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이 4조3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조8천억원)보다 69% 감소한 것으로 잠정집계됐다고 공시한 1월6일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 내 전시장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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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하나의 리포트를 발간했다. ‘메모리-겨울이 온다’(Memory-Winter Is Coming)라는 제목이었다. 그해 3월 5.3달러이던 디램(DDR4 8GB) 가격은 8월 4달러로 내려왔고, 11월엔 3달러 초반까지 하락했다. 모건스탠리의 겨울 선언은 서늘하던 투자 심리를 냉각하기에 충분했다. 한때 10만원을 넘보던 삼성전자의 주가는 6만원대로 떨어졌다. 삼성전자는 한 분기에 15조8천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는데도 말이다. 진짜 겨울은 2022년에 찾아왔다. 디램 가격은 2022년 상반기에는 3달러로, 하반기에는 2달러로, 2023년 1월에는 1달러대로 떨어졌다. 정말 겨울이 왔다.
반도체 경기를 겨울로 만든 바람이 불어온 곳은 중국이었다. 한국 반도체를 가장 많이 사가는 나라는 중국이다. 2020년 상반기 기준 반도체의 중국 수출 비중은 41%인데 홍콩을 경유해 중국에 수출되는 비중까지 합치면 60%가 넘는다. 중국은 전세계 최대 제조 강국이자 거대한 소비시장이다. 스마트폰, 개인용컴퓨터(PC), 노트북을 비롯해 각종 가전·전자 제품이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된다.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코로나19 감염률을 낮췄지만 경제는 초토화했다. 수많은 제품에 탑재돼 소비자에게 전해졌어야 할 메모리반도체는 삼성전자 창고에 쌓여갔다. 2022년 3분기 말 기준 삼성전자의 재고자산은 57조3천억원으로, 한 분기 만에 5조원 넘게 늘었다.
반도체는 한국의 대표 수출 품목이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가 넘는다. 반도체 수출이 줄자 한국 전체 수출은 휘청거렸다. 2022년 연간 무역적자 규모는 472억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3년에도 적자 행진은 이어졌다. 2023년 1월 무역수지 적자는 127억달러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고 2022년 3월 이후 11개월 연속 적자 기록을 냈다. 자동차·2차전지·석유제품·선박 등 주력 품목의 수출은 늘었는데 메모리반도체 수출액이 전년 대비 반토막(44.5%) 나면서 전체 무역수지를 적자로 돌렸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2022년 4분기 어닝쇼
크(실적 충격)를 기록했다. 금융투자업계의 기대가 높았던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의 4분기 실적 전망치는 전년(13조원) 대비 절반 수준인 7조원가량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4분기 영업이익은 4조3천억원, 전년 대비 70% 가까이 줄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중에서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부문이 최대 실적을 올린 점을 고려하면 메모리반도체 부문은 적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혹독한 겨울이다.
중국 봉쇄로 수출 큰 타격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희망은 따뜻한 봄이 결국은 오리라는 기대감이다. 국내 반도체 회사들의 실적은 최악이지만 미래를 반영하는 주가는 연초부터 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2023년 들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각각 15%, 21%나 올랐다. 주가 상승을 주도한 주체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은 삼성전자를 무려 2조2200억원이나 사들였고 SK하이닉스도 6322억원 매수했다.
메모리반도체 수요를 다시 살려줄 것으로 기대하는 요인은 중국의 리오프닝
(경제활동 재개)과 수요 회복이다.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폈던 중국은 2022년 말부터 봉쇄를 풀었다. 제로 코로나 정책이 계속되는 동안 중국은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는 2022년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5.5%로 잡았는데 실제 경제성장률은 3%에 그쳤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을 제외하고 중국이 3% 경제성장률을 보인 건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 이후 처음이다.
