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변형 벽 모든 벽을 가변형으로 설계했지만, 견본주택에는 예비청약자를 위해 유리벽을 세워놓았다. 피데스개발 제공
주부들이 바꾼 ‘아파트 설계’
“주방에 나만 살짝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손님이 오면 상을 내가기 전에 얼굴에 뭐가 묻은 건 아닌지 보고 싶은데, 거울은 욕실과 안방에만 있어 불편하거든요.”
부동산 개발업체인 피데스개발이 지난해 6월 주최한 주부간담회에서 10여명이 둘러앉아 아파트에 살면서 느꼈던 불편한 점을 털어놓았다. 대부분 남성 설계자들로선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주부들은 주방에 거울을 설치하되 안쪽으로 숨겨달라고 요청했다. 주방에서 거울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주방 수납장 속 ‘비밀거울’은 그렇게 탄생했다.
가변형 벽…남성 소변기…주방엔 엄마용 책상…
■ “성냥갑 아파트는 싫다” ‘지어 놓기만 하면 팔리는’ 시대는 갔다. 공장에서 찍어낸 벽돌처럼 똑같은 아파트는 더 이상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 건설사들은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따라잡기 위해 아파트 설계 과정에서부터 소비자를 참여시키는 ‘프로슈머(생산자+소비자) 아파트’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피데스개발이 대전 도안새도시에 선보인 ‘파렌하이트’는 초기 설계 단계에서부터 소비자 욕구를 반영한 대표적인 프로슈머 아파트로 꼽힌다. 2007년 피데스개발은 한남대학교 건축연구실에 대전주택시장을 중심으로 ‘공동주택 설계 및 선호도 분석’을 의뢰했다. 대전 시내 34개 아파트 단지와 25개 부동산업소, 460명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작업이었다. 연구 결과 상대적으로 대전 지역 주민들은 수도권 지역 주민들보다 아파트 설계에 많은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피데스개발은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모든 벽을 가변형으로 만드는 설계 방식을 도입했다.
■ 프로슈머 확산 추세·배경 피데스개발 외에도 소비자 의견을 아파트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이미 계속돼 왔다. 벽산건설은 2005년 ‘블루밍’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2만명을 웃도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데 이어 2006년 하반기에 ‘셀프디자인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일부에 가변형 벽을 도입하고, 입주자들이 인테리어와 가구 색상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지에스(GS)건설은 매년 ‘주부자문단’을 뽑아 이들의 의견을 설계에 반영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함께 출근 준비를 할 수 있는 2개의 세면대, 남성용 소변기 등은 모두 주부자문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최근 분양 열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인천 청라지구에서도 이런 시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에스케이(SK)건설은 가변형 벽을 선보였고, 한양은 주부들의 의견을 반영해 요리를 하면서 독서, 인터넷 작업 등을 할 수 있는 ‘맘스 오피스’와 주방 수납공간인 ‘팬트리’를 만들었다. 강인호 한남대 교수는 “주택은 매우 비싼 보수적인 상품이기 때문에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게 쉽지 않다”며 “건설사들이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설계에 소비자 의견을 적극 담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많이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프로슈머 아파트의 미래는? 프로슈머 아파트는 이제 가변형 벽을 도입하거나 편의 시설을 재배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본적인 공간 구조의 변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피데스개발은 또 30평형대(85㎡)는 방이 3칸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방 2칸짜리 전용 84㎡형 설계를 만들었다. 지난 2005년부터 4년 동안 한국갤럽과 함께 실시한 미래주택 설문조사에서 자녀를 분가시킨 50~60대 부모들 가운데 일부가 평수는 작지만 넓은 방과 거실을 원한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김희정 피데스 연구센터 소장은 “관리비 등의 부담으로 적은 평수로 이사를 하고 싶지만, 기존의 30평형대 아파트는 거실과 방이 좁아 불편하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가 지난해 6월 주부 172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그룹단위 집단토론에선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이 마음껏 낙서할 수 있게 한쪽 벽은 화이트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 ‘화장대는 그늘지는 천장 조명 대신 얼굴에 직접 쏘아주는 분장실용 조명으로 해달라’, ‘부츠를 신거나 자녀 신발을 신겨줄 때 유용한 현관 벤치도 있었으면 한다’…. 피데스개발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주부들과 무려 241차례 만났고, 그 뒤에도 주부들의 의견을 반영해 50여개의 설계항목을 바꿨다. 결국 지난해 가을과 올 봄 두 차례나 설계 도면을 재승인받아야했다.
벽산건설 마케팅부 관계자는 “지금은 건설사 대부분이 평면과 공간에 소비자 맞춤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정보통신 인프라, 아파트 내 커뮤니티 등에서도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남성용 소변기 남성용 소변기는 ‘주부 자문단’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GS건설 제공
■ 프로슈머 확산 추세·배경 피데스개발 외에도 소비자 의견을 아파트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이미 계속돼 왔다. 벽산건설은 2005년 ‘블루밍’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2만명을 웃도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데 이어 2006년 하반기에 ‘셀프디자인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일부에 가변형 벽을 도입하고, 입주자들이 인테리어와 가구 색상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지에스(GS)건설은 매년 ‘주부자문단’을 뽑아 이들의 의견을 설계에 반영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함께 출근 준비를 할 수 있는 2개의 세면대, 남성용 소변기 등은 모두 주부자문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최근 분양 열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인천 청라지구에서도 이런 시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에스케이(SK)건설은 가변형 벽을 선보였고, 한양은 주부들의 의견을 반영해 요리를 하면서 독서, 인터넷 작업 등을 할 수 있는 ‘맘스 오피스’와 주방 수납공간인 ‘팬트리’를 만들었다. 강인호 한남대 교수는 “주택은 매우 비싼 보수적인 상품이기 때문에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게 쉽지 않다”며 “건설사들이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설계에 소비자 의견을 적극 담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많이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맘스데스크 요리를 하면서 독서와 인터넷 작업, 가계부 정리 등을 할 수 있도록 맘스데스크를 설치했다. 피데스개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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