 만들어라. 나라가 필요로 하니 섬유는 잊어라’고 했고, 훗날 이 회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자회사 가운데 하나인 LG전자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당시 금성이 섬유로 진출했다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LG나 한국이 지금만큼 성공적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앵글로-아메리카식 기업지배구조가 기업과 경제적 실적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제학자들이 부르는 이른바 시장의 ‘즉석 경매’가 효율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시각에 기초합니다. 이는 성장도 같은 방식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론적 증명은 아니지만요. 학술적인 논점이긴 합니다만 중요한 부분이죠. 효율적이라는 게 반드시 장기적으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데, 많이들 헷갈려합니다. 주주 가치 극대화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확보한 자원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이 기업들이 굉장히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자원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장기적인 잠재력을 갉아먹는 게 됩니다. 따라서 단기적 효율과 장기적 성장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 겁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발전은 기계나 연구개발, 직원 교육 등의 장기 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앵글로-아메리카식 기업 지배구조에서 장려하는 단기 이익에 대한 요구와는 많은 경우 양립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제너럴모터스(GM)의 쇠락과 파산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GM은 (앵글로-아메리카식식으로 보면) 이상적인 지배구조의 기업이었습니다. 내부자 출신 이사가 없었고, 10%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가 없어 소유권이 널리 퍼져있었으며, 정부나 노동자들의 경영권 개입도 없었고, 세계에서 인수 작업이 가장 쉬운데다 소액주주의 권리가 가장 잘 보호받는 증시에서 거래되는 기업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일부 지분을 정부가 소유한 르노나 폴크스바겐, 또는 창업주가 소유하고 있어 극단적인 내부자 회사라 할 수 있는 BMW나 푸조, 현대 같은 다른 자동차 회사와 비교해봅시다. 2005년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들을 살펴보면, 위에 열거한 항목에 모두 체크할 수 있는 회사는 GM 뿐입니다. 포드도 주식을 구분해서 핵심 주식은 창업주 가족만 갖게 해놨습니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인수·합병 같은 큰일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차 같은 회사보다도 창업주 가족에 의해 한층 강하게 통제되는 셈입니다. 다른 모든 대형 자동차기업이 이들 (앵글로-아메리카식 지배구조의) 사항에 해당 않는데, (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GM 만이 파산했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산업정책과 규제, 지배구조 등은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재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곳에서 적용 가능한 단일한 최선의 모델이 있는 게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됩니다. 산업정책과 규제, 지배구조의 조합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조합 결과가 모두 좋다고 할 순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조합이 있을 뿐 절대적일 수는 없기에, 한 나라에서 아주 잘 작동하는 조합이 다른 나라에서는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도 작동하지 않는 조합도 있을 겁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산업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에서 시행된 산업정책은 특정 시기와 장소, 곧 20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에서만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상황, 예컨대 오늘날의 동아시아에선 적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지요. 결국, 일본, 한국처럼 한 두 나라가 선별적인 산업 정책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주 독특한 정치적 맥락과 독특한 문화, 또 특정한 발전 단계 등과의 관련성이 크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호도하는 겁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 노르웨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많은 다른 나라들도 아주 비슷한 산업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같은 시기의 미국도, 비록 ‘동아시아식’ 산업정책은 아니었지만, 공공부문의 연구·개발 예산 지출을 통해 국내 산업 발전의 과정에 아주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시기 일본이나 한국에서 이뤄진 연구·개발 지출 가운데 정부 자금으로 진행한 비율은 20% 안팎이었고 이것만으로도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라고들 하지만, 미국에선 이 비율이 40~65%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오늘날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갖춘 산업체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연방 정부의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정부가 국방 관련 계약을 통해 항공기 제조업계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보잉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초기의 컴퓨터 개발은 미 육군의 자금으로 이뤄졌으며, 반도체 개발은 미 해군이 돈을 댔습니다. 