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박사가 지난 7월31일 서울 광화문 개인연구소에서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인터뷰하고 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에서 오늘날 1등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가 국민의 뜻에 따라 시대변화를 과감히 수용했기 때문이다.”
독일 전문가인 김종인 박사(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는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은 2차 대전 패배를 딛고 선진국 중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안정을 유지하고, 통일까지 이루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 박사는 우파인 기민련의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을 좌파인 사민당이 채택한 것과, 사민당의 동방정책(동유럽 공산국가와의 화해정책)을 기민련이 수용한 것을 대표 사례로 들었다.
김 박사는 또 독일이 정치·경제적 안정을 이룬 비결로 의원내각제에 기반한 연정을 통해 좌우 협치, 시장과 정부 역할에 조화를 추구한 사회적 시장경제, 노동자 경영참여를 통한 노사협력을 꼽았다. 김 박사는 “2차 대전 이후 독일 정부수립 초기에 아데나워 초대 총리와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이 정치·경제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면서 그 뿌리를 19세기말 비스마르크 총리에서 찾았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사회법을 제정해 건강보험을 처음 도입한 것은 자본주의 유지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를 계기로 독일의 전통적인 ‘사회국가’가 시작됐고, 오늘날 독일 시스템의 바탕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사회국가는 사회안전·건강 등 국민 복지를 정부가 책임지는 국가를 뜻한다.
김 박사는 우리나라의 최우선 개혁과제와 관련해 “승자독식 정치시스템을 독일처럼 대화와 타협을 추구하는 정치시스템으로 바꾸는 정치개혁이 시급하다”면서 의원내각제에 기반한 다당제구조를 제안했다. 또 경제 개혁과제로는 “중소기업을 키워서 대기업에 편중된 경제구조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제3의 정치세력 추진과 관련해 “제 1·2당을 견제하면 정치가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며 “제3세력은 국민이 가장 갈망하는 것을 찾아 해결방법을 제시해야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주문했다. 그는 “양극화 심화로 다음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가 다시 화두가 될 것”이라면서 “개혁을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와 프로그램이 있는 정치세력이 있으면 돕겠다”고 말했다.
김 박사와의 인터뷰는 독일 관련 책의 출간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의 개인연구소인 ‘대한발전전략연구원’에서 이뤄졌다. 2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인터뷰하는 모습은 83살의 고령(1940년생)이라는 사실을 잊게 했다.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유럽·일본 등 전 세계 주요국의 근현대사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은 여전했다.
김종인 박사와의 인터뷰는 한겨레신문사가 오는 10월11일 개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의 주제인 ‘갈등과 배제의 시대:공존의 길을 찾아서’와 관련해 독일모델의 장점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됐다.
■ 내각제 기반한 연정으로 협치
―독일 관련 책을 썼다고 들었다.
“책 제목이 ‘전범국가에서 모범국가로―독일은 어떻게 1등 국가가 되었나’이다. 8월 중순에 나올 예정이다.”
―책 부제가 ‘국내 최고 독일 전문가 김종인 박사에게 듣는 독일의 모든 것’이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우리가 해방 이후 미국식 제도를 따랐는데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거의 한계에 봉착한 것 같다. 독일이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좋은 예가 되지 않겠냐면서, 내가 독일을 잘 아니까 제대로 소개하는 책을 썼으면 좋겠다는 주위의 조언이 있었다.”
―독일의 어떤 점을 본받으면 좋겠나?
“독일은 과거 히틀러라는 못된 지도자가 나와서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앵글로 아메리칸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속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을 유지하고, 통일까지 달성했다. 그렇다고 독일방식이 100% 좋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참고하라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적 안정에는 의원내각제를 바탕으로 한 타협이 비결로 꼽힌다.
