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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초일류국가 도약·K-컬처 융합관광”? 정책에 속지 않으려면

등록 2023-08-06 10:00수정 2023-08-31 10:55

[한겨레S] 이상민의 나라살림_정부정책 평가 방법
"정책에 속지 않으려면 ‘법령 대조문’ ‘예산 변동표’부터"
정부가 세법 개정, 디지털 모범국가 실현, 신성장 4.0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발표한 보도자료.
정부가 세법 개정, 디지털 모범국가 실현, 신성장 4.0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발표한 보도자료.

제품을 고를 땐 광고나 구성 성분을 보고 선택하면 된다. 돼지고기 함량이 높은 햄을, 들기름 100%로 구운 김을 고르는 건 구성 성분이나 제조 과정을 따진 것이다. 이러려면 제품 설명서를 꼼꼼히 봐야 한다. 이런 내용은 제품 광고에도 등장한다. 광고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는 처절한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온종일 광고하고, 정치인과 정당의 경쟁도 만만치 않다. 모든 정당의 목표는 정권 획득이며 정권을 가져온 뒤에는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정부의 정책설명 자료에는 항상 ‘젖과 꿀’이 가득 차 있다.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다.

실제로 최근 정부가 발표한 복수의 보도자료를 보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세제 개편을 통해 국내 투자, 경상수지 개선 등에 기여”했으며, “6세대(G) 상용화 기술 개발을 추진”하며, “탄소중립도시 10개소를 조성”하고 “인공지능(AI) 학습용 데이터 세트 1300여종을 마련”한다고 한다. 2023년 우리나라는 과거의 성장 전략을 탈피하고 ‘신성장 4.0 전략’을 채택하는 원년이 된다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런데 내용을 조금만 뜯어보면 가슴은 차갑게 식는다. 국내 설비 투자는 올해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경상수지 적자도 심각하다. 6세대 상용화는커녕 이미 배분된 5세대 주파수 대역도 몰수됐다. 보도자료만으로 정부 정책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정책설명 자료는 사실상 정부 광고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만을 보고 물건을 사면 합리적 소비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부의 보도자료만을 보고 정책을 평가하면 성숙한 민주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광고만 보고 결정할 게 아니라

정부 정책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평가하려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자료가 ‘법령 신구 대조문’과 ‘예산 변동표’다. 정부의 모든 정책은 법령과 예산을 통해 진행된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정한 법과, 국회가 심의한 예산에 따라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탄소중립도시를 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이 국회 심의를 거쳐 확정돼야만 한다.

정부가 밝힌 탄소중립도시 지정과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 세트 투자 ‘계획’보다 ‘예산’이 얼마인지가 더 중요하다. 10억원짜리 탄소중립도시와 1조원짜리 탄소중립도시는 전혀 다른 정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성장 4.0 전략’이 시작되는 2023년 인공지능 예산을 살펴봤다. 이전 정부의 ‘인공지능 학습용 데이터 구축’ 세부 사업보다 3천억원이 삭감됐다. 인공지능 관련 예산 세부 사업도 분석해보니, 2022년 1조2천억원에서 2023년 9천억원으로 3천억원 넘게 삭감됐다.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 있는 햄”이라는 광고 문구만 보고 햄을 골라서는 안 된다. 구성 성분을 보고 돼지고기 함량이 90%인지 70%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면, 법령이나 예산을 바꿔야 한다. 법령과 예산에 근거하지 않은 행정권이란 실무 차원에만 존재한다. 그래서 정부가 무엇을 하겠다고 한다면 무슨 법령 몇조, 몇항을 어떻게 바꿔서 추진할 것인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똑같은 목표의 정책이라도 ㄱ법 3조를 바꾸어서 구현하는 것과 ㄴ법 4조를 바꿔 구현하는 것은 다르다. 법 개정에 따른 수혜자와 피해자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법령 신구 대조문’을 뜯어보면, 정책의 구체적인 참모습을 파악하고 장단점도 쉽게 규명할 수 있어 국가 정책의 담론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예산 변동표’ 역시 마찬가지다. 현행 예산과 증감 규모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모든 정책은 예·결산서에 적혀 있는 정확한 세부 사업 명칭으로 발표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나름 발전된 행정 시스템을 구현한 나라다. 모든 예산 세부 사업명과 금액이 분석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고, 집행, 결산, 성과 평가, 중장기 계획 등을 통해 국가 예산 사업이 관리·기록·평가된다. 그 공개 수준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국회 예산심의 시기엔 한쪽 벽면을 가득히 채울 만큼 예·결산 자료가 제공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정보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빠져 죽게 할 심산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련 자료는 많다. 실제로 이 방대한 자료량에 심적 부담을 느껴 진지하게 분석을 못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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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의 합리적 선택을 위해

그런데 놀랍게도 정부의 많은 정책설명 자료에 있는 정책명과 예·결산서에 있는 세부 사업명이 전혀 다르다. 예산, 집행, 결산, 성과 평가, 중장기 계획을 통해 관리되는 잘 짜인 시스템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정책적 논쟁이 이어진다. 미끈하게 놓인 고속철도 선로 위를 마차로 우당탕거리며 달리는 꼴이다.

과거 정부의 한 위원회에서 예산 사업 분석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정부 부처가 제출한 자료에 있는 사업명을 예·결산서에서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세부사업은 묶고, 어떤 사업은 쪼개서 제출해 예·결산 시스템을 통해 교차 검증할 수 없게끔 재가공돼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예·결산 시스템을 활용한다면, 보고하는 사람도 쉽고 보고받는 사람도 쉽다.

정보화 사회를 넘어 인공지능 시대가 왔다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 법령의 시스템과 예산 시스템은 이미 머신러닝(기계학습)이 가능한 형태로 자료가 관리되고 있다. 모든 법령은 숫자로 표현되는 일관된 법률번호와 조·항·호·목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예산 시스템도 마찬가지로 모든 부처, 세부 사업별로 일관된 코드번호가 부여되고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책은 예·결산서에 있는 세부 사업명과 전혀 다른 별도의 이름을 부여받고 논의된다. 형용사가 가득 들어 있는 광고와 홍보문구로 포장돼 정책 담론 시장에서 돌아다닌다.

식품 포장지에 정확한 원재료명과 영양 정보, 유통기한을 표시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투쟁하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합리적 소비자의 선택이 쉬워졌다. 마찬가지다. 정부의 정책설명 자료에서 ‘법령 신구 대조문’과 정확한 예산 세부 사업명으로 표시된 ‘예산 변동표’를 보고 싶으면 누군가가 투쟁하고 노력해야 한다. 정부 정책설명 자료에 이 두개가 있다면 우리나라 정책 담론 시장에서 합리적 민주시민의 선택이 쉬워지지 않을까.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서, 결산서 집행 내역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분석하는 타이핑 노동자. ‘경제 뉴스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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