대부분 나라에서 그렇듯 중국 역시 코로나19 공포가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다. 중국질병예방통제센터는 ‘전국 코로나19 감염 유행 상황’ 자료에서 2022년 12월 말 확진자 수가 최대치를 찍었고, 2023년 1월 말에는 최대치 대비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고 밝혔다. 발열진료소 방문 건수 역시 2022년 말 286만7천명에서 1월 말 16만4천명으로 95% 줄었다. 전국 병원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 수는 162만명에서 13만명으로 줄었고, 대만에서 조사한 중국발 입국자의 양성률도 25%에서 1.1%로 떨어졌다. 세계 최대 전자제품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의 경제활동이 본격화하면 메모리반도체 수요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오픈에이아이(OpenAI)가 개발한 챗(Chat)GPT 로고. REUTERS
클라우드,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서 나타나는 차세대 전환을 통해서도 메모리반도체는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 메모리반도체, 디램은 DDR4에서 DDR5로 전환기를 맞고 있다. DDR5는 DDR4보다 성능이 2배, 전력효율은 13% 개선된 차세대 디램이다. DDR5 개발이 완료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판매하지는 않고 있다. DDR5의 최대 수요처는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이터센터다. DDR5는 DDR4보다 비싸기 때문에 개인컴퓨터나 모바일에 많이 탑재되지 않았다. 하지만 24시간 방대한 컴퓨팅 시스템을 운영해야 하는 데이터센터에서는 전력효율 개선이 필수적이다. 시스템 교체 주기가 됐을 때 전기요금 13%를 절감할 수 있는 DDR5를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DDR5를 지원하는 중앙처리장치(CPU) 개발이 늦어졌다는 점이다. 서버 CPU 시장의 강자는 90% 넘는 점유율을 자랑하는 인텔이다. 인텔은 2021년 하반기 처음 서버용 CPU ‘사파이어 래피즈’를 출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계속 연기돼 2023년 1월에야 정식 출시됐다. 데이터센터 교체 주기가 지나고서도 투자를 미뤄왔던 빅테크 업체들이 이제 투자할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삼성전자는 2023년 1월31일 열린 4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
콜(전화회의)에서 “하반기에는 신규 CPU 출시에 따른 DDR5 수요 확대가 본격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챗GPT 등 AI도 새로운 기회
최근 전세계적으로 관심을 끄는 챗지피티(ChatGPT) 같은 초거대 인공지능도 메모리반도체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다. 챗지피티는 서비스 출시 두 달 만에 전세계적으로 1억명의 사용자를 모았다. 각종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구글 검색보다 뛰어난 검색 만족도를 준다는 평가도 받았다. 챗지피티는 유료화를 도입해 빠른 속도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20달러씩 받기로 했다.
챗지피티가 인공지능(AI) 산업에 준 가장 큰 의미는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막연한 기술 투자가 아니라 본격적인 사업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세를 몰아 챗지피티의 운영사인 오픈AI에 1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이제 워드프로세서에서 “맛있는 노란 쿠키에 대한 상품설명서를 써줘”라고 요청하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문서를 작성해줄 날이 곧 다가올 예정이다.
인공지능 분야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구글은 부랴부랴 인공지능 시스템 ‘람다’를 활용한 챗봇을 수개월 내에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 역시 중국판 챗지피티를 2023년 3월에 출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에서도 네이버의 하이퍼크로바, KT의 믿음, LG의 넥사원, SK 에이닷 등 많은 기업이 초거대 인공지능을 구축하며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초거대 인공지능 모델은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컴퓨팅 파워가 요구된다. 여기에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별도의 ‘고대역폭 메모리’(HBM·High Bandwidth Memory)가 필요하다. 이 역시 개발된 지는 오래됐는데 대규모 수요처를 찾지 못해 연구개발용으로 판매하던 메모리다. 초거대 인공지능 산업의 발전은 부가가치가 높은 HBM 메모리 시장의 확대로 연결된다. 최악의 국면이라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2026년까지 메모리반도체 부문 성장률이 6.9%로 시스템반도체 성장률 5.9%보다 높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3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1.7%로 전망했다. 2022년 말 예상했던 2%보다 0.3%포인트 낮다. 일본의 성장률 전망치 1.8%보다도 낮다. 반도체 시장의 반전 없이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쉽지 않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추운 겨울을 거쳐 입춘 정도까지는 온 것 같다. 입춘이라고 해서 한겨울에 비해 춥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경기라는 것이 날씨처럼 시간이 지나면 정해진 대로 오지도 않는다. 지금보다 더 내려갈 수도 있고, 얼마나 지나야 반등할지 예상하기 쉽지 않다. 다만 저 멀리 봄이 온다고 알리는 다양한 요인이 그래도 따뜻한 봄은 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