“1949년 서독 정부가 탄생할 때 민주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정치가 이뤄질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졌다. 기본법(헌법)을 제정하면서 승전국과 독일 국민 모두 과거 바이마르공화국 때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히틀러 같은 일당독재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거법을 어느 당도 혼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체 의석을 지역구와 비례대표로 절반씩 나누어서, 5% 이상 득표율을 얻으면 무조건 의석을 배분한다. 각당의 득표율에 비례해 의석이 주어지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따라 지역구에서 의석을 많이 얻으면 비례대표 의석이 줄어들고, 반대로 지역구 의석이 모자라면 비례대표 의석이 늘어난다. 독일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안정된 것은 내각제를 하면서 한 정당이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해서 타협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일정부 탄생 과정에서 아데나워 초대 총리가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데?
“그가 기독교민주연합(CDU)을 만들면서 옳은 방향을 제시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히틀러만의 죄가 아니라 독일 국민 공동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반면 사민당(SPD)은 히틀러의 범죄라면서, 아데나워를 미국의 앞잡이라고 공격했다. 아데나워는 또 민주주의, 사회적 보수, 유럽 통합이라는 세가지를 모토로 했다.”
■ 아데나워 초대 총리 리더쉽
―아데나워는 독일 정치의 연정 전통도 만들었다고?
“아데나워는 기민련과 (리버럴을 표방하는) 자유민주당(FDP) 간의 연정으로 출발했다. 아데나워는 1957년 총선에서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절대다수 의석을 얻었음에도 계속 연정을 유지했다. 독일이 계속 연정을 하다 보니까 오늘날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치가 자리잡게 됐다.”
―우파인 기민련과 좌파인 사회당 간의 대연정도 4차례나 이뤄졌다.
“기민련의 키징어 총리가 1967년 처음으로 사민당과 대연정을 이뤘다. 메르켈 총리도 3차례나 대연정을 했다. 이처럼 좌우를 넘어 여러 정당이 모여서 연정을 하다 보니까 ‘신호등 연정’(현재의 사민당(빨강), 자민당(노랑), 녹색당(초록)의 연정을 의미)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
―한국은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부의 정책이 부정되기 일쑤다. 하지만 독일은 사민당 출신인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정책)을 기민련 출신의 콜 총리가 계승했다.
“브란트 총리는 1972년 동독과 동서독 상호승인과 유엔 동시가입을 담은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기민련이 매우 격렬하게 반대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합의를 한 것에 대해 야당이 반대했던 것보다 훨씬 거셌다. 결국 브란트 총리를 불신임하면서 1972년 조기총선을 치렀는데, 독일 국민은 사민당을 지지했다. 기민련은 그 뒤로는 국민 뜻에 따라 동방정책에 일절 반대하지 않았다. 1982년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깨지고, 콜 총리가 기민련과 자민당의 연정을 시작했는데,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이것이 1990년 독일통일로 이어졌다.”
―기민련과 사민당이 경제분야에서도 정책을 계승했나?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2003년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등을 담은 ‘어젠다 2010’을 시행했다. 2005년 총선에서 기민련의 메르켈 총리가 승리했는데, 사민당과 대연정을 하면서 이를 모두 수용했다. 지난 70여년 간 독일 총리가 9명 밖에 안된다. 정치가 안정되니까 아데나워 14년, 콜 16년, 메르켈 16년 등 장기집권이 가능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나와서 기반을 잘 닦아야 한다.”
―독일 공영텔레비전(ZDF)이 2003년 독일 국민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명을 조사했는데, 아데나워가 당당히 1위를 하는 등 5명의 전직 총리가 포함됐다. 정치인이 불신받는 우리와 대비된다.
“그들이 올바른 정책으로 오늘날의 독일을 만들었으니, 국민이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다.”
