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구책 요구 없이 지원책만…은행·건설사 갈팡질팡
정부가 건설사 지원책을 잇달아 내놓고 은행들에는 건설사 지원을 압박하고 있지만, 정작 건설사 구조조정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자구 노력 요구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실물경제와 금융권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18일 은행연합회는 건설사 관계자 300여명을 대상으로 은행·증권사 등으로 구성된 건설회사 채권단 모임인 ‘대주단 협약’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다. 은행연합회는 “건설사 일부에서 대주단 협약의 경영권 간섭 등의 문제를 우려하고 있지만 대주단 협약에는 양해각서 체결이나 자산매각 등의 요구 사항이 포함돼 있지 않다”며 “신규 자금을 지원할 때도 자금 용처를 확인하는 정도의 작업만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설명회에서 건설사의 구조조정이나 자구 노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건설사들이 가장 궁금해한 선별 기준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 적어도 채권은행간 컨센서스는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런 기준이 없다니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대주단협의회가 사실상 금융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조정은 없으니 일단 가입해서 지원을 받아라’는 식의 태도는 정부 의지 또한 마찬가지라는 ‘신호’로 해석된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지금까지 정부에서 ‘옥석을 가리겠다’는 원론 외에 건설사 구조조정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나 액션 플랜을 내놓은 적이 있느냐”며 “이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건설사를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실제 금융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옥석을 가려야 하겠지만 중간지대, 한계기업 같은 경우에는 정부가 지원해서 살려줘야 한다”며 “건설사 하나가 쓰러지면 얼마나 많은 고용이 없어지고 경제에 대한 타격이 크냐”고 말했다. 고용유발 효과, 경제 심리에 미치는 악영향 등을 고려하면 건설사들을 되도록 많이 살려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전체 금융권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규모는 지난 6월 말 기준 97조1천억원에 이르고 이 중 상당 규모는 현재 미분양 때문에 대출 회수가 불투명한 상태다. 미분양 문제가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국내외 경기 또한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구조조정 작업이 병행되지 않는 자금 지원은 결국 더 큰 부실과 금융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깊어지는 배경이다.
강경훈 동국대 교수(경영학과)는 “전세계적인 거품이 꺼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거품을 터뜨리지 않고 가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은행의 잠재부실만 키울 수 있다”며 “이는 외국인의 국내 은행에 대한 불신을 높여 외채 회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건설사 한두 개만 부도나도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얼마나 떨어질지 모른다”며 “정확한 미분양 건수도 공개하지 않으면서 지원만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길기모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원은 “정부가 ‘부채비율 몇%’ 같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 뒤, 자산매각·대주주 유상증자 등의 자구노력 스케줄을 받고 그 이행 정도에 따라 지원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안선희 김경락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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