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대단지 아파트인 ‘트리지움’에서는 전용면적 59㎡ 전세 매물(중층 기준)이 8억5000만∼9억5000만원에 나와 있다. 2년 전인 지난 2020년 7, 8월에는 비슷한 층이 8억3000만∼9억원에 계약됐다. 전세 재계약 주기가 한 번 지날 동안 시세가 크게 뛰지 않은 셈이다. 잠실동의 한 공인중개소 대표는 “갭투자(전세 끼고 매입) 했던 집주인들이 세입자 구하는데 애를 먹으면서 호가를 낮추고 있다”며 “(신규 계약 기준) 올 연초보다 시세가 1억원 이상 떨어졌다”고 전했다.
서울의 아파트 전세 공급이 수요 대비 3년 만에 최대로 늘어나는 등 매매에 이어 전세시장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임대차 계약갱신청구권 시행 2년째에 ‘전세 대란’이 올 거라던 일각의 예상과 달리, 매물이 늘고 시세도 떨어지는 모습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매매시장의 숨고르기도 더욱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10일 한국부동산원 통계를 보면, 1일 기준 서울의 전세수급동향지수는 91.5로 지난 3월28일(90.6) 이후 18주 만에 가장 낮았다. 전세지수가 100을 밑돌면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매물이 쌓인다는 뜻이다. 서울의 전세지수는 지난해 12월 초 100 아래로 떨어진 뒤, 올 6월6일(95.0)부터는 8주 연속 하락세다.
실제로 시장에 남는 매물 수는 빠르게 늘고 있다. 부동산 빅데이터회사 아실에 따르면, 이날 서울의 아파트 전세 매물은 3만261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만9983건)보다 63% 증가했다. 한강 이북 지역의 매물 증가가 두드러졌다. 강북구와 도봉구 매물이 1년 새 각각 133%, 87% 늘었다. 은평구는 76% 증가했다.
가격 조정도 시작됐다. 케이비(KB) 국민은행 통계를 보면, 지난달 서울에서 계약된 아파트 전세의 평균 보증금은 6억7788만원으로 전달(6억7792만원)보다 소폭 내렸다. 서울 전세 시세가 내린 건 2019년 4월 이후 3년3개월 만이다.
시장이 잠잠해진 가장 큰 이유로는 금리 인상이 꼽힌다. 전세자금대출 등의 금리가 전월세전환율(보증금을 월세로 돌릴 때 적용하는 비율)을 앞지르면서 전세 대신 월세 낀 매물을 찾는 수요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5월 기준 서울 60∼85㎡ 규모 주택의 전월세전환율은 4.1%였다. 전세 보증금 1억원을 월세로 돌리면 연간 410만원, 월 34만1666원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시중은행의 전세자금대출 금리가 연 4∼5%대로 올라, 목돈 없는 세입자는 전세보다 반전세를 얻는 게 이득인 셈이다.
애초 시장 일각에선 임대차2법 시행 2년째인 지난달부터 ‘전세 품귀’가 심해질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 재계약 때 임대료를 5% 이내로 올린 집주인들이 새 계약 때 보증금을 크게 올리면서, 기존 집에서 밀려난 세입자들이 시장에 쏟아진다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현상이 뚜렷치 않다. 세입자들의 재계약 종료 시점이 7·8월로 몰리지 않고 분산되는 데다, 최근 부동산 시장이 경색되며 집주인들도 기존 세입자를 눌러앉히는 추세라는 게 부동산 업계의 설명이다.
전세 시세가 본격적으로 빠지면 매매시장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저금리 기간에 자기 자본이 부족한 상태서 갭투자한 집주인 등이 매물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정렬 영산대 부동산대학원장은 “시장 활황기에는 높은 전세 보증금과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수요가 많았지만, 지금은 이런 식의 매수가 어려워졌다. 전세에서 매매로 갈아타는 실수요도 줄어 매매값 역시 하락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내다봤다.
천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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