■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
―초기 독일 정치에 아데나워 총리가 있었다면, 경제에는 에르하르트 경제장관(2대 총리)의 기여가 컸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독일을 만드는데 두 사람의 공로가 크다. 에르하르트는 처음에는 미군 점령지역의 경제 총책임자로 있다가, 나중에 아데나워 총리 밑에서 14년간 경제장관을 지냈다. 그는 1948년 6월 화폐개혁을 발표하면서 군정사령부가 시행하던 배급제와 가격통제를 철폐한다고 발표했다. 군정사령부가 취소하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이미 동독에는 소련식 계획경제체제가 들어섰는데, 서독의 경제가 이를 이기지 못하면 서유럽의 공산화를 어떻게 막겠느냐며 6개월 동안만 자기 뜻에 맡기라고 설득했다. 군정장관이 이를 받아들여서 배급제와 가격통제를 폐지하니까 없던 상품이 진열장에 나오고 공장에 연기가 나면서 독일의 경제부흥이 시작됐다.”
―에르하르트가 시작한 독일경제 시스템을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부른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되,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은 정부가 해결하는 정책 방향이다.
“에르하르트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에 ‘사회(소셜)’를 붙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라는 말만 보고 독일이 사회주의 경제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뿌리가 신자유주의라는 게 흥미롭다.
“신자유주의는 1939년 미국 언론인 볼터 리프만이 파리에서 국제학술회의를 연 것이 기원이다.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가 붕괴하고 대공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자유주의의 무엇이 잘못됐댜는 토론이 벌어졌고, 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강력한 정부라는 두가지가 병행돼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요즘은 신자유주의를 시장만능과 동의어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시장에 맡기면 다 된다는 사상으로 인식하는데, 원래 의미는 아니다.”
―독일 경제에서 주목받는 것이 협력적 노사관계이다. 그 비결로 노동자 경영참여제도가 꼽힌다. 메르켈 전 총리도 독일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독일의 패전이 역설적으로 노사관계에 도움을 줬다. 승전국들은 독일의 기간산업인 석탄·철강산업 업체들이 1·2차 세계대전을 부추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본가 혼자 기업의 의사결정을 못하도록 하려면 근로자 참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독일은 이런 승전국의 요구로 1951년 석탄·철강산업에 몬탄 공동결정제도를 도입했다. 그러자 독일 노총(DGB) 의장이었던 한스 뵈클러가 호응해서 협력적 노사관계를 제안했다. 원래 영국식 노동운동은 갈등을 전제로 근로자 권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은 노동운동의 방향전환을 이루었다. 1950년~60년대 선진국 중에서 노사분규가 가장 적은 나라가 됐고,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도 노동자 경영참여제의 일환으로 노동이사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경영계와 보수언론은 경영권 침해라고 강하게 반대한다.
“독일은 공동결정제도가 노사관계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입증되자 1976년 여야 만장일치로 2천명 이상 고용하는 모든 기업으로 확대했다. 독일에 투자하는 미국 기업들에 이유를 물으면, 독일은 노사분규도 없고, 출하도 제때 맞추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영국도 1976년 노동당 정부 시절에 노사분규가 심하니까 이를 도입하려고 했는데, 노조 반대로 실패했다.”
―독일의 협력적 노사관계에서 산별노조체제가 또 다른 축을 이룬다는데.
“근대 산업사회에서 노사관계는 산별체제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노조가 힘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파업권인데, 산별체제에서는 파업이 힘들다. 개별 기업에서는 파업을 못한다. 독일은 근로자 간 임금격차가 우리처럼 심하지 않다. 산별체제에서 임금을 일정하게 정하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직장 이동도 어렵지 않다. 반면 우리는 기업별 노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와 노동자 경영참여제도 모두 보수인 기민련 정권에서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사민당 정책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공부를 제대로 안하면 그런 오해를 할 수있다.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이 성공하자 기민련의 지지율이 올라가면서 1949년, 53년, 57년 총선에서 세번 연속 승리했다. 결국 사민당도 1959년 정강정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주요 산업과 금융의 국유화 정책을 모두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독일은 내각제를 통한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적 안정이 서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을 이룬 것 같다.
“대런 애쓰모글루 미 엠아이티(MIT) 교수는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가장 큰 요인으로 시장 메커니즘과 의회민주주의를 꼽았다. 독일은 시장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분야는 의회가 제도적으로 보완해서 발전을 이루었다. 원래 경제권력이 커지면 정치를 좌지우지하려 한다. 미국도 의회가 완전히 월가의 로비스트에게 당하고 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경제권력의 힘이 크지 않다. 독일식 내각제라는 정치시스템과 사회적 시장경제가 연계돼 있어 가능한 것이다.”
