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경제 경제일반

늑장 부리다 ‘국제표준 식민지’ 될라…세계는 ‘ESG 공시’ 전쟁중

등록 2023-03-06 11:00수정 2023-03-06 11:21

인터뷰ㅣ유엔사회개발연구소 이일청 박사
IFRS·EFRAG, 공시표준 제정 앞장
중국 독자적 ‘그린 택소노미’ 내놔
한국, 글로벌 평가지표 베끼기 수준
유엔 사회개발연구소의 이일청 선임연구조정관이 지난 2월2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유엔 사회개발연구소의 이일청 선임연구조정관이 지난 2월2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국제적으로 지속가능성 보고(공시)에 관한 표준 제정을 둘러싸고 ‘조용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일청(56)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D) 선임연구조정관은 “지속가능성 국제표준이 무엇으로 결정되느냐에 따라 기업들이 어떤 걸 보고해야 하는지, 어떤 산업을 죽이거나 살려야 하는지,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큰 영향을 주다 보니 각국이 경쟁적으로 표준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임연구조정관은 “국제표준 논의장에 초대받으려면 자기만의 표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국제표준에) 따라갈 수밖에 없고, 평생 국제표준의 식민지가 되어 자주권이 없어진다”고 경고했다. 한국정부는 2021년 말 글로벌 이에스지 평가지표를 벤치마킹해서 ‘케이-이에스지(K-ESG)’ 가이드라인를 발표했지만,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엔사회개발연구소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 산하기관으로 개발 관련 문제를 연구한다. 이 선임조정연구관은 기업의 기후·책임·지배구조를 중시하는 이에스지(ESG)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소가 4년간 개발해온 지속가능발전성과지표(SDPI)의 연구책임을 맡고 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2월 중순 한국을 방문한 이 선임조정연구관과 만나 지난해 가을 발표한 지속가능발전성과지표의 내용, 글로벌 화두인 지속가능성 보고에 관한 국제표준 제정 동향, 한국의 과제에 관한 생각을 들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2월2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에서의 직접 만남과 3월 3~4일 전화통화로 이뤄졌다.

―이번 방한 목적은?

“한국법제연구원, 국제개발협력학회 등 여러 정부·공공기관, 민간단체들과 만나 우리의 성과지표를 설명하고, 유엔사회개발연구소와의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법제연구원과는 2월17일 이에스지와 지속가능한 개발 관련 융복합 연구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지속가능발전성과지표는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관련돼 있다. 연구소가 성과지표를 개발한 이유는?

(지속가능발전목표는 2015년 제70차 유엔총회에서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2030년까지 달성하기로 결의한 목표이다. 빈곤과 질병 같은 인류의 보편적 문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 지구환경 문제, 노사와 고용 등 경제사회문제에 관한 17가지 목표와 169개 세부목표로 이뤄져 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국가의 실천에 관한 내용으로, 국가 단위에서 측정한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시민사회나 기업의 동참이 필요하다. 그래서 유엔은 지방정부와 기업에 실천을 권장한다. 그동안 기업은 사회책임(CSR)이나 이에스지를 통해 지속가능발전에 기여해왔다. 하지만 전시효과만을 노리고 잘한 것만 보여주고, 잘못한 것은 가린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기업이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없다. 이에스지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고민한 결과가 61개 성과지표이다.”

―성과지표는 2018년부터 4년간의 연구 끝에 결실을 보았다. 연구소는 독립된 연구를 위해 유엔사무국의 지원을 받지 않는데, 어디서 지원을 받았나?

“에스케이 사회적가치연구원에서 100만달러를 지원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지원할 때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에스케이는 특이하게도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에스지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

“우리는 다섯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다. 첫번째는 지속가능발전목표 달성에 필수적인 ‘주요 이슈 영역’이 무시되는 문제다. 돌봄영역이 대표적이다. 북유럽에서는 성평등을 위해 남성의 육아휴직을 의무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스지에는 그 지표가 없다. 또 최저임금 지표는 있지만 생활임금은 없다. 최저임금을 받아서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북유럽에서는 최저임금 대신 생활임금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생활임금은 노동자들이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저임금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우리나라는 2013년 부천시를 시작으로 일부 지자체가 조례로 시행 중이지만, 법적 근거는 아직 없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전국 지자체의 생활임금 평균 시급은 1만8원으로 최저임금 대비 117% 수준이다.)

―이에스지의 두번째 문제점은?

