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연합인포맥스 사옥 모니터에 표시된 우리나라의 국채 수익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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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은 선인가, 악인가? 시민단체는 선인가, 악인가? 정답은 명확하다.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답이다. 때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노조는 하나의 동일 집단이 아니다. 어떤 노조는 공공선에 보탬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노조도 있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정치가 선인지, 악인지를 묻는 말처럼 잘못된 질문이다. 공익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도 있지만, 사익만 추구하는 정치인도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다 썩었어”,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아”라고 말하면 가장 악한 정치인만 이익을 본다. 국회의원 전체를 욕하거나 ‘정치’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나쁜 행위를 한 노조가 있다는 이유로 ‘노조는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나쁜 정치인과 나쁜 노조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좋은 정치인과 좋은 노조를 찾아서 지지해야 한다. 아무리 정치가 싫고 노조가 싫어도 절대로 국회의원과 노조는 없어지지 않는다.
부채도 마찬가지다. 좋은 부채가 있고 나쁜 부채가 있다. 국가 재정 오해의 ‘원죄’는 국가 재정 원칙과 가정 살림 원칙을 혼동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정 살림 원칙은 쉽다. 수입이 늘면 지출을 늘리지만, 수입이 줄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빚은 없거나 적을수록 좋다. 국가 재정은 정반대다. 내수가 좋지 않아 국가 세수입이 줄어들면 오히려 지출을 확대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 반면 경기 과열로 세수입이 늘면 거꾸로 지출을 줄일 필요가 있다. 국가 재정의 주요한 역할은 경기 조정이기 때문이다.
세입이 줄었는데 지출을 확대하려면 필연적으로 부채를 내야 한다. 그래서 국가부채는 국가 재정 운용에 꼭 필요하다. 빚 없이 가정 살림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빚 없이 국가 재정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국가도 이왕이면 부채가 적을수록 좋을까? 국가부채는 적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적절해야 한다. 국가 재정을 가정 살림 말고 기업 경영과 비교해보자. 기업이야말로 살벌한 환경에서 경쟁한다. 비효율적인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그런데 빚이 적은 기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부채가 적절한 기업이 살아남는다. 투자를 해야 할 때는 외부 자금(빚)을 통해 과감하게 투자하고, 시장 상황에 따라 빚을 상환해 적절한 부채 비율을 유지하면서 경영한다.
문제는 적절한 국가부채의 규모를 도출하는 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적 합의에 따라 적절한 부채 비율 규모를 정치적으로 정해야 한다.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선 어떤 부채는 나쁘고, 어떤 부채는 그리 나쁘지 않고, 어떤 부채는 오히려 좋은 부채인지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가장 나쁜 부채는 부족한 현금을 메우려고 차입한 외채다. 그것도 상환 시점이 단기에 몰려 있고 이자율이 높은 부채일수록 나쁘다. 우리나라는 부족한 현금을 메우려고 차입한 국채가 상대적으로 적다. 국채의 36%는 대응되는 자산이 있는 부채다. 쉽게 말해 1억원짜리 금을 사고자 1억원을 차입했다면, 우리 후손이 벌어서 갚을 필요가 없다. 금 자산 자체에 부채 상환 능력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외화 자산을 사들이려고 많은 국채를 발행한다. 결국 대응되는 자산이 있는 부채는 우리 후손이 벌어서 갚을 필요가 없다.
그리 나쁘지 않은 부채는 대응되는 자산이 있으며, 내국인이 보유한 국채다. 그것도 상환 시점이 장기이며, 이자율이 낮으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 정부가 국외 차입을 통해 마련한 부채는 언젠가 국민이 갚아야 하는 부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국인이 보유한 국가부채의 대한민국 후손 부담은 제한적이다.
전통적 경제 이론에서는 내국인이 보유한 국채는 미래 세대의 부담이 늘어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한다. 국채 채권자가 그 나라 국민이라면 결국 그 나라 미래 세대의 어떤 사람이 소유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의 수로 대한민국 국채를 나누는 ‘1인당 국채’는 잘못된 개념이다. 우리나라 국채의 80% 이상은 내국인이 보유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빌려온 돈(외채)보다 외국에 빌려준 돈(대외 채권)이 더 많은 순채권국이다. 또 우리나라 국가부채는 상대적으로 단기 채무 비율이 낮다. 코로나19 당시 낮은 금리로 10년 이상 만기 국가부채를 차환 발행(롤오버)하는 노력에 힘입어 10년 이상 장기 국채 비중이 많이 증가했다.
많을수록 오히려 좋은 부채도 존재한다. 이론적으로 규모가 늘수록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커지는 부채가 있다. 조달 비용보다 효용이 더 큰 부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2% 이자로 조달해 2% 이상 수익이나 효용을 창출할 수 있다면, 국채로 조달한 자금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 광역 지방자치단체는 지역개발기금 채권을 발행할 수 있다. 자동차 등록 등 의무적으로 사들여야 하는 ‘국공채’가 있는데, 그 공채가 ‘지역개발기금 채권’이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에게는 손해다. 채권금리가 2022년 기준 불과 1.0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강제로 산 사람이 손해를 본 만큼 이를 발행한 지자체는 그만큼 이득이다. 1%로 조달한 자금으로 지역개발 사업에 2% 이자를 받고 융자 사업을 하면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다. ‘봉이 김선달’도 울고 갈 일이다. 형식적으로는 지역개발기금도 지자체의 채무에 속한다. 그래서 지역개발기금 채권을 많이 발행하는 지자체는 지자체 채무 비율은 상승하지만,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오히려 좋아진다.
최근 채무 감축을 강조하는 홍준표 대구시장의 행보가 눈에 띈다. 홍 시장은 과거 경남지사 시절에도 ‘채무 제로’ 정책으로 큰 이슈를 만들었다. 경남의료원 폐쇄 등이 ‘채무 제로’라는 정치적 업적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오히려 재정 건전성을 나쁘게 한다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저리의 지역개발기금 채무를 줄이는 것은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오히려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홍 시장 취임 전 대구시에선 재정 건전성에 해가 되지 않는 지방채도 많았다. 예를 들어 2021년 대구시는 ‘신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에 지역상생발전기금으로 142억원을 0.75%로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노후산단 재생사업’을 위한 165억원의 조달 금리는 1%였다. 이 정도면 빚을 졌다기보다는 자금을 ‘유치’했다고 자랑할 만한 금리다. 이런 사업의 저리 자금 유치에 성공하면서 결과적으로 순세계잉여금(거둬들인 세금에서 지출금액을 뺀 나머지)은 3800억원이 쌓였다. 남은 돈을 그냥 정기예금에만 넣어놔도 대구시는 오히려 돈을 벌 수도 있다.
부채는 나쁜 부채와 그리 나쁘지 않은 부채, 그리고 좋은 부채가 존재한다. 이 셋을 모두 섞어서 모두 우리 후손의 부담이라고 말하면서 형식적인 부채 비율만 줄인다면 오히려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더 훼손될 수 있다. 국가부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이유다.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서, 결산서 집행 내역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분석하는 타이핑 노동자. <경제 뉴스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