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마음에 예·적금을 모두 인출하려고 지점에 왔는데, 어제와 달리 한산한 모습을 보니 고민되네요.”
지난 여름 새마을금고 사태 당시 언론보도의 한 대목이다. 금융소비자의 이 발언은 뱅크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은행 부실 여부에 대한 ‘나’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다른’ 예금자들의 판단과 행동이 관건이다. 자산과 부채의 만기가 다른 은행 특성상, 어떤 계기로 부채 보유자(예금자)들이 대거 부채의 상환을 요구하면,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은행은 없다. 본래 큰 문제가 없던 은행도 예금자들의 패닉으로 뱅크런이 발생하면, 실제로 부실은행이 된다.
은행이란 매우 특이한 존재다. 미국 예일대 개리 고튼(Gary B. Gorton) 교수에 따르면, 은행의 생산물은 단기부채다. 자동차회사가 자동차를 만들고, 컨설팅회사가 경영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것처럼, 은행은 화폐로 사용되는 단기부채를 만든다. 이 화폐는 은행의 채무증서로서, 상환능력에 대한 신뢰가 유지되는 한 일상에서 지급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은행의 민간화폐는 시장경제 안에서 민간기업이 만든 화폐인 만큼, 그 생산과정도 시장 논리를 따른다. 은행 대차대조표를 통해 보면, 대출자산이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그 자산에 대응하는 단기부채로서 예금이라는 화폐가 생성된다. 투자 전문가로서의 은행은 주어진 금리여건에서 대출자가 수행하는 사업의 전망과 수익성 등을 고려하여 대출 대상을 선정한다. 여기서 화폐공급은 화폐수요의 적정성에 대한 시장 참여자들의 평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중앙집중적 권력이나 소수 집단에 의한 화폐공급보다 우월하고 효율적인 까닭이다.
그러나 시장 논리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여기까지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장에서 회사채의 시장가격은 발행기업의 사업에 대한 시장 참여자들의 평가를 반영한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은행의 채무증서인 민간화폐의 시장가격도 은행의 건전성에 대한 평가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현재 민간화폐의 주요한 형태인 요구불예금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으며, 시장가격도 없다.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해서 시장 법칙이 관철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어긋날 때, ‘가격’이 조정됨으로써 수급은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가격 조정이 어려울 때, 균형을 이루는 또 다른 방식은 ‘수량’ 조정이다. 예금자들의 패닉에 의한 뱅크런은 바로 수량 조정의 극적인 형태다. 예금자들이 은행이 발행한 채무증서의 상환가능성을 의심하게 되어서 은행예금에 대한 수요가 급감할 때, 가격 조정 대신 수량 조정이 발생하는 현상이 바로 뱅크런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량 조정으로서의 뱅크런은 은행 민간화폐의 수급이 조절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민간화폐의 형태와 특성에 따라 다른 방식도 가능하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자유은행 시대’에는 민간화폐의 수급 조절이 ‘가격 조정’ 형태로 전개됐다.
현재 은행들의 주요한 부채는 예금이지만, 자유은행 시대 은행의 주요한 부채는 은행권이었다. 자유은행법이 시행된 많은 주에서 은행들은 주정부 채권을 담보로 각자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최소자본금 규모와 일정 규제를 충족하기만 하면 누구나 은행업을 영위할 수 있었고, 당시 35개 주에서 3089개의 은행권이 유통됐다고 한다.
자유은행 시대의 특징은 은행권들이 서로 교환되는 유통시장, 즉 2차 시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은행권 거래 중개인도 많았다. 여러 은행권의 시세, 즉 은행권 간의 교환비율을 알려주는 일종의 정보지인 ‘노트 리포터’도 다수 발간됐다. 개별 은행권의 시장가격은 자산건전성에 대한 평가, 담보로 잡은 주정부 채권의 시장가격(주정부 파산이 빈번했고, 주정부 채권은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됐다), 거래지역과 발행은행 소재지와의 거리 등에 따라 결정됐다. 동일한 은행권도 거래지역에 따라 가격이 달랐기 때문에 차익거래를 추구하는 중개인도 있었다.
