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경총회관에서 열린 정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샅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자 월급을 놓고서다. 정부와 경영계가 한패를 이뤘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달 들어 벌써 세 차례나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공개 촉구했다. 지난 28일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단 간담회 발언이 대표적이다.
“경쟁적으로 임금을 올리기 시작하면 물가, 임금의 연쇄 상승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결국 우리 경제 전체에 어려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임금 인상발 인플레이션’(기조적 물가 상승)을 염두에 둔 말이다. 지난 2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앤드루 베일리 총재가 “고통스럽지만 임금 인상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가 논란을 부른 것보다 더 노골적이다. 일리는 있다. 급등한 물가만큼 임금을 인상하면 기업은 늘어난 인건비를 제품 가격에 전가한다. 다시 물가가 오르고 또 임금 인상 압력이 커지는 악순환이 바로 임금발 인플레이션의 정체다.
노동계는 발끈했다. 하필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 시한을 하루 앞두고 이런 말을 꺼내는 저의가 뭐냐는 거다. 추 부총리의 발언은 삼성·엘지(LG)·네이버·카카오 등 최근 10%안팎으로 임금 인상을 결정한 대기업을 겨냥한 것이지만, 배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맨 꼴이 됐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노동자에게만 고통 분담을 요구한다’는 비판도 빗발친다.
정부가 총대 멘 임금발 인플레이션 우려가 과장됐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국제기구들이 주로 이런 견해를 제시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달 초 발표한 세계경제 전망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선진국 경제는 1970년대보다 더 유연하고, 따라서 오일쇼크(유가 충격)도 과거보다 더 잘 다룰 수 있다.”
이 기구의 낙관론의 근거는 이렇다. “197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제도 변화로 유가 급등 및 다른 공급 충격이 임금·가격 상승의 악순환을 초래할 위험이 줄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선진국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조처로 노동조합 힘이 빠지며 노동자 계층이 임금 인상을 요구할 ‘협상력’(bargaining power)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다.
세계은행도 같은 의견을 내놨다. 최근 이 기구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이 재현될 가능성을 점검하는 보고서를 펴냈다. 이 기구는 “1970년대는 임금·물가·금리 통제의 구조적 경직성이 심했지만, 지금은 경제가 더 유연해져 인플레이션을 심화하는 임금·물가의 악순환적 상승 가능성이 줄어들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학계가 그동안 골머리를 앓아온 한 ‘살인 사건’도 이런 주장에 힘을 싣는다. 과거 미국 중앙은행은 실업률과 임금·물가가 반대로 움직인다는 ‘필립스 곡선’을 기준금리 결정의 주요 참고 지표로 삼았다. 고용시장이 좋아지면 일할 사람 구하기 어려운 기업이 인건비를 올리고 소비자의 구매력이 높아져 물가도 덩달아 뛴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업률과 물가가 같이 바닥을 기면서 ‘필립스 곡선 이론은 사망했다’는 진단서까지 나왔다.
그럼 주범은 누구인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소속 이코노미스트(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래트너와 심재웅 박사는 지난달 게재한 ‘누가 필립스 곡선을 죽였나? 살인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그 범인을 ‘노동자의 교섭력 붕괴’라고 지목했다. 미국의 경우 노조보다 기업에 힘을 실어준 정부 정책 여파로 낮은 실업률이 임금과 물가 상승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끊어졌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노조 조직 대상인 노동자 대비 조합원 수의 비율)은 오일쇼크 당시인 지난 1980년 21%에서 2019년 12.5%로 사실상 반 토막 났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이 그나마 나은 협상력을 갖는 국내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를 고려하면 고물가로 인한 실질 임금 감소 피해는 노동 취약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에겐 임금발 인플레이션 논란이 다른 세상 얘기로 들릴 수 있는 셈이다.
박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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