“자본주의에는 여러 경제 섹터가 있다. 영리부문도 있고 비영리부문도 있다.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도 있다. 이에스지 평가지표는 영리기업에 맞춰져 있고, 사회적 경제에 관한 부분은 없다. 협동조합은 이에스지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협동조합에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지, 위기에 처했을 때 회복력이 있느냐이다. 또 취약계층을 얼마나 고용하는지, 실업자를 위한 훈련과 일자리를 얼마나 제공하는지에 관한 평가도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이나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자체 평가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우리 성과지표 중에서 55개는 영리기업과 사회적 경제 단위 모두를 위한 지표이고, 6개는 비영리기관과 사회적 경제 단위에 특화된 지표이다.”

―이에스지 평가지표가 지나치게 단기실적에 매몰되는 ‘근시안’ 문제도 지적된다.

“그렇다. 대개의 이에스지 리포트는 지난해 대비 올해의 성적만 본다. 재작년에는 무엇을 했는지, 그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 성과지표는 5년 단위로 보고하는 ‘추세 분석’을 한다. 네 번째는 부분적으로 좋지 않은 점을 전체 평균으로 감추는 ‘평균의 마술’이다. 예를 들어 한 회사의 여성 비율이 40%라고 하면, 매우 좋아 보인다. 하지만 간부층에는 여성이 없다면 성평등에 충실하다고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맥락 기반 지표’이다. 등산할 때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특정구간만이 아니라 전체 산의 높이, 거리, 경사도 등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에스지 지표는 전체적인 목표나 강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지난해 물 1000ℓ를 쓰고 올해 800ℓ를 썼다면, 이에스지 리포트에는 200ℓ 감축으로 표시된다, 하지만 기업이 위치한 지역에서 최대로 사용 가능한 물이 500ℓ라면 아직도 300ℓ를 더 줄여야 한다.”

―그럼 기업의 물 사용 한도는 어떻게 계산할 수 있나?

“우리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했다. 기업의 위치정보가 담긴 위성사진과 고용인원, 부가가치, 지역인구 등을 입력하면 최대로 허용되는 물 사용량이 계산된다. 기업의 반경 100km, 200km로 나가면 물 자원이 풍부하지만, 반경 50km 안에는 물이 부족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영자들은 반경 50km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 성과지표는 기업의 물 사용량을 포함해서 최고경영자와 노동자 간 임금격차, 직급별 성비의 허용한도와 같은 ‘임계점 및 표준 기반 지표’를 17개 제시한다.”

―삼성전자의 등기이사와 직원 간 임금격차는 2021년 기준 139.7배이다. 정의당은 최고경영자의 보수한도를 법으로 제한하는 이른바 ‘살찐 고양이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임금격차의 허용한도는 얼마인가?

“우리는 역사적 방법으로 접근했다. 자본주의 황금기인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유럽 모범기업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30대 1(평균이 아닌 중앙값 기준)로 제시했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시그널을 준다고 생각한다.”

―직급별 성비 허용한도는 어떻게 산출했나?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2008년 세계 최초로 모든 국유기업에 이사회 내 여성 비율 40%를 의무화했다. 또 2021년에는 여성 비율 30% 미만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성과지표도 이를 참고해 목표를 40%로 정했다.”

(딜로이트 글로벌에 따르면, 전 세계 72개국 기업의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은 2021년 기준 19.7%이다. 한국은 4.2%로, 최하위권인 68위에 그쳤다.)

―성과지표는 티어1(경제·환경·사회·지배구조) 20개, 티어2(환경·사회경제·지배구조) 41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속가능발전목표의 169개 세부목표(타깃) 중에는 기업들에 지속가능보고서 발간을 권장하는 내용이 있는데, 보고서를 발간하는 기업 수가 평가지표다. 문제는 어디까지를 지속가능보고서로 보는가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지속가능보고로 인정하는데 필요한 30여개의 ‘일반 핵심지표’를 만들었다. 티어1은 이를 20개로 압축한 것이다. 티어2는 이에스지 평가지표의 다섯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지표들이다. ‘임계점 및 표준 기반 지표’ 17개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성과지표를 보다 많은 기업과 기관이 이용하는 게 중요할텐데.

“지난해 11월 온라인 플랫폼을 베타버전으로 선보였다. 사용자가 로그인하고 정보를 입력하면 자동으로 결과 리포트가 나온다. 베타버전은 ‘맥락 기반 지표’ 중에서 16개만 공개한 ‘맛보기용’인데, 벌써 영리기업 127개와 사회적 경제 조직 147개가 등록했다. 3월 중에 풀버전이 공개되는데, 목표는 2000개이다. 이를 위해 국제협동조합연맹과 협력하고 있고, 회원기업이 25만개인 전미지속가능비즈니스네트워크(ASBN), 유럽의 사회적 경제를 관할하는 ‘유럽사회적경제’(ESE)와 웨비나를 열 계획이다. 앞으로 한국이나 유럽국가 중에서 아직 지속가능보고서의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정하지 않은 나라를 타깃으로 우리의 성과지표를 알리려고 한다.”