많은 은행권의 시장가격은 액면가를 밑돌았다. 은행권의 시장가격이 발행은행의 상환능력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거쳐 결정됐다는 점에서, 당시 은행권 시장에서는 가격 조정이 이뤄졌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은행 시대의 은행권 시장은 ‘효율적인’ 시장이었지만, 지급수단 및 가치저장수단으로서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민간화폐 시장에서 가격 메커니즘의 작동은 어떤 의미에서 ‘효율적인 시장’을 만들어내지만, 화폐제도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불안정한 제도로 귀결된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지급결제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좋은 화폐제도가 지녀야 하는 속성 중의 하나는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이다. 여러 화폐가 공존할 수 있지만, 지급수단과 가치저장 등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다양한 형태의 화폐들이 액면가대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가격이 수시로 액면가를 하회했던 자유은행 시대의 은행권들은 단일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이는 은행권 시장에서 가격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였다. 증권시장에서 가격의 변동은 정보 발견을 위한 시장의 작동이지만, 화폐시장에서 가격 변동은 화폐의 기능을 훼손한다.
1863년 전국은행법 제정과 더불어 개별 은행권들은 사실상 퇴출되었으나, 이를 전후로 은행들의 주요한 부채는 은행권에서 요구불예금으로 전환되었다. 토큰 기반 화폐로서의 은행권과 달리, 유통시장에서 거래되기 어려운 계좌기반 화폐로서의 예금화폐의 특성, 그리고 이후 연방준비은행 설립을 통한 지급결제제도의 확립 등으로 인해 화폐의 단일성이 제고됐으며, 더는 민간화폐 시장에서 가격 조정은 나타나기 어렵게 됐다. 현대적인 지급결제제도의 도입은, 불안정한 민간화폐인 요구불예금이 지급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최종적인 결제는 중앙은행 화폐 또는 신뢰가 남다른 민간은행 화폐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확립함으로써 가격 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수량’ 조절 시대, 뱅크런이 더 잦았던 까닭
그러나 민간은행권이든 요구불예금이든 간에, 은행 단기부채로서의 불안정성은 동일하며, 시장의 작동 양태가 변했을 뿐이다. 자유은행 시대 은행권 시장에서의 가격조정은 이후 요구불예금 시장에서의 수량 조정(뱅크런)으로 변경됐다. 이는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예금자들의 패닉에 따른 뱅크런이 자유은행 시대보다 전국은행법 이후 시대에 더욱 빈번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민간화폐는 시장에서 공급되지만, 유통과정에서 시장 메커니즘 작동은 역설적으로 민간화폐의 불안정성을 심화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은행의 만기불일치라는 특성으로 인해 패닉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는 예금화폐의 경우, 부채 보유자의 적극적인 시장 규율은 오히려 패닉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지난 3월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 이후 전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빌 더들리 총재는 보호 한도 초과예금을 보유한 거액 예금자들은 사실상 은행 건전성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패닉에 빠지는 것 이외의 다른 방안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서두에서 인용한 뱅크런의 자기실현적 속성을 감안한다면, 패닉과 차분한 시장규율 사이의 구분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예금보험은 은행의 단기부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통해 예금자들의 시장규율을 억제함으로써 패닉에 따른 뱅크런을 막기 위한 제도이며, 민간화폐의 불안정성을 성공적으로 억제해왔다.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은 재량적(조건적) 지원이라는 특성 때문에 예금자들의 신뢰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예금보험은 비재량적인(무조건적인) 지급보증이라는 특성 덕분에 신뢰 확보에 용이하다. 물론 예금보험에 따른 시장 규율의 무력화로 인한 부작용은 별개의 문제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모건 릭스(Morgan Ricks) 교수는 패닉을 억제하기 위한 금융안전망은 역사적으로 세 단계를 거치며 진화해 왔다고 평가한다. 첫째 규제(자본 및 자산건전성 규제, 감독 등), 둘째,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 셋째 예금보험제도가 그것이다. 다만 예금보험은 예금자들의 시장규율을 무력화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부작용의 완화가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셋째 국면에서 규제의 역할은 패닉의 억제 그 자체라기보다는 예금보험의 부작용 완화를 위한 것으로 변화하며, 아울러 개별은행의 위험도 평가를 반영한 차등보험료율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l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