인터넷 또한 미 국방 예산으로 진행됐고, 그 리스트는 끝이 없습니다. 미국이 산업정책을 안 한 게 아닙니다. 실시한 겁니다. 필요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한 겁니다. 그래놓고 한국 같은 나라에 와선 ‘그런 걸 하면 안 된다. 좋지 않다’고 했고, 결국 지금 와선 미국은 계속 나름의 산업정책을 유지하는데 한국은 산업정책을 폐지하는 꼴이 됐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충격은 더 큽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내용이라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것 같아 상세하게 다루진 않겠습니다.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은, 몇몇 예외를 제하면, 모두 초기 발전 단계에서 정부 보조금이나 정부 소유, 외국인 직접 투자 제한 등을 통해 보호주의와 산업정책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적·경험적 근거가 충분히 많은 산업정책의 정당성을 두고 논박을 벌이는 게 아니라, 이를 다양한 맥락에서 어떻게 적용시킬까에 대한 논의입니다. 일본, 한국, 중국이 계속 산업정책을 실시해야 하느냐와 같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결국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일본은 급속한 노령화하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기술 첨단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선 산업정책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가. 한국은 전자제품 이외 영역에서 기술 첨단에 이르기 위해선 과거 산업정책 체제의 일부 요소를 어떻게 다시 불러와 강화해야 하는가. 전자제품업계가 성공하면서, 한국인들은 스스로 실제 수준보다 더 발전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자업계에서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한두 가지 분야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우리(한국)는 기술 방면에서 그렇게 선진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산업에서 우리의 생산력은 유럽, 북미 선진국의 40~50%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산업정책의 일부 요소들을 되살려서 다른 분야에서도 첨단에 이를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국가적 기술 역량을 제고하고, 소득 불균형을 줄이면서, 도시-농촌 간 이해관계의 균형을 찾기 위해 산업정책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도 해야겠지요. 마지막 부분에 대해선 제가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 최근 많은 흥미를 끌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을 하나의 나라로 생각하고, 많은 관점에서 하나의 나라가 맞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용어로는 유럽연합의 아시아식 형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쓰촨성에는 1억이 삽니다. 한국보다 두 배가 넘지요. 광둥성엔 9천만이 삽니다. 이 모든 성이 저마다 산업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습니다만, 한때 중국에 자동차 회사의 수가 128곳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모든 성 당국이 자동차 회사를 갖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외국 자동차 제조사들로서도 이들 성 정부와 거래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중국의 성은 상당수가 그 자체만으로 웬만한 개발도상국 한 나라보다 크지요. 왜 안 하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중앙 정부가 자동차 업계와 많은 핵심 조인트벤처를 주도하는데, 지리 같은 일부 민간 기업들이 뛰어드는가 하면, 각 성의 제조업체들도 일부 지분을 추구합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선 이런 일이 없지만, 중국에선 심각한 문제입니다. 중국에서는 고민해야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많은 부분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꼭 강조하고 싶은 규제의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나라에서 규제는 다양한 기능을 갖습니다. 정부가 고려해야 하는 문제의 범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적어도 일본과 한국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규제는 분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단순히 시장 실패를 바로잡거나 개별 기업에 대해 기업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수익을 재분배해서 사회를 합리적으로 평등한 수준으로 만드는 수단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주로 사회복지 차원에서 다뤘을 일이지만, 냉전의 강력한 영향권이었던 동아시아에서는 규제 정책이 이런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냉전 아래 동아시아 나라들은 사회주의의 매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불평등을 방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냉전 체제는 사회주의로 여겨지는 사회복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오해죠. 사회복지 개념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람은 독일의 초보수적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습니다. 그가 사회복지 개념을 처음 제기했으니 꼭 좌익 정책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만, 1940~50년대 동아시아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 정부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겁니다. 