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정의연대와 사모펀드 피해자 공동대책위 관계자들이 2020년 6월30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사모펀드 책임 금융사 징계 및 배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당국이 4700억원대의 대규모 환매 중단 사태를 초래한 독일 헤리티지 펀드의 투자 원금이 전액 반환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22일 금융감독원은 전날 금융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조위)를 열어 6개 금융회사가 판매한 독일 헤리티지 펀드 관련 분쟁조정 6건에 대해 계약 취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분조위는 계약 상대방인 신한투자증권, 엔에이치(NH)투자증권, 현대차증권, 에스케이(SK)증권, 하나은행, 우리은행에게 투자 원금 전액을 투자자에게 반환하라고 권고했다. 손해배상도 아닌 투자 원금 전액 반환 결정이 내려진 건 판매사들이 그만큼 부실이 명백한 금융 투자 상품을 팔았다는 의미다. 전액 반환은 2020년 라임 사모펀드, 2021년 옵티머스 사모펀드 사태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분조위는 해외운용사가 거짓되거나 과장된 상품제안서를 작성했고, 6개 판매사는 이 제안서에 따라 계약을 체결해 투자자의 착오를 유발했다고 판단했다. 민법(제109조)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 법리에 따르면, 계약 상대방이 계약 체결 당시 주요 사항을 알리지 않았을 경우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분조위는 “투자금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누구도 해당 상품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판매사가 알리지 않은 정보가) 주요한 부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일반인 투자자들이 독일 시행사의 시행능력을 직접 검증하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반 투자자의 중과실은 없다고 봤다.
이번 분쟁 조정과정에서 핵심 쟁점은 환매 중단 발생 원인이 처음부터 존재했는지, 잘못된 운영으로 사후적으로 발생했는지로 모였다. 금감원은 투자 제안서에 기재된 주요 내용 대부분이 거짓·과장돼있어서 계획한 투자 구조대로 사업이 시행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투자금 상환을 담보하는 주요 안전장치가 독일 시행사에 맡겨져 있어 시행사의 사업이력이나 신용도, 재무상태가 매우 중요했는데, 시행사는 2014년 이미 자본잠식 상태였다.
금감원 관계자는 “시행사 재무상황을 고려할 때 첫번째 안전장치인 시행사의 20% 후순위 투자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더구나 시행사가 20% 후순위 투자해야 할 계약상의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제안서에는 5.5%의 수수료를 차감한다고 돼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면약정을 통해 24%의 수수료가 차감되도록 설계돼 투자 원금이 온전히 투자되지 못하는 구조였다. 금감원 관계자는 “사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사기는 범죄이기 때문에 고의가 입증돼야 한다. 독일 시행사의 고의성을 입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혔다.
분쟁조정 신청인과 판매사가 20일 이내 금감원 분조위의 조정안을 수락하면 조정이 성립한다. 금감원은 나머지 투자자에 대해서는 분조위 결정 내용에 따라 자율조정이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다. 금융권에서는 금감원이 전액 반환이라는 강한 조처를 내놓은 만큼 판매사들이 조정안을 수락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조정 절차가 원만하게 이뤄진다면 일반투자자 기준 4300억원의 투자원금이 투자자들에게 반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 헤리티지펀드는 수도원이나 병원 등 독일의 오래된 건물을 주거용 건물 등으로 리모델링한 뒤 매각이나 분양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펀드다. 신한투자증권을 비롯한 7개사는 2017년 4월~2018년 12월 총 4885억원 어치 상품을 판매했다. 국내 판매사, 운용사, 파생결합증권(DLS) 발행 증권사가 연결돼 모집한 자금이 싱가폴 소재 자산운용회사와 신탁회사를 거쳐 독일 사업자에게 전달됐다. 그러다 2019년 6월 시행사의 사업 중단으로 환매가 중단됐고 4746억원을 회수하지 못했다. 이후 금감원에는 190건의 분쟁조정 신청이 접수됐다. 분쟁조정이 접수되지 않은 하나증권을 제외한 6곳은 헤리티지 상품 1849개 계좌에 4835억원 어치를 팔았는데 신한투자증권은 그중 3907억원 어치를 팔았다. 엔에이치 투자증권(243억), 하나은행(233억), 우리은행(223억원), 현대차증권(124억원), 에스케이증권(105억원)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3년여가 흐르도록 분쟁조정 절차가 마무리되지 못했다. 금감원은 “다수 금융회사가 관련돼있고 운용사는 싱가폴에, 최종 사업자는 독일에 있는 등 복잡한 투자구조로 인해 사실관계 확인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2019년 10월~올해 5월 국내 금융회사에 대한 검사, 지난해 10월 분쟁 조정국 현장 조사를 실시하고, 법률 자문 두 차례, 사전간담회 두 차례, 분조위 두 차례를 개최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
독일 헤리티지 펀드 분쟁 조정이 마무리되면서 5대 사모펀드와 관련된 분쟁조정은 사실상 일단락됐다. 다수의 투자 피해가 발생한 5대 펀드는 라임·헤리티지·옵티머스·디스커버리·헬스케어 펀드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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