―독일의 강점을 소개했는데, 최근 상황을 보면 독일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것 같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극우정당(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구 동독지역인 손네베르크에서 승리했다. 난민 증가, 양극화 등에 대한 불만이 배경으로 꼽힌다. 녹색당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우려한다.
“2015년 시리아 난민 150만명이 들어온데 이어 최근 러시아와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난민 100만명이 추가 유입됐다. 독일이 통일된 지 33년이 됐지만, 서독과 동독 지역은 아직도 30% 정도의 경제적 격차가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힘든데 왜 난민을 받아서 더 힘들게 하느냐는 동독지역 주민의 불만이 있다. 하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최근 극우세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올해말이나 내년초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나면 극우세력도 축소될 것이다.” (기민련은 극우하고 연정을 안하고, 사민당은 극좌하고 연정을 안하는 독일 정치의 전통도 안전판으로 작용한다.)
■ 한국, 내각제 기반한 다당제 필요
―독일을 참고할 때 한국의 최우선 개혁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승자독식 정치시스템을 가지고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성장한 것은 관료들의 능력과 기업의 욕구가 합쳐진 덕분인데, 이제는 보다 창의적인 것이 나와야 한다. 지난해 합계출생률이 0.78인데 올해는 더 떨어질 것 같고 초고령화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것을 보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초입에 들어선 것 같다. 일본의 침체는 자민당이 장기집권하는 과정에서 경직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현재의 양당체제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대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최근 김진표 국회의장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는데.
“그런 개헌은 의미가 없다. 의원내각제를 해야 한다. 또 내각제를 하더라도 양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시스템은 안된다. 대선거구제나, 독일 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도 제헌헌법에서는 독일 바이마르헌법을 흉내 내서 의원내각제로 가려고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해서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1987년 개헌을 할 때도 민정당 안은 내각제였는데, 김대중과 김영삼이 죽어도 안된다고 반대해서 대통령 직선제로 갔다.”
―경제분야의 최우선 개혁과제는?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경제의 중간 허리를 보강해줘야 한다. 독일은 수출의 70%를 중소기업이 차지한다.”
―역대 정부가 한결같이 중소기업 지원 육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다.
“말로만 지원육성을 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후진국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매달 수출진흥회의를 열고 기업을 지원했다. 재벌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아닌가. 이제 재벌은 정부가 더는 안 도와줘도 국제 경쟁력을 가졌다. 대통령은 중소기업 혁신시스템을 만들어서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최소한 10년은 지속해야 한다. 그래야 대기업에 편중된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정상화한다.”
―독일과 달리 우리의 노사관계는 대립적이다. 또 윤 정부가 노동개혁을 앞세워 건설노조 불법 수사, 회계 공개 등을 강행하면서, 노조가 반발하고 있다.
“윤 정부의 노동개혁은 방향이 없다. (서강대 교수 시절인)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청와대 금요회’를 만들어서 노동법 개정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권위적인 정부니까 개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못하더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건강보험 작업을 했다 (박정희 정부는 1977년 직장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 제3세력, 여야 견제·타협 위해 필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서로 싸우기만 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못한다는 비판이 많다. 그 틈을 비집고 제3세력이 꿈틀거리고 있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제3세력이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하나?
“제3세력이 국회에 들어가서 1·2당을 견제하면 정치가 타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제3세력에 대통령감이 없고 지역적 기반이 없다지만, 성공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제3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면 국민이 지금 가장 궁금해하고, 가장 갈망하는 것을 이슈화해서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과거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정치에 참여했다. 2027 대선에서도 그럴 생각인가?
“현재로써는 계획하는 게 없다. 누가 진짜 참다운 의미에서 뭘 하겠다고 프로그램을 가지고 덤비면 도와줄 생각은 있다.”