동아시아에선 주로 대기업에 비교적 관대했던 기업 지원 정책과, 중소기업 점유 영역의 대기업 진출에 대한 규제가 혼합돼 (재분배가) 진행됐습니다. 가장 좋은 예는 일본의 대규모소매점포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규제의 폐지 또는 약화에 대한 압력은 계속됐습니다. 저는 규제 완화가 사회복지의 확장과 더불어 진행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평등·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므로, 큰 정치적 문제를 불러올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동아시아에서의 규제 개혁은 사회복지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와 관련해, 각 나라들은 더 많은 자본에 대한 요구와 장기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절충했습니다. 일본은 상호 지분 보유의 벽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상장사 주식의 40~60%가 해당돼, 사실상 적대적 인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재벌이 피라미드형의 복잡한 지분 보유 구조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97년 외환 위기 이후 주식시장 개방 등으로 이 구조는 크게 위협을 받았고, 단기 차익을 노리는 주주 자본주의에 점점 더 노출되고 맙니다. 어쨌든 이런 조처는 신자유주의 지지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의 독특한 ‘내부자 시스템’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보다는, 미국과 영국이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 경우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요. 아오키 교수님이 말씀하신 독일의 공동 결정 시스템도 있겠지요. 프랑스에선 정부가 직접 소유한 기업도 많고 국가 금융기관이 지분을 갖기도 합니다. 스웨덴 등 다른 유럽 나라들에선, 포드의 경우처럼, 주식에 따라 투표권을 차등적으로 부여하기도 합니다. 핵심주식이 다른 주식보다 10배, 1000배의 가치를 갖게 되는 식입니다. 자금만 놓고 보면 핵심주식의 양은 적은 비중이지만, 경영적 결정 차원에서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거죠. 이 모든 사례를 통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게, 일본이나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가 바뀔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식의 개혁을 하든 간에, 지난 20~30년간 이상적이라고 간주했던 앵글로-아메리카식 모델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앵글로-아메리카식 모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장기적인 투자를 힘들게 만들어 결국 경제를 약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모두 산업정책이나 규제, 기업 지배구조 등 기업-정부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각국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의 신화를 거부하고 각자의 성공적인 역사적 경험과 다른 나라로부터 배운 교훈을 토대로 스스로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정리=김외현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요한계시록 ‘지구 종말’의 현실화?
■ 대기업 취업문 다시 좁아지나
■ 미 ‘원정 출산’ 시민권 못얻나
■ 전문가들 “증시 과열” “더 오른다” 팽팽
■ 대학 입학하기도 전 회계사 시험 준비…못말리는 ‘스펙 열풍’
■ “대한민국 뉴스 심장부에 일본이 침투한다”
■ 물러나는 선동열 “우승 뒤 그만뒀더라면…”
정부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설명 방식으로 지난 30년을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정설에 대한 검증부터 해보겠습니다. 요컨대, 기본적으로 정부의 개입이 적을수록 기업에는 유리하며, 그렇기에 경제에도 좋다고 했습니다. 정부가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적절한 기업의 소유구조를 가능케 하기 위한 법적 규제 (완화) 등의 조처 등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경영자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런 시각은 처음에 미국과 영국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흔히 이들 나라에서 주주 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시각이 항상 지배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야 나타난 현상이지요. 1981년 미국 뉴욕의 피에르 호텔에서 있었던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 CEO의 연설은, 이 시각이 미국과 영국에서 빠르게 확산하던 때의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업의 유일한 목표는 주주 가치 극대화라고 했습니다. 그게 아마 분수령이었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미·영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한 이런 설명은, 지역에 따라 미·영 금융자본의 자본 시장의 점진적 침투와 더불어 천천히 퍼져가기도 했습니다. 많은 유럽 나라들이 그랬습니다. (아오키 교수 말씀대로) 프랑스가 한 예가 되겠죠. 하지만, 한국이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그랬듯이, 급작스런 정책 변화에 따라 갑작스레 유입된 곳도 있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자유주의의 정설에는 세 가지 기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경제에도 좋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생각은 1953년 미 국방장관에 임명된 찰리 윌슨 제너럴모터스(GM) CEO가 의회의 인사청문회에서 한 유명한 말로 잘 요약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민간 기업 출신 인사가 국가 안보의 이익을 다루는 자리에 과연 적절한지 확인하고 싶어했는데, 그는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말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뜻이고, 기본적으로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경제에도 좋다”고 설명하는 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분명 그렇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민간 기업에 기초한 경제입니다. 