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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은행은 연금술사? 민간화폐는 허공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등록 2023-08-23 07:00수정 2023-08-23 08:32

[전문가리포트] 화폐를 다시 생각한다

필자가 소중한 지면을 빌려 계획경제보다 시장경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한다면, 기이하게 여겨질 것이다. 충분히 입증된 사안을 재론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자명해 보이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시장경제가 이론적·실천적으로 계획경제를 압도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30-40년대의 사회주의 경제계산 논쟁을 시장경제의 이론적 승리로 간주한다면, 그 승리는 시장경제 체제가 현실에서 확립된 후 백년 이상 지나서였다. 계획경제가 파산하기까지는 시장경제의 이론적 승리 이후에도 수십년이 더 걸렸다.

■ 화폐, 누가 공급할 것인가

아직도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은 영역이 있다. 바로 화폐다.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에서 시장경제가 계획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화폐를 어떤 식으로 만들고 배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다수 국민들이 은행과 통화체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의 대공황기에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남긴 말인데, 현대의 통화체제에 심각하게 불합리한 요인들이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은행의 화폐 창조를 연금술에 비유하는 것도 유사한 문제의식의 표현이다. 중세의 연금술은 구리나 납 등의 비금속을 재료삼아 금을 만드는 것으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선 미신이거나 사기에 해당한다. 연금술이라는 비유 근저에는 이른바 ‘신용창조’를 통한 민간은행의 화폐 발행이 바람직하지 않거나 정당성이 미흡한 행위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헨리 포드의 발언이 100여 년이 지나서까지 회자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현대 화폐제도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화폐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은 일단 제쳐두고, 좀 더 실용적인 문제에 집중해보자. 좋은 화폐제도가 지녀야 하는 속성 중 하나는 적절한 양의 공급 능력이다. 화폐는 경제활동의 팽창과 더불어 적절하게 늘어나야 한다. 지나치게 늘면 화폐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며(인플레이션), 너무 적게 공급되면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문제다(디플레이션).

화폐를 공급하는 첫째 방식은 귀금속의 양과 연계하는 것이다. 과거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금속화폐는 가치의 근거가 뚜렷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공급량이 경제활동의 변화와 무관하게 귀금속의 양에 의해 제한된다는 점에서 좋은 화폐는 아니다. 인류의 경제활동이 거의 정체되어 있던 중세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산업혁명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화폐를 공급하는 또다른 방식은 중앙집중적 권력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여기서 화폐가치는 귀금속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의존하지 않으며, 강력한 권력이 뒷받침한다(상대적으로 분권적이었던 서구보다 절대군주의 권력이 강력했던 중국 등에서 ‘지폐’가 먼저 탄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자 의지와 판단에 따라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기에, 공급의 경직성이라는 금속화폐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으나 동시에 화폐 남발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권력자가 선한 의지와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화폐 공급의 자의성이란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화폐 발행 권한을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 주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민간화폐는 “허공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화폐공급을 정치권력 또는 특권적 집단이 결정하는 체제의 문제점은, 자원배분을 중앙집권적 기구가 결정하는 계획경제 체제의 문제점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양자 모두 전지전능한 것으로 가정된 정치권력이 최적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자원 배분 또는 화폐 공급을 결정한다. 그러나 누가 무슨 재화와 서비스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중앙집권적 계획기구가 알 수 없으며, 또한 화폐를 누구에게 얼마나 주어야 사회적으로 효율적인지를 정치권력이 알기 어렵다.

시장경제 체제의 장점은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시장경제는 분산된 경제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원의 최적 배분을 달성하는 체제다. 개별 경제주체들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경제활동을 하되, 시장가격이라는 신호에 따라 각자의 행위를 조정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효율적인 결과에 도달한다.

현대 화폐의 생산도 마찬가지다. 민간은행은 대출을 통해서 화폐를 만들어낸다. 은행은 대출자 명의의 통장에 일정 금액을 기입(화폐 창조)함으로써, 대출을 실행한다. 대출을 통한 화폐창조 과정은 은행의 자의적 행위가 아니다. 대출을 통해 화폐가 새로 만들어지려면 우선 일단 대출 수요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바로 화폐에 대한 수요다. 대출 상환가능성에 대한 은행 판단은 화폐수요의 적정성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 대출을 통해 은행이 얻는 이윤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화폐 공급에 대한 보상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별 생산자의 이윤동기에 의해 자원의 사회적 배분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칭한 것처럼, 현대 시장경제에서 화폐의 공급은 개별 은행의 이윤 동기와 결합되어 있다. 만약 은행이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화폐를 만들어냈다면, 그 대출은 부실화되고 은행은 손실을 본다.

요컨대 대출을 통해 만들어진 화폐의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그 대출의 건전성이다. 민간화폐는 ‘허공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차대조표를 통해 표현하자면, 자산 항목에 대출자산이 생기고, 그것에 대응하는 부채로서의 예금이라는 화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 ‘연금술’로 간주하는 것은, 화폐의 가치는 물리적인 실체에 근거해야 한다는 관념의 흔적일 뿐이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화폐는 그 가치가 언제나 보장되는, 완전한 화폐가 아니다. 가치를 뒷받침하는 귀금속도 없고, 강력한 국가권력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은행의 민간화폐는 내재적으로 불안정하다. 상환가능성이 완벽하게 보장된 무위험대출은 있을 수 없는 탓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민간화폐도 없다. 이러한 불안정은 화폐 공급을 민간은행에 맡긴 대가이지만, 그로 인해 얻는 것은 금속의 공급량과 독립적이며 정치권력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화폐 공급의 가능성, 즉 민간의 화폐수요에 대응하는 탄력적인 화폐공급의 가능성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민간화폐의 역사에 대한 재검토 필요

중앙의 지침과 계획이 없기에 시장경제는 마냥 매끄럽게 작동하지 않는다. 경기 과열과 침체를 반복하며, 파산과 실업이 발생하고, 불평등이 심화되기도 한다. 민간은행 화폐 공급 체제도 마찬가지다. 민간화폐의 내재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금융거래가 혼란에 처할 수 있으며, 은행이 파산하면서 민간화폐가 가치를 상실하기도 하고, 심지어 뱅크런도 발생한다.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경기조절 정책을 시행하고 복지제도를 도입한 것처럼, 민간화폐의 불안정성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져 온 것이 바로 중앙은행과 예금보험 등의 금융안전망이다.

시장경제의 혼란과 부작용 때문에 계획경제라는 이상향이 등장했던 것처럼, 민간화폐의 불안정을 이유로 공공화폐를 꿈꾼 시도들은 반복적으로 등장해왔다. 불완전한 민간화폐를 100% 안전한 중앙은행 화폐로 대체하자는 ‘내로 뱅킹’의 시도는, 시장경제의 혼란과 부작용을 이유로 계획경제를 도입하자는 발상에 가깝다.(내로 뱅킹을 주장한 어빙 피셔의 슬로건은 ‘화폐의 국유화’였다.)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간의 대립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화폐 영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혼란과 모호함은 화폐와 금융의 역사에 대한 통념에도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과거 민간은행들이 자유롭게 은행권을 발행하던 시절의 혼란이 중앙은행의 독점적 발권력에 의해 해소되었다는 인식,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의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신용창조를 한다는 주장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민간은행들은 여전히 화폐를 발행하고 있으며, 그 불안정성을 완화하기 위한 금융안전망의 개선과 보완이 진행되어 왔을 뿐이다. 이는 다음 주제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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