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호텔에 걸려 있는 액자. 도시 슬로건 ‘포틀랜드를 유별나게’(Keep Portland Weird)를 담고 있다. 김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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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를 유별나게.’(Keep Portland Weird) 미국 근무를 시작한 첫해 여름, 포틀랜드의 호텔에서 마주친 대형 액자의 슬로건이 아직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가장 적절할지 고심해보기도 했다. 포틀랜드를 이상하게, 포틀랜드를 기이하게, 포틀랜드를 기묘하게, 포틀랜드를 기괴하게까지….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겠지만 포틀랜드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공간의 자부심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나는 일부러 ‘유별나게’를 선택했다. ‘포틀랜드를 유별나게.’
실리콘밸리에 와서 처음 떠나는 장거리 여행지로 오래전부터 포틀랜드와 시애틀을 점찍어뒀다. 세상을 뒤흔든 기업들이 미국 서부 해안도시의 지역 정체성을 기반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베이에어리어(Bay Area)는 거주하는 곳이고 샌프란시스코는 당일치기로도 충분히 오갈 수 있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다. 재미도 있어야겠지만 의미도 챙겨야 한다. 편도 934마일, 약 1500㎞ 넘는 장거리 자동차 여행의 목적지로 포틀랜드와 시애틀을 택한 이유다.
포틀랜드를 유별나게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에서 2022년 3월 발간한 자료도 내 선택을 뒷받침해줬다. ‘기술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Tech)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혁신생태계가 형성된 미국 도시의 영향력을 분석했다. 브루킹스는 미국 혁신지역을 슈퍼스타(Superstars), 샛별(Rising Stars), 나머지(the rest)로 분류했다. 슈퍼스타에 해당하는 도시는 8곳이다. 서부의 새너제이·샌프란시스코·시애틀·로스앤젤레스 4곳이 속하고 동부에는 뉴욕·보스턴·워싱턴 3곳이 있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텍사스주 오스틴을 꼽으면서 유일하게 각주를 달았다. 다른 7개 도시보다 규모는 작지만 오랜 중요성과 빠른 성장세로 추가한다고 말이다. 슈퍼스타 도시 8곳 중 7곳이 해안도시이고, 7곳 중 4곳이 서부에 있다.
포틀랜드는 슈퍼스타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업무와 큰 관련이 있다. 실리콘밸리무역관의 관할지역은 6.5개주다. 사무실이 자리잡은 북캘리포니아 외에 워싱턴, 오리건, 몬태나, 아이다호, 와이오밍, 알래스카 6개주가 물리적 업무 범위에 해당한다. 물론 모든 주를 기계적으로 배분해 동등하게 노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주와 포틀랜드가 자리한 오리건주는 창업과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다.
아마존, 스타벅스, 마이크로소프트, 코스트코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창업한 사실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오리건주는 나이키가 탄생한 곳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나이키를 ‘세상에서 가장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로 평가했다. 나이키를 창업한 필 나이트는 오리건주 사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품과 브랜드에 담기 위해 일평생 공들였다. 나이키의 역사를 써내려간 세계본부를 오리건주에서도 시골이나 다름없는 포틀랜드 외곽 비버턴에 두고 시작한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오리건주 비버턴에 있는 나이키 세계본부의 모습. 나이키와 계약한 스포츠 스타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욱진
나이키는 ‘오리건의 남자’ 두 명이 창업한 회사다. 오리건대학 육상선수 출신인 필 나이트와 나이트를 지도한 빌 바우어만이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시작은 미미했다. 전업 육상선수가 되기에는 재능이 부족했던 나이트는 오리건대학과 스탠퍼드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도 달리기 꿈을 버리지 않았다. 나이트는 육상선수를 위한 운동화를 파는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대학 시절 코치인 바우어만을 찾아간다. 바우어만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들을 위해 운동화 몇 켤레를 구매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동업을 제안한다. 500달러 수표를 써주며 49% 지분을 갖는 조건으로 경영권은 나이트에게 위임했다. 이로써 초기 자본금 1천달러짜리 회사가 탄생했다. 1964년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리본 스포츠’가 출발을 알린 것이다.
나이트는 자서전인 동시에 나이키의 창업 분투기인 <슈독>(Shoe Dog) 의 막을 올리면서 ‘오리건 트레일’(Oregon Trail) 이야기부터 꺼낸다. 오리건 트레일은 19세기 중엽 골드러시 때 개척자들이 걸어온 기다랗고 험준한 길이다. 미주리주에서 오리건주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며 총길이는 약 3492㎞에 이른다. 미국 토지관리국은 1841년부터 1884년까지 이 길을 걸은 사람이 약 50만 명쯤으로 추산한다. 몇몇은 길에서 태어났고 몇몇은 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이트는 오리건 트레일을 떠올리면서 ‘오리건 사람들의 권리, 기질, 운명, 디엔에이(DNA)’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리건 사람으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척자 정신’(Pioneer Spirit)을 정의한다. 바로 “비관적인 생각을 버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이다.