―이전처럼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같은 것을 맡을 수도 있나?
“그건 안한다. 이젠 말로 도와주는 거지. 나를 (선대위원장으로 임명해서) 적당히 이용하는 것은 좋은데, 그동안 모두 성공을 못했다. 노무현 때부터 시작해서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 차기대선 화두 ‘경민’…윤 대통령 개념 없어
―2020년 회고록에서 경제민주화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와 유사하다고 했다. 지난 20년간 경제민주화의 전도사로 불리며, 박근혜·문재인 정부를 도왔지만 끝내 결별했고, 두 대통령 모두 경제민주화를 모른다고 혹평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도왔는데,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해가 어떤가?
“아데나워 총리가 기민련을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많이 했다. 내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도울 때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니까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는 사람도 있었지 않나.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경제민주화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윤 대통령 역시 개념이 없는 사람이니까 말할 것도 없다.”
―윤 대통령의 국민 지지율이 30%대를 못 벗어난다. 윤 정부가 실패로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대통령이 기본적인 사고를 바꿔야 한다. 사회 소외계층을 어떻게 품을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 3년 동안에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실패자가 양산됐다. 특히 자영업자의 피해가 컸다. 양극화가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이것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은 민간 주도, 시장 중심 경제를 표방하는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다. 어차피 시장은 민간이 끌고 가는 것이고, 정부는 규칙을 정해준다. 경제민주화는 사회의 조화를 추구한다. 경제가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나라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면서도 정부가 역할을 충실히 한다. 다음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가 재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극화를 바로잡는 과정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여야를 계속 왔다갔다 한 것에 대해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아나? (2012년에) 박근혜를 진짜 좋은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열정적으로 도왔다.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승리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딴 방향으로 가버렸다. 그럼 민주당은 왜 도왔냐? (2016년) 당시 민주당이 완전히 와해 직전에 있었다. 보수가 장기집권해서 일본식으로 간다는 얘기가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 실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문재인이 찾아와서 도와달라면서 새벽 2시까지 사흘을 졸랐다. 자신은 경제민주화를 꼭 하겠다고 약속했다. 야당이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문재인 역시 경제민주화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박근혜가 탄핵을 받은 게 사회적인 큰 변혁이니까 정치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문재인은 전혀 생각을 안했다. 그러다가 2020년 총선에서 보수대통합이 수도권에서 망했다. 그래도 보수가 완전히 무너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국민의힘을 도와준 것이다. 내가 그 사람들한테 무슨 특별히 혜택을 보려고 나선 게 아니다. 또 내가 자발적으로 도와준 게 아니라, 매달리니까 도와준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인가?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정치는 양당이 경쟁하는 체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좌파와 우파는 우스운 사람들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무슨 진보이고, 보수인가? 내가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한 진보이고, 보수인지 얘기해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답을 못했다. 시장경제의 효율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시장경제의 효율은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규제는 최소화하는 게 좋다. 하지만 필요한 규제는 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탐욕스런 기업가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는 정상적으로 갈 수 없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사진 강창광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내가 여야를 넘나든 진짜 이유는…”
‘경제민주화 전도사’ 김종인은 누구?
김종인 박사의 정치활동 역사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3세에 조부인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정치를 배웠다. 이후 박정희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비례대표 의원으로만 5선을 하고, 청와대 경제수석과 보건사회부 장관도 역임하는 등 풍부한 정치·행정 경험을 쌓았다.
그는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온 뒤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근로자재산형성저축 도입 같은 박정희 정부의 주요 정책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7년에는 국회 개헌특위 경제분과 위원장으로 경제민주화 조항(헌법 제119조 2항)을 신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하는 ‘5·8조치’를 입안했다.
노무현부터 윤석열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거의 빠짐없이 대선 후보 시절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여야를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덕분에 ‘철새 정치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의 인터뷰에서 “여야의 경쟁체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경제민주화를 약속하며 도와달라는 후보의 요청을 들어준 것일 뿐”이라며 세간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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