김계홍 한국법제연구원장과 이일청(오른쪽) 유엔사회개발연구소 선임연구조정관이 2월17일 연구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법제연구원 제공
김계홍 한국법제연구원장과 이일청(오른쪽) 유엔사회개발연구소 선임연구조정관이 2월17일 연구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법제연구원 제공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지난해 이에스지 공시기준 초안을 공개했고, 2024 회계연도부터 적용을 위해 최종안을 논의 중이다. 지속가능발전성과지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국제적으로 지속가능성 보고(공시)에 관한 표준 제정을 둘러싸고 ‘조용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국제회계기준과 유럽재무보고자문단(EFRAG)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만드는 표준에는 차이점이 있다. 영미 전통이 강한 국제회계기준은 강제력이 없다. 반면 유럽의 독자성을 지키려고 하는 에프락은 유럽연합 법령에 기초해 강제력이 있다. 에프락에 기반한 유럽연합의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은 종업원 250명 이상 등 일종 조건을 충족한 기업에 대해 2025년부터 지속가능성 보고를 강제한다. 국제표준을 둘러싼 전쟁의 수면 아래에는 이에 부합하는 평가지표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전 세계 평가지표가 4천개 이상이고, 등급체계만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 성과지표는 기본적으로 이들 평가지표와 경쟁하려는 게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한다. 앞으로 미래 지향적이고 진보적인 국제표준이 주목을 받는다면 우리 성과지표가 사용될 확률이 높다.”

―유럽과 거래하는 한국기업의 상당수는 지속가능성 보고 의무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더욱이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가치사슬에 있는 거래기업까지 모두 공시해야 한다. 한국은 국제회계기준만 신경 쓰는데, 한국기업이 유럽에 많이 진출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는 2025년까지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들에 이에스지 공시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또 2021년 말에는 주요 글로벌 평가지표를 벤치마킹해서 ‘케이-이에스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글로벌 차원에서 국제표준이 무엇으로 결정되느냐에 따라서 기업들이 어떤 걸 보고해야 하는지, 어떤 산업을 죽이거나 살려야 하는지,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러다 보니 각국이 자신의 표준을 만들고 있다. 유럽이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 활동 범위를 정한) 그린 택소노미를 내놓자, 중국은 자신만의 그린 택소노미를 발표했다. 어디까지 그린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조금, 세금 등이 달라지니 중요하지 않겠는가. 미 증권거래소도 최근 자기들 나름의 ‘온실가스 정보공개 기준’을 내놨다.”

―국제적인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 경쟁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나라가 국제표준에서 자신들에 맞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특수성을 고려한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국제표준 논의장에 초대받으려면 자기만의 표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무기(표준)가 없으면 (국제표준에) 따라갈 수밖에 없고, 평생 국제표준의 식민지가 되어 자주권이 없어진다.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을 만드는 것과 이에스지 평가지표를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표준이나 택소노미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법령으로 만드는 게 매우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국제표준 전쟁에 끼어들어 글로벌 논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한국형 민주주의’처럼 본질과는 거리가 먼 사이비로 전락할까봐 걱정된다.

“국제표준에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한국적 특성을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만든 것이 국제회계기준에서 만든 것과 똑같으면 한국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은 산업재해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다면 한국 표준에는 산업재해 관련 항목을 더 넣을 수 있다. 한국의 특수한 문제들을 감추는 게 아니라, 고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제회계기준과 에프락 중에서 어느 것이 국제표준이 될까?

“세계 주요 20개국이 모인 G20는 국제회계기준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G20 중에는 유럽연합 국가들도 많다. 에프락은 유럽 연합 중심이어서 엄격히 보면 글로벌은 아니다. 반면 국제회계기준은 매우 글로벌한 조직이지만, 정부기구는 아니다. 각국 정부가 어떤 것을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국기업들의 이에스지 수준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는?

“삼성에스디아이, 엘지화학, 에스케이텔레콤 등 일부 기업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은데, 전체 한국기업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무적인 것은 에스케이가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특히 경영진을 사회적 가치 창출로 평가하는 것은 중요한 시도이다. 한국의 재벌구조에 문제가 있지만, 기업의 변화는 총수가 얼마만큼 이에스지에 관심을 갖느냐에 달려있다.”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의 궁극 목표는 불평등 해소다. 문재인 정부는 불평등 개선을 위해 포용성장을 내걸었다. 이를 위해 소득주도성장을 추진하고 최저임금을 올렸는데, 오히려 중소상공인과 취약계층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지속가증발전성과지표는 최저임금보다 높은 생활임금을 강조하는데, 어떻게 보나?

