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패널’ 팔기만 하고 수리는 없다
업체들, ‘무보증 제품’ 유상수리조차 거부
AS ‘뺑뺑이’ 돌던 소비자 “버리는 게 낫다”
AS ‘뺑뺑이’ 돌던 소비자 “버리는 게 낫다”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전자제품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임아무개 사장은 올해 초 한 지방자치단체에 납품한 엘시디(LCD) 모니터에 대한 ‘클레임’을 받았다. 대당 26만원에 300개를 납품했는데, 이 가운데 30~40개에서 화면 일부가 시커멓게 멍울지는 불량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의 패널은 대기업인 엘지디스플레이가 만든 것인데다 납품 받은 지 1년이 안 됐기 때문에 임씨는 별 탈 없이 수리나 보상이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1차 구매처에 가서 항의했더니 자기들이 물건을 떼온 대리점(총판)에 책임을 넘기더군요. 총판에 갔더니 이번엔 무보증 제품으로 나간 것이라 무상수리를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임 사장은 사전에 무보증 제품이란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상수리 요청도 사실상 거부당했다. “수리비가 최소한 15만원은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냥 사설업체에 가서 ‘야매’로 고쳐 쓰라고 하더군요. 어떡합니까? 클레임은 계속 들어오고 시간은 없고….”
임 사장의 ‘뺑뺑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종 모델이어서 부품이 없다”(민간 수리업체)라거나 “엘지에 납품하는 물량 외에 소매로는 팔지 않는다”(부품 납품업체)는 말에, 임씨는 마지막으로 엘지디스플레이 쪽에 직접 연락을 했다. 하지만 “무상이든 유상이든 모든 애프터서비스는 총판을 통해서 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른바 ‘무보증 제품’들 때문에 소비자와 중간 유통업자들이 골탕을 먹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재 엘지디스플레이, 삼성전자 등 국내 대형 패널업체들이 생산·판매하는 ‘B급 패널’은 대부분 무보증 제품(노워런티)들이다. 무상수리나 품질보증기간을 따로 두지 않는 조건으로 정품(A급)보다 싸게 파는 제품들이다. 한 엘시디 패널 총판대리점 관계자는 “패널 메이커들이 재고나 사용 가능한 일부 불량품을 처리할 목적으로 정품의 반값 정도에 B급 제품을 내놓는다. 주로 패널 품질이 중요하지 않은 게임방이나 노래방용으로 많이 나간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들 제품이 사실상 유상수리조차 불가능한 ‘애프터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엘지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 쪽은 “노워런티로 나가는 제품은 그리 많지 않다”며 “이들 제품도 총판의 요청이 있으면 해당 부서에서 유상수리를 해준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중간 유통업자들은 턱없이 비싼 수리비를 요구하는 등 사후 수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대해 총판대리점 관계자는 “수리비는 패널 업체들이 책정한 기준을 따를 뿐”이라며 “사실 패널 업체들이 ‘노워런티 제품까지 대응하려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며 (무상수리 요청을) 잘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패널 생산업체와 총판대리점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품 흠에 따른 손해는 대부분 중소 유통업자나 최종 소비자의 몫이다. 한국소비자원 피해구제팀 담당자는 “일본의 경우 패널은 핵심 부품으로 분류해 품질 등급과 제조원을 의무적으로 표기하게 돼 있다”며 “일부 불량품까지 유통되는 상황이라면 소비자 알권리 차원에서 등급제 등 품질 규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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