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 탈세 노린 계좌 9782개 찾아내
사망자 정보 은행연합회에 제공되지 않는점 악용
사망자 정보 은행연합회에 제공되지 않는점 악용
지난해 11월 국내 은행들의 신규계좌 개설 현황을 점검하던 감사원 재정·금융감사국 직원들은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미 숨진 사람의 이름으로 된 신규계좌가 9782개나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신규계좌가 무더기로 개설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감사원은 금융감독원과 금융정보분석원 등 주요 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지난 2002년 1월~2007년 8월까지 실시한 ‘자금세탁방지대책 추진실태’에 대한 첫 감사 결과를 15일 발표했다. 이 기간 동안 감사원은 사망자 명의로 개설된 예금계좌 1만여개 가운데 3033개를 샘플 조사한 결과, 절반 수준인 1484개가 금융실명법을 위반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사망자 명의로 밝혀진 신규계좌 가운데 절반 가까운 5천여개가 불법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금융회사들이 금융실명제법을 현장에서 버젓이 거스르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은행간 무차별적으로 진행돼온 수신고 경쟁 탓이다. 예금주 쪽에서 볼 때 탈세 목적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불법을 저지른 금융회사에는 국민과 하나, 우리, 신한, 농협 등 대다수 시중은행이 포함돼 있었다. 감사원은 사망자 이름으로 된 신규 계좌들이 대부분 탈세 등의 목적으로 개설된 혐의가 짙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은 금융감독원에 대리인의 실명확인 증표나 가족관계 확인서류를 살피지 않은 채 사망자 이름으로 신규계좌를 개설해 준 금융회사 임직원 866명을 금융실명제법 위반 혐의로 중징계와 함께 과태료를 물리도록 요구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금융위원회 위원장에게도 금융기관이 사망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통보했다. 은행들이 은행연합회를 통해 사망자 정보를 공유하면 금융회사 자체 감시망을 통해 사망자 명의의 계좌를 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감사에서 국민은행과 농협 등 10개 금융회사 직원 843명은 의뢰자의 가족관계 증빙서류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물론, 사망자가 직접 창구에 와서 계좌를 개설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감사원 쪽은 밝혔다. 특히 6개 금융회사 직원 43명은 자신의 친족 가운데 사망자 이름의 예금계좌 63개를 직접 개설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 쪽은 “이번 금융비리는 금융거래를 누설한 것은 아니어서 형사고발 대신 과태료 처분을 받도록 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법상 사망자 명의 개설에 의한 금융실명제 위반은 행정법상 과태료 대상이다. 감사원은 “자금세탁방지대책 추진실태에 대한 첫 감사에서 이렇게 많은 불법사례가 쏟아질 줄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최익림 기자 choi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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