“개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적으로 성장과 분배에서 가장 성공한 국가 사례는 1950~1960년대의 스웨덴이다. 당시 사민당 정권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연대임금제(동일업종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적용)를 결합한 ‘렌-마이드너 모델’을 적용했다. 사회주의자들이니까 연대임금제를 우선시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성장에 중요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더 중시했다. 경제는 항상 성장(생산)과 분배라는 두 발로 걷는다. 성장이 없으면 분배할 것이 없고, 분배하지 않으면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한 원인에는 소득에 우선점을 두다 보니, 성장은 못해도 된다는 잘못된 프레임도 있다고 들었다. 소득주도성장은 소수 대기업 중심의 수출에만 의존하지 말고 내수에 기반해서 성장을 하자는 정책인데, 수출과 내수를 모두 중시하는 ‘균형경제’를 목표로 잡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내수를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다가, 수출이 안되면 (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소득을 줄이는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국민에게 사과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약자 복지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올해 예산에서 취약계층 지원을 축소해 논란이 됐다. 인플레 때문에 금융 긴축을 하는 상황에서는 경제 위기로 인한 복지 수요 확대에 재정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데,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앞세우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는 비판이 많다.

“모든 정치가는 좌우 정치적 스펙트럼과 상관없이, 취약계층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장에 따른 낙수효과, 재분배를 통한 사회보장 등 각자가 신뢰하는 방법이 다르다. 코로나 위기의 정점을 지나면서 많은 국가가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며 복지예산을 동결·축소하는 대신 그린 예산을 늘려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신자유주의+그린’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 논란이 있지만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는 원자력을 그린으로 간주한다면 (최근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에너지 위기가 닥치자 원자력을 그린으로 정의했다) 성장을 통한 낙수효과가 주요한 정책방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낙수효과를 현실화하기가 그리 쉽지 않고, 취약계층이 낙수효과를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에 대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일본 규슈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8년 유엔사회개발연구소에 합류했는데.

“이론만 공부하다 보면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다. 현장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규슈대학은 교직원이 유엔 같은 곳에서 일하면 휴직할 수 있는 규정이 있는데, 외국인에게 적용한 전례가 없었다. ‘매뉴얼 사회’인 일본답게 대학에서 결정하는데 1년반 이상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교수를 아예 그만두었다. 원래는 3년간 연구소에서 일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재미있고, 계속 새로운 프로젝트가 나오다 보니 15년이 흘렀다.”

■ 주류 담론 맞서 대안 내놓는 유엔의 ‘야당 연구소’
유엔사회개발연구소(UNRISD)는?

개발 관련 문제를 연구하는 유엔 산하기관이다. 1963년 성장과 진보를 경제지표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사회지표를 개발하기 위해 설립됐다.

북유럽의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과 네덜란드의 얀 틴베르겐은 개발을 경제개발로 좁게 접근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개발에 수반되는 사회적 문제를 무시하면 안된다”면서 사회개발로 시야를 넓히기 위한 연구소를 만들 것을 제안하자, 유엔이 받아들였다.

연구소는 태생적으로 주류 담론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야당 연구소’ 역할이 주어졌다. 주류가 녹색혁명을 이야기할 때 생산량이 늘더라도 지주가 모두 가져가면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류가 경제개발 지표를 얘기할 때 사회개발 지표를 만들었다. 주류가 개발도상국에는 사회정책이 사치품이라고 말할 때, 개발도상국도 사회정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내놓았다. 주류가 이에스지(ESG)를 강조할 때 그 한계를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선보였다. 각국 정부와 기업의 지속가능성 수준을 평가하는 지속가능발전성과지표의 개발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연구소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주류 담론을 얘기하는 유엔사무국으로부터는 한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최초 설립자금도 네덜란드가 지원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녹취 민수빈 보조연구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경제 많이 보는 기사

음식점 폐업률 전국 1위는 이 도시…집값도 급락 직격탄 1.

음식점 폐업률 전국 1위는 이 도시…집값도 급락 직격탄

“그리 애썼던 식당 문 닫는 데 단 몇 분…” 폐업률 19년 만에 최고 2.

“그리 애썼던 식당 문 닫는 데 단 몇 분…” 폐업률 19년 만에 최고

90살까지 실손보험 가입 가능해진다…110살까지 보장 3.

90살까지 실손보험 가입 가능해진다…110살까지 보장

오세훈발 ‘토허제 해제’ 기대감…서울 아파트 또 오르나요? [집문집답] 4.

오세훈발 ‘토허제 해제’ 기대감…서울 아파트 또 오르나요? [집문집답]

한화 김동선, ‘급식업 2위’ 아워홈 인수한다 5.

한화 김동선, ‘급식업 2위’ 아워홈 인수한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