정부 소유 기업이 많은 나라도 있겠지만, 민간 기업이 훨씬 많지요. 그러니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경제에 좋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업의 이익을 북돋워주는 일입니다. 기업의 이익을 북돋워야 자연히 국가경제도 흥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물론 이 시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정설 두 번째 기둥은 기업 이익을 위해 정부는 최소한 개입하고 최대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정부 개입은 일본의 ‘대규모소매점포법’의 예처럼 기업에 대한 금지 규정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대규모소매점포법은 대규모소매점을 열기 위해선 사실상 역내 모든 중소 규모 상점을 설득(매수)해야 하도록 했고, 이는 80년대 미일간 경제분쟁에서 아주 중요한 논쟁점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법안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정부가 나서 민간기업이 뭔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또 한편, 정부 개입은 일본이나 한국의 많은 산업정책처럼 기업 이익을 거스르는 강제 규정일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정주영씨에게 연락해 파산시키겠다고 위협하며 내키지 않는 조선회사를 강제로 만들도록 시킨 것이 대표적인 강제 규정으로서의 정부 개입 사례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주장은 어떤 종류의 정부 개입이든 좋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정부가 본질적으로 그들이 개입하려 하는 이(기업)들만큼 정보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기업이 뭔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인데, 어떻게 정부가 와서 그걸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정부는 기업만큼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더 적은 정보를 갖추고 내린 결정의 질적 수준은 당연히 더 많은 정보를 갖추고 내린 결정에 미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정부가 더 잘 알지도 못하고 관련 민간 기업만큼 정보를 갖추지 못했다면, 정부로서는 기업은 경영진에 맡기고 그냥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거죠. 또 하나의 꽤 논리적인 주장이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 기둥은, 만약 정부가 기업 이익 증진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것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위한 ‘좋은’ 제도입니다. 기업 경영자들이 주주들, 곧 궁극적인 주인들의 이익에 호응하도록 보장하는 제도인 셈입니다. 많은 경제 이론이 설명하듯이 주주 이익을 위한 경영은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국가경제에 대한 기업의 기여도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선 이상적인 기업 소유구조는 앵글로-아메리카식 제도의 가장 이상적인 버전일 텐데,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이사회에서 사외이사 비율이 높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파산 전 GM의 이사회는 모두가 사외이사들이었습니다. 누구도 경영 쪽 관계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소액주주들이 잘 보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두 요소는 내부자들이 경영 성과를 조작하거나 경영진 스스로 급여를 결정할 수 없도록 한 조처입니다. 사외이사와 소액주주들에 의한 강력한 외부 감시를 통해 내부자들이 경영 체계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셈입니다. (앵글로-아메리카식) 이상적 기업 소유구조의 두 번째 특징은,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인수를 쉽게 만들어놔서 실적이 좋지 않은 경영진은 금세 교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경영자는 항상 경쟁 압력에 노출되는 구조입니다. 셋째로는, 정부 소유나 직원 경영권을 허락하지 않아, 정치적이지 않고 경제적인 논리로 기업이 경영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정부가 완전히 소유하는 기업만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사기업이 상당 부분 정부 소유로 돼있습니다. 예컨대 독일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은 회사가 위치한 지방정부가 지분 약 19%를 소유합니다. 니더작센 주 정부가 실제 지분 19%를 갖고 있는 겁니다.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는 2차대전 후 사주가 나치에 부역했다고 해 국유화되면서 100% 프랑스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비록 많은 지분을 팔았지만, 오늘날까지도 정부는 여전히 30%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비록 전적으로 정부 소유가 아니더라도 정부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례는 많습니다. 아오키 교수님이 말씀하신 독일의 공동 결정 시스템도 이런 관점에서는 부정적이겠지요. 정부 소유나 직원 소유는 항상 경영진에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를 강제하게 될테니까요. 1980년대 이후를 지배하게 된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나라들은 기업에 대한 규제를 줄였고, 산업정책을 폐기했으며, 앵글로-아메리카식으로 기업 소유구조를 재편했습니다. 