2023년 4월 개봉한 영화 <에어>(Air)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에어>는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1980년대 동부 사람들이 오리건주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보여준다. 조던의 에이전트는 나이키를 대표하는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 분)와 협상하며 비꼬듯 말한다. “오리건 황야에서 웬일이야?” “보통 회사처럼 본부를 동부에 둘 수는 없니?” 바카로는 담담히 대답한다. “그들은 여기를 사랑해.” 그들은 물론 창업자 나이트와 바우어만이다.
비버턴의 나이키 세계본부를 방문했을 때 변방과 다름없는 곳에서 변화를 만들어낸 오리건주 사람들의 절실함이 느껴졌다. 캠퍼스를 돌면서 휴식하러 나무벤치에 앉았다. 나무벤치에는 “위대함을 갈구하는 이에게 위대함은 어디에나 있다”(Greatness is wherever somebody is trying to find it)는 문구가 새겨 있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위대함을 찾으려 애쓴 필 나이트의 마음이 전해졌다.
미국 오리건주 비버턴에 있는 나이키 캠퍼스의 나무벤치. “위대함을 갈구하는 이에게 위대함은 어디에나 있다”(Greatness is wherever somebody is trying to find it)는 글귀가 새겨 있다. 김욱진
포틀랜드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 3시간30분을 쉬지 않고 달려 시애틀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오리건주, 오리건주에서 워싱턴주까지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무작정 서쪽으로 왔다. 동부 뉴저지주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맨해튼에서 세 군데 직장을 거친 그는 가정을 꾸리고 창업을 결심한다. 책을 파는 전자상거래 회사를 세우기로 마음을 굳힌 그는 근거지만은 쉽사리 정하지 못했다. 뉴욕을 떠나 비교적 인구가 적은 주에 사업체를 열겠다는 막연한 계획 정도만 있었다. 1994년 여름, 짐을 꾸리며 맨해튼을 떠날 준비를 하던 베이조스는 여전히 최종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이삿짐 회사가 도착지를 묻자 베이조스는 일단 무조건 서부로 가달라고 요구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988년형 쉐보레 블레이저를 몰고 아내와 함께 서부로 향하면서 베이조스는 갈 곳을 시애틀로 결정했다.
왜 서부였을까? 베이조스가 1997년부터 매년 4월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2018년 편지 제목을 ‘직관, 호기심, 방황의 힘’으로 지었다. “아마존은 설립 초기부터 호기심 많은 탐험가의 문화를 만들겠다는 확실한 비전이 있었다”고 설명하며 “탐험가는 전문가가 돼도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팔면서 세상에서 가장 고객 중심적인 회사를 키워내려고 노력한 야심가는 우주 사업으로 자신의 관심사를 옮기면서도 마음을 강조한다. 베이조스는 워싱턴에 있는 경제클럽(The Economic Club)과 인터뷰하며 담담히 고백한다. “내 사업과 인생에서 최고의 결정들은 분석이 아닌 마음, 직관, 배짱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분석에 기반해 결정할 수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언제나 직감, 직관, 기호, 마음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드러났다.”
‘선심초심’의 정신
내가 시애틀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마존의 초창기 흔적을 찾는 일이었다. 1990년대 후반 아마존 본부이던 시애틀 다운타운 2번가 1516번지는 주차빌딩으로 변모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현재 아마존 캠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존 본사 사무실의 이름은 ‘데이원’(Day 1)이다. 베이조스는 건물명을 ‘첫날’로 지을 만큼 초심(初心)을 강조한다. 베이조스가 초심이라면 나이키의 필 나이트는 선심(禪心)에 천착한다. 나이트는 나이키의 최고경영자인 동시에 선(禪, Zen) 수행자였다.
미국 시애틀 시내에 자리잡은 아마존 캠퍼스 ‘스피어스’(Spheres). 자연을 건물 내부로 가져오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김욱진
나이트의 자서전 <슈독>은 스즈키 순류의 “초심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숙련자의 마음에는 그 가능성이 아주 적다”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스즈키 순류는 1959년 샌프란시스코에 터를 잡고 미국 서부에서 선불교 전파를 주도한 승려다. 그의 가르침을 정리한 책 <선심초심>의 정신을 시애틀,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서부 해안의 기업가들이 적극 받아들인 사실이 한국인인 내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renew@kotr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