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75 ) 전 총리가 스승의 날 ( 5 월 15 일 ) 을 맞아 은사인 조순 (94 ) 서울대 명예교수와 반세기가 넘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인연을 이어오며 가르침을 따라온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 ‘나의 스승, 나의 인생-조순 선생과 함께한 55년’ (나남 출판 )을 출간했다.
조순 선생은 한국 경제학계의 거목으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정 전 총리는 조순 선생의 제자들로 이뤄진 ‘조순학파’ 중에서도 스승과 가장 가까운 수제자로 꼽힌다.
책에는 그동안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제지간의 여러 에피소드가 담겼다. 사제 간의 일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음미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정 전 총리는 “지난해부터 조순 선생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매일 조금씩 메모해온 것을 책으로 묶었다”면서 “조순 선생은 나를 끌고 밀며 내 인생을 만들어 주신 분으로, 그런 스승을 만난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조순 선생과 정 전 총리의 인연은 55년 전인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조 선생은 서울대에서 최초로 케인즈 이론을 비롯한 현대 경제학을 강의했다. 영어, 독일어, 한문은 물론이고 문학, 역사, 철학까지 넘나드는 선생의 수업에 정 전 총리는 깊이 매료됐다. 정 전 총리는 “창조적 정신과 정책 구상이 사회 변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케인즈 이론은 실천적 경제학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다”면서 “선생의 수업에 감화하여 수업 후 칠판을 지운 일을 계기로 특별한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됐다”고 회고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생계가 어려웠던 정 전 총리를 위해 조순 선생은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졸업 후 한국은행에 다니던 그에게 학문적 가능성을 알아보고 미국 유학을 권유한 것도 조 선생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처가의 결혼 허락을 받지 못했을 때는 신부 부모를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뒤 컬럼비아대에서 교편을 잡은 그를 서울대로 부른 것도 조 선생이다.
조순 선생은 상아탑에 머물던 정 전 총리에게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판하고, 정책에 대해서도 시시비비를 가려 대안을 제시하라”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일깨워줬다. 1986년 신군부의 폭정에 맞선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문과 2002년 서울대 총장 취임사를 쓸 때 직접 원고를 고쳐주고, 2009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직을 제의받고 고민했을 때도 조언을 해주었다. 정 전 총장은 “인생의 고비마다 경제학자로서, 인간으로서 더 크게 성장하고,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고 말했다.
정 전 총리가 총리를 그만 둔 뒤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해 중소기업과 대기업, 빈자와 부자, 여성과 남성, 농촌과 도시가 함께 성장하고 공정하게 나누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동반성장을 화두로 삼는 것도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세상에 돌려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정 전 총리는 조순 선생의 건강에 관해 묻자 “90을 훌쩍 넘기신 선생님의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은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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