심지어 독특한 정부-기업 관계로 유명했던 일본과 한국마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변화는 한국보다 덜 극단적이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기업-정부 관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실제 이론적, 경험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기업에 좋은 것이 반드시 나라에 좋다는 것은 잘못된 가정입니다. 일단, 일부 기업에 좋을 수도 있는 일은 다른 기업에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은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업 이익을 증진시켜준다고 할 때 누구의 이익을 이야기하는지가 분명치 않다는 겁니다. 다른 예로, 금융 부문은 지난 30년간 규제완화의 혜택을 어마어마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물 부문은 이 과정에 따라 상처를 입어왔습니다. 최근의 금융 위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빠른 수익을 요구하는 금융 부문의 지속적 압박이 많은 기업들을 망가뜨렸습니다. 제너럴일렉트릭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근의 금융 위기 뒤 잭 웰치는 주주 가치 극대화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아이디어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자신이 제안한 걸 그렇게 얘기하다니, 이를테면 마치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거죠. 금융 부문에 너무 많은 권력을 주면 실물 경제는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각적인 수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금융 시장은 좋아하지 않죠. 단기 수익을 내려면 장기간이 지나야 수익이 돌아오는 것에 대한 투자는 중단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연구개발을 줄이고 직원 훈련도 줄이는 등 투자를 최소화시킵니다. 처음엔 주가가 오르고 주주들이 좋아하니 좋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회사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겠지요. 하지만, 20~30년 뒤엔 다른 회사에 추월당할 겁니다. 유동적인 주주들의 단기 이익에 부응할 필요가 없었던, 그래서 제품력을 키우는 데 투자한 기업들이 있었겠지요. 또 심지어 기업에 전반적으로 좋은 것이 있다고 해도, 예컨대 기업 세금 감면이나 환경 규제 완화처럼 말이죠, 그래도 전 사회적으로는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정부는 기업의 이익과 나머지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신고전주의 경제학도 ‘시장 실패’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개인과 기업이 이른바 ‘합리적’으로 이익을 추구해도 사회적으로는 차선의 결과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시장 중심의 경제학이라 해서, 기업의 이익이 항상 온 나라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기업 친화적이란 게 더 적은 규제를 뜻한다는 것도 잘못된 믿음입니다. 많은 규제는 사실 기업에 이롭습니다. 우선, 어떤 기업 활동이 단기적으로는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공통된 자원을 망가뜨린다고 할 때,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업을 도와주게 됩니다. 예컨대 개별 은행이 공격적으로 대출을 내주면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은행이 똑같이 하고 나서면, 지금처럼 모두가 결국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 식의 대출 행위는 결국 구조적인 붕괴 위험을 높이기 마련이지요. 또 다른 예는 19세기 유럽의 어린이 노동입니다. 당시 유럽에선 어린이 노동이 만연해 있었는데, 사회 개혁가들이 이를 규제하려 하자 많은 기업가들은 환영하고 나섰습니다. 그들 얘기는 이랬습니다. “우리도 안다. 너덧 살 어린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고 위험한 작업 환경에 노출되는 일을 시키면, 결국 기업에도 좋지 않다. 노동력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에 의한 공통된 규제가 없으면, 어린이 노동을 원치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손해를 보게 된다. 어린이 노동이 장기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개의치 않는 다른 고용주들도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쓰고 있다면 우리도 쓰지 않을 방도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규제를 환영한다. 그 덕에 어린이 노동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다른 고용주들이 어린이 노동을 쓰면서 우리 기반을 약화시키진 않을 테니까.” 물론, 모든 기업인들이 이렇게 지지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 계몽된 경영자들은 그러했습니다. 때때로 개별 기업이 할 수 있는 것을 제약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모든 기업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경영에 불이익을 준다 해도 말이지요. 또한, 어떤 활동이 단기적으로는 개별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든 기업의 전체적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 때, 이를 강제하는 규제도 기업을 도와주는 게 됩니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기업은 직원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직원 교육에 신경 쓰지 않는 다른 기업에 뺏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경제학 이론은 정부가 모든 기업에 직원 교육을 강제하도록 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봅니다. 기업이 인재를 뺏길 걱정 없이 교육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지요. 그런 규제가 없다면 기업은 자기 회사에서만 쓸 수 있는 기술만 가르치려 듭니다. 