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범(66) 영산그룹 회장은 ‘오스트리아 문화 대사’로 불린다. 자동차 부품 생산이 주력인 영산그룹 본사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 빈 필하모닉, 빈 심포니, 빈 소년 합창단 내한 공연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참관 등 오스트리아 문화 교류는 예외 없이 박 회장이 징검다리를 놓는다. 지난해 11월엔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22대 회장에 선출돼 취임했다. 유럽에서 배출된 첫 회장이다. 그가 이제 67개국, 147개 도시에 지회를 두고 촘촘한 네트워크를 갖춘 최대의 한인 경제단체를 통해 문화와 경제의 접목에 나섰다.
“문화, 예술이 배경에 있을 때 우리 물품에 대한 충성도가 오래 가고 기업 이미지도 좋아지더군요.” 지난달 30일 만난 박 회장은 “동유럽 무역업을 하면서 문화, 예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며 “문화예술을 후원한 뒤로 ‘돈만 벌어 빼 가는 회사가 아니다’란 이미지를 얻게 됐다”고 했다. 그가 기아차 오스트리아 법인에서 일하다 1999년 빈에 차린 무역회사 ‘영산한델스(Handels·무역)’가 영산그룹 모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체코,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무역에서 출발해 아프리카로 영역을 넓혔고, 사탕 포장지로 시작해 화학제품, 자동차 부품, 완성차 조립, 플랜트 등으로 업종을 다양화했다. 연 매출 6000억~1조 원대 규모다. 전주·김해를 비롯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20개국에 28개 법인·공장을 두고 있다. 박 회장은 “1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 돌아다닌다”며 “대한항공 기록만 봤더니 비행 기록이 640번 넘더라”며 웃었다.
무역과 예술의 접목은 친선 음악회가 출발점이었다. “2005년부터였어요. 우크라이나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등 사업체가 있는 지역에서 현지 주요 교향악단과 한국 음악가들이 협연하는 친선 음악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클래식 전통이 깊은 동유럽 현지 유명 악단의 공연을 주선하고, 유럽 유학 중인 한국인 연주자와 협연하도록 했던 것. 박 회장은 “빈에서 30년 이상 살면서 빈 필과 빈 심포니, 빈 국립음대, 빈 박물관 등을 오래 후원했다”며 “그 덕분인지 빈의 국공립 예술기관 대표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고 했다.
2010년엔 오스트리아 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고, 2년 뒤엔 한인문화회관을 건립해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연습 공간과 연주 무대로 활용하도록 했다. 건축비 상당 부분을 박 회장이 부담했다. 유학생 지원에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2012년엔 박 회장의 부인 송효숙씨가 빈에 클래식 전문 기획사 ‘더블유시엔’(WCN∙World Culture Network)을 출범시켰다. 유럽 각지의 한국대사관들과 함께 음악회를 열거나 한국인 음악가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지원한다.
“여기저기서 공연 의뢰가 들어와 아예 체계적으로 진행하자는 판단에서 기획사를 세웠지요.” 영산그룹은 빈 필과 빈 필 아카데미, 빈 심포니, 빈 슈타츠오퍼, 베를린 슈타츠오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과 클래식 음악축제, 예술단체의 주요 후원자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인연으로 2019년 이후 빈 필과 빈 심포니는 어느 악단보다 자주 내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199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창업해 연 매출 6천억 이상 회사로 키워 부인은 빈에 클래식전문기획사 세워 한국 음악가들 유럽무대 진출 지원
“문화예술 함께면 기업 호감도 올라 한국 중소기업 해외진출 도울 터”
박 회장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커다란 타격이었다. “러시아에 플라스틱 사출 등 5개 공장을 지었는데 전쟁으로 모두 가동이 중단됐어요. 손실이 엄청났지요.” 그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사업을 일군 터전이었기에 마음이 더 아프다”고 했다. 그 와중에 슬로바키아로 넘어온 우크라이나 난민 30명을 슬로바키아 공장에 취업시켰다.
영산그룹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민족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공로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최재형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로부터 상도 받았다. “최재형 선생의 증손자가 러시아에 살더군요. 그분이 이번 전쟁 전까지 러시아에 있는 우리 회사 직원으로 일하셨어요.”
남아공, 모잠비크, 보츠와나, 말라위 등지의 식수난 해소를 위해 우물 파주기, 화장실 만들기 사업도 지원하고 있다. 박 회장은 “사회 공헌 사업은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며 “그 전까지는 저도 먹고사는 게 바빠 정신없이 제 일만 했다”고 말했다.
월드옥타는 7천여명의 재외동포 최고경영자들과 3만2천여명의 재외동포 차세대 경제인 등 3만9000명 규모로 구성된 단체다. 1981년 ‘한국산 제품을 전 세계에 팔아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자’는 취지로 출범했다. 회원 투표로 선출된 박 회장은 “대한민국의 ‘경제 영토’를 확대하는 최일선에 있는 조직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국내 중소기업, 스타트업들에게 해외 진출 통로를 열어주고 싶어요.” 이 연장선에서 오는 10월 빈에서 여는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한국 상품 유럽 박람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 행사에 국내 신인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일종의 ‘아트페어’도 연다. “차츰 클래식, 국악 분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월드옥타는 산하에 한·미, 한·일, 한·중, 한·러, 남북 경제포럼위원회(가칭)를 뒀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에 걸림돌이 되는 장벽을 허물어 나가는 일이 핵심이다. 그 첫 목표가 미국 취업 비자(H1) 할당을 늘리는 일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최근 미국 투자를 엄청나게 늘렸잖아요. 그래서 많은 인원이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취업 비자 부족으로 나가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문제 해결에 우리 네트워크가 앞장서려고 해요.”
박 회장은 “해외에서 활동하다 은퇴를 앞두고 귀국을 원하는 회원들이 건실한 국내 중소기업에 투자하고 경영 비법도 전수하면서 정착하게 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