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엄포’ 놓지만 강제수단 없어
기업 부채비율 낮고 이자부담 적어
“외환위기때와 달리 은행들 힘 약해”
기업 부채비율 낮고 이자부담 적어
“외환위기때와 달리 은행들 힘 약해”
지난 1998년 1월13일 국회 귀빈식당.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4대 그룹 총수를 불러놓고 ‘기업 구조조정 5원칙’(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핵심역량 강화, 지배주주 및 경영진 책임 강화)을 발표했다. “노동계를 설득하려면 여러분이 앞장서야 한다”며 총수의 사재출연도 압박했다.
2009년 4월30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12층 회의실.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부처 수장들이 참석한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최근 경제지표가 다소 개선되면서 ‘조금 버티면 구조조정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이 있을 수 있다”며 “구조조정을 할 기업들이 빨리 구조조정 돼야 건실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대기업 구조조정이 다시 경제의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와 달리 이번 구조조정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동안 대기업들의 재무구조가 크게 좋아진데다 경제여건도 달라져 정부와 은행들 뜻대로 기업들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11년 만에 다시 회오리? 겉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다. 당시에도 정부는 은행들을 내세워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압박했다. 대통령 당선자와 재벌 총수들의 만남 이후 64개 주채무계열(그룹)은 그해 상반기까지 재무구조개선약정(이하 약정)을 맺고,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5대 그룹은 사업 구조조정(‘빅딜’)을 강요받았고, 6대 그룹 이하는 강도 높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재계 서열 2위 대우그룹이 해체됐다.
올해 역시 이 대통령의 강도 높은 발언을 계기로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대기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45개 주채무계열 가운데 11개 그룹은 이달 안으로 약정을 맺고 빚을 줄여야 한다. 6월까지는 개별 대기업 1422개가 채권단의 평가를 거쳐 워크아웃 여부 등이 결정된다. 금융당국은 기업들이 제대로 약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채권단이 대출을 회수하고 자금지원을 중단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고 있다.
■ 부채비율·고금리 등 여건 달라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면 다른 점이 적지 않다. 가장 큰 차이는 대기업들의 재무구조다. 당시 주요 그룹들의 부채비율은 500%가 넘을 정도로 빚이 많았다. 하지만 지난해 말 상호출자제한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은 119.9%에 불과하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주식시장 등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면서 은행 차입을 줄인 결과다. 약정 체결 대상으로 거론되는 그룹들도 지엠대우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부채비율이 200% 안팎이다.
이자부담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당시에는 멀쩡한 기업도 휘청거리게 할 고금리(1998년 5월 평균 대출금리 16.9%)였다. 현재 은행의 신규 기업 대출금리는 5%대다.
사회 분위기나 정부 의지도 다르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그때는 기업들의 재무구조와 지배구조를 개선해 외국인 투자자금을 유치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맺은 협약도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사회적으로도 ‘환란의 주범인 기업들을 개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구조조정 필요성을 놓고 경제주체간 기본적 합의도 흐릿한 상태다.
■ ‘묘수’ 없으면 흐지부지 가능성 이런 차이점들은 결국 구조조정을 놓고 줄다리기를 해야 할 채권단과 기업간의 헤게모니 변화로 이어진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재무구조개선약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사적 협약”이라며 “양자가 안 지키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환위기 때는 은행들에 힘이 실렸기 때문에 밀어붙일 수 있었다”며 “지금은 기업들의 차입도 줄고 부실도 현재화하지 않아 은행들의 힘이 약하다”고 말했다.
대출 회수 같은 금융제재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모든 채권단이 여신 중단에 합의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은행들이 자기 이해관계만 챙기는 상황에선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출 회수를 하고 기업이 이를 못 갚으면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급증한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새로운 ‘수술도구’가 필요한데, 정부가 이를 만들어낼 의지와 능력이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약정의 구속력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근 경제지표가 호전되면서 기업들의 저항이 더 세질 수 있다”며 “개선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