그래서 다른 고용주에게는 쓸모없는 노동력을 만들어버리면, 노동력의 유동성을 저해하는 등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선 정부가 직원 교육을 강제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업 활동을 돕는 셈이 됩니다. 독일처럼 한발 더 나아가 ‘국가 철강 자격증’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직원들의 교육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기업을 돕는 겁니다. 정보량의 차이 때문에 정부의 결정이 기업 스스로 결정보다 못하다는 믿음은, 맞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주장은 상황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이 가장 많은 정보를 갖추고 있고 그렇기에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합니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만약 근접성이 더 나은 결정을 보장할 수 있다면, 어떤 기업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죠. 지난 2000년 떠오르던 인터넷 기업 아메리카온라인(AOL)이 미디어 기업 타임워너를 인수했을 때의 상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수에 대해 회사 밖에선 많은 회의론이 나왔지만, 인수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여겼습니다. 스티브 케이스 당시 AOL 회장은 “미디어와 인터넷의 지형을 바꿔놓을 역사적 인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수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당시 타임워너의 대표였던 제리 레빈은 지난해 초 “세기적 최악의 거래”였다고 털어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걸 훌륭한 생각이라 했다는 거죠.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상황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상황 속에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해당 기업의 의지를 거스르면서 당시 시장 상황마저 무시한 정부의 산업 정책이 결국 성공한 사례도, 특히 동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한국의 몇몇 사례를 들어보면, 전 세계의 회의론 속에서도 정부가 주도한 포스코나,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현대가 추진했던 현대조선(현대중공업) 등이 있습니다. 금성전선(현 LS전선)의 경우, 1960년대 초 금성은 섬유 분야로 진출하고 싶었지만 정부는 ‘돈이 있으면 전선 회사를 만들어라. 나라가 필요로 하니 섬유는 잊어라’고 했고, 훗날 이 회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자회사 가운데 하나인 LG전자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당시 금성이 섬유로 진출했다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LG나 한국이 지금만큼 성공적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앵글로-아메리카식 기업지배구조가 기업과 경제적 실적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제학자들이 부르는 이른바 시장의 ‘즉석 경매’가 효율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시각에 기초합니다. 이는 성장도 같은 방식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론적 증명은 아니지만요. 학술적인 논점이긴 합니다만 중요한 부분이죠. 효율적이라는 게 반드시 장기적으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데, 많이들 헷갈려합니다. 주주 가치 극대화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확보한 자원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이 기업들이 굉장히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자원의 쓰임새를 생각하면 장기적인 잠재력을 갉아먹는 게 됩니다. 따라서 단기적 효율과 장기적 성장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 겁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발전은 기계나 연구개발, 직원 교육 등의 장기 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앵글로-아메리카식 기업 지배구조에서 장려하는 단기 이익에 대한 요구와는 많은 경우 양립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제너럴모터스(GM)의 쇠락과 파산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GM은 (앵글로-아메리카식식으로 보면) 이상적인 지배구조의 기업이었습니다. 내부자 출신 이사가 없었고, 10%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가 없어 소유권이 널리 퍼져있었으며, 정부나 노동자들의 경영권 개입도 없었고, 세계에서 인수 작업이 가장 쉬운데다 소액주주의 권리가 가장 잘 보호받는 증시에서 거래되는 기업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일부 지분을 정부가 소유한 르노나 폴크스바겐, 또는 창업주가 소유하고 있어 극단적인 내부자 회사라 할 수 있는 BMW나 푸조, 현대 같은 다른 자동차 회사와 비교해봅시다. 2005년 세계 10대 자동차 회사들을 살펴보면, 위에 열거한 항목에 모두 체크할 수 있는 회사는 GM 뿐입니다. 포드도 주식을 구분해서 핵심 주식은 창업주 가족만 갖게 해놨습니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인수·합병 같은 큰일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차 같은 회사보다도 창업주 가족에 의해 한층 강하게 통제되는 셈입니다. 다른 모든 대형 자동차기업이 이들 (앵글로-아메리카식 지배구조의) 사항에 해당 않는데, (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GM 만이 파산했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한 문제입니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산업정책과 규제, 지배구조 등은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재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곳에서 적용 가능한 단일한 최선의 모델이 있는 게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됩니다. 