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성 없이 권력·자본 눈치보기 급급
“문제 터지면 뒤치닥거리 관행 계속”
“문제 터지면 뒤치닥거리 관행 계속”
“왜 아무도 황영기를 막지 못했나?”
금융당국이 지난 9일 황영기 케이비(KB)금융지주 회장에 대한 중징계를 최종 확정했지만 사태의 파장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가 단순히 ‘스타 시이오(CEO)의 몰락’이라는 개인 문제를 넘어 국내 금융감독 체계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낸 사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금융정책에 종속되는 금융감독, 권력과 자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감독당국의 태도가 황영기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이 고쳐지지 않는 한 ‘제2의 황영기’가 나올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 금융정책 종속된 금융감독, 매번 뒷북
금융정책기구가 경기부양, 금융산업 발전 등을 내세워 무리한 정책을 펼 때 금융감독기구는 금융기관의 건전성, 금융질서 안정 등을 위해 이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금융감독은 오랫동안 금융정책에 휘둘려왔다. 김홍범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지난 정부까지 감독을 맡았던 금융감독위원회는 정부 조직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강해 경제정책에 영향을 받기가 쉬웠다”며 “감독정책이 경제정책이랑 뒤섞이면서 감독 실패가 여러번 드러났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대중 정부 시절의 카드사태, 참여정부 시절 우리은행 부실 사태다.
황 회장이 우리은행장으로 재임하면서 공격적 대출확대, 무모한 파생상품 투자로 ‘몸집 불리기’에 사활을 걸었던 2005~2007년은 재정경제부가 ‘은행 대형화를 통한 금융산업 발전’을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시기다. 금감위도 이런 흐름에 적극 동참했다. 윤증현 당시 금감위원장 겸 금감원장(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내 금융회사가 덩치를 키우는 것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앞장서 목소리를 높였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감독당국이 본연의 임무인 금융기관의 건전성 감독에 집중하지 않고, 금융을 첨단산업으로 키우는 데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감독이 될 리가 있냐”며 “황 회장은 정부에 부응하기 위해 외형 확장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당시에는 감독당국의 목표와 황 회장의 목표가 일치했기 때문에 감독당국이 황 회장의 무리한 전략을 제어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황 회장이 공격경영에 나서자 다른 시중은행들도 뒤를 따라 대출을 마구잡이로 늘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파생상품 투자를 따라한 곳은 소수였지만, 당시 급증한 주택담보대출과 중소기업대출은 지금까지 ‘시한폭탄’처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재경부 금융정책국과 금감위가 합쳐져 금융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김홍범 교수는 “아예 감독과 정책을 한 조직으로 합치면서 시스템이 더욱 후퇴했다”며 “감독 실패를 줄이려면 감독기관의 독립성이 중요한데, 현 체계는 감독의 독립성이라는 게 애초 존재하지 않는 구조”라고 말했다.
■ 권력·자본 눈치 보기 고질병
감독당국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는 행태도 되풀이하고 있다.
황 회장에 대한 징계 과정은 ‘권력 눈치 보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10일 자료를 내 “예금보험공사의 내부문건을 보면 예보는 이미 2007년말 우리은행의 무리한 투자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금융위·금감원 역시 예보의 보고를 받고 최소한 2008년 4월부터는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이 밝힌 예보의 내부문건(2008년 4월 작성)은 “우리은행은 부채담보부증권(CDO)이 매우 고위험임에도 수익성만 앞세워 하위 등급에 투자를 집중했고, 신규투자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유동성 경색 사태가 발생했으며, 2007년 2월 미국 모기지 부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뒤에도 헤지나 매각 대신 추가투자를 했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실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당시에는 권력 실세로 알려진 황 회장에 대해 경징계만 내리고 지난해 8월 케이비금융지주의 회장으로 선임되는 것도 방치하다가, 이제 와서 태도를 바꿨다”고 말했다.
‘자본 눈치 보기’ 또한 심각하다. 금감원은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로 삼성증권 등 일부 금융회사의 금융실명제법 위반 가능성이 큰 논란이 됐지만, 계속 버티다가 2008년 2월에야 검사에 착수했다. 검사 결과도 법원 판결이 난 뒤인 지난 6월에야 내놨고, 징계 또한 ‘기관경고’ 등 솜방망이였다.
김상조 교수는 “감독수단을 정책목표에 오남용하다가, 문제가 터지고 나면 뒤치다꺼리를 하는 후행적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며 “이런 구조 아래서는 제2의 황영기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홍범 교수는 “감독기관의 독립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정치적 외풍에 휩싸이기 쉽고, 결국 감독 누수로 이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안선희 김경락 김수헌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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