산업정책과 규제, 지배구조의 조합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조합 결과가 모두 좋다고 할 순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조합이 있을 뿐 절대적일 수는 없기에, 한 나라에서 아주 잘 작동하는 조합이 다른 나라에서는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도 작동하지 않는 조합도 있을 겁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산업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에서 시행된 산업정책은 특정 시기와 장소, 곧 20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에서만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상황, 예컨대 오늘날의 동아시아에선 적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지요. 결국, 일본, 한국처럼 한 두 나라가 선별적인 산업 정책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주 독특한 정치적 맥락과 독특한 문화, 또 특정한 발전 단계 등과의 관련성이 크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호도하는 겁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 노르웨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많은 다른 나라들도 아주 비슷한 산업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같은 시기의 미국도, 비록 ‘동아시아식’ 산업정책은 아니었지만, 공공부문의 연구·개발 예산 지출을 통해 국내 산업 발전의 과정에 아주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 시기 일본이나 한국에서 이뤄진 연구·개발 지출 가운데 정부 자금으로 진행한 비율은 20% 안팎이었고 이것만으로도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라고들 하지만, 미국에선 이 비율이 40~65%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오늘날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갖춘 산업체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연방 정부의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정부가 국방 관련 계약을 통해 항공기 제조업계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보잉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초기의 컴퓨터 개발은 미 육군의 자금으로 이뤄졌으며, 반도체 개발은 미 해군이 돈을 댔습니다. 인터넷 또한 미 국방 예산으로 진행됐고, 그 리스트는 끝이 없습니다. 미국이 산업정책을 안 한 게 아닙니다. 실시한 겁니다. 필요에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한 겁니다. 그래놓고 한국 같은 나라에 와선 ‘그런 걸 하면 안 된다. 좋지 않다’고 했고, 결국 지금 와선 미국은 계속 나름의 산업정책을 유지하는데 한국은 산업정책을 폐지하는 꼴이 됐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충격은 더 큽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내용이라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것 같아 상세하게 다루진 않겠습니다. 오늘날의 부자 나라들은, 몇몇 예외를 제하면, 모두 초기 발전 단계에서 정부 보조금이나 정부 소유, 외국인 직접 투자 제한 등을 통해 보호주의와 산업정책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적·경험적 근거가 충분히 많은 산업정책의 정당성을 두고 논박을 벌이는 게 아니라, 이를 다양한 맥락에서 어떻게 적용시킬까에 대한 논의입니다. 일본, 한국, 중국이 계속 산업정책을 실시해야 하느냐와 같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결국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일본은 급속한 노령화하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기술 첨단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선 산업정책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가. 한국은 전자제품 이외 영역에서 기술 첨단에 이르기 위해선 과거 산업정책 체제의 일부 요소를 어떻게 다시 불러와 강화해야 하는가. 전자제품업계가 성공하면서, 한국인들은 스스로 실제 수준보다 더 발전했다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자업계에서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한두 가지 분야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우리(한국)는 기술 방면에서 그렇게 선진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산업에서 우리의 생산력은 유럽, 북미 선진국의 40~50%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산업정책의 일부 요소들을 되살려서 다른 분야에서도 첨단에 이를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국가적 기술 역량을 제고하고, 소득 불균형을 줄이면서, 도시-농촌 간 이해관계의 균형을 찾기 위해 산업정책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도 해야겠지요. 마지막 부분에 대해선 제가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 최근 많은 흥미를 끌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을 하나의 나라로 생각하고, 많은 관점에서 하나의 나라가 맞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용어로는 유럽연합의 아시아식 형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쓰촨성에는 1억이 삽니다. 한국보다 두 배가 넘지요. 광둥성엔 9천만이 삽니다. 이 모든 성이 저마다 산업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습니다만, 한때 중국에 자동차 회사의 수가 128곳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모든 성 당국이 자동차 회사를 갖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외국 자동차 제조사들로서도 이들 성 정부와 거래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중국의 성은 상당수가 그 자체만으로 웬만한 개발도상국 한 나라보다 크지요. 왜 안 하겠습니까. 하지만, 많은 긴장을 야기했습니다. 중앙 정부가 자동차 업계와 많은 핵심 조인트벤처를 주도하는데, 지리 같은 일부 민간 기업들이 뛰어드는가 하면, 각 성의 제조업체들도 일부 지분을 추구합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선 이런 일이 없지만, 중국에선 심각한 문제입니다. 중국에서는 고민해야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많은 부분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꼭 강조하고 싶은 규제의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나라에서 규제는 다양한 기능을 갖습니다. 정부가 고려해야 하는 문제의 범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적어도 일본과 한국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규제는 분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단순히 시장 실패를 바로잡거나 개별 기업에 대해 기업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수익을 재분배해서 사회를 합리적으로 평등한 수준으로 만드는 수단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주로 사회복지 차원에서 다뤘을 일이지만, 냉전의 강력한 영향권이었던 동아시아에서는 규제 정책이 이런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냉전 아래 동아시아 나라들은 사회주의의 매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불평등을 방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냉전 체제는 사회주의로 여겨지는 사회복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오해죠. 사회복지 개념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람은 독일의 초보수적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습니다. 그가 사회복지 개념을 처음 제기했으니 꼭 좌익 정책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만, 1940~50년대 동아시아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 정부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겁니다. 동아시아에선 주로 대기업에 비교적 관대했던 기업 지원 정책과, 중소기업 점유 영역의 대기업 진출에 대한 규제가 혼합돼 (재분배가) 진행됐습니다. 가장 좋은 예는 일본의 대규모소매점포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규제의 폐지 또는 약화에 대한 압력은 계속됐습니다. 저는 규제 완화가 사회복지의 확장과 더불어 진행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평등·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므로, 큰 정치적 문제를 불러올 것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동아시아에서의 규제 개혁은 사회복지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와 관련해, 각 나라들은 더 많은 자본에 대한 요구와 장기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절충했습니다. 일본은 상호 지분 보유의 벽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상장사 주식의 40~60%가 해당돼, 사실상 적대적 인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은 재벌이 피라미드형의 복잡한 지분 보유 구조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97년 외환 위기 이후 주식시장 개방 등으로 이 구조는 크게 위협을 받았고, 단기 차익을 노리는 주주 자본주의에 점점 더 노출되고 맙니다. 어쨌든 이런 조처는 신자유주의 지지세력으로부터 동아시아의 독특한 ‘내부자 시스템’이란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보다는, 미국과 영국이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 경우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요. 아오키 교수님이 말씀하신 독일의 공동 결정 시스템도 있겠지요. 프랑스에선 정부가 직접 소유한 기업도 많고 국가 금융기관이 지분을 갖기도 합니다. 스웨덴 등 다른 유럽 나라들에선, 포드의 경우처럼, 주식에 따라 투표권을 차등적으로 부여하기도 합니다. 핵심주식이 다른 주식보다 10배, 1000배의 가치를 갖게 되는 식입니다. 자금만 놓고 보면 핵심주식의 양은 적은 비중이지만, 경영적 결정 차원에서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거죠. 이 모든 사례를 통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게, 일본이나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가 바뀔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식의 개혁을 하든 간에, 지난 20~30년간 이상적이라고 간주했던 앵글로-아메리카식 모델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앵글로-아메리카식 모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장기적인 투자를 힘들게 만들어 결국 경제를 약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모두 산업정책이나 규제, 기업 지배구조 등 기업-정부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각국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올지는 알 수 없지만, 신자유주의의 신화를 거부하고 각자의 성공적인 역사적 경험과 다른 나라로부터 배운 교훈을 토대로 스스로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정리=김외현기자 oscar@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요한계시록 ‘지구 종말’의 현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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