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 시민사회단체가 새 정부에 정책 제안을 하는 취지로 마련한 토론회가 4월5~7일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열렸다. 6일 조세재정 정책 분야 토론회에서 정세은 교수(왼쪽 둘째) 등이 토론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대통령 당선자는 코로나 피해 보상을 위해 ‘50조 추경’을 공약해놨는데, 그가 지명한 국무총리 후보자는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며 국채 발행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추경을 하려면 국채 발행이 불가피해 보이는데도 당선자 쪽은 “지출 구조조정을 하면 된다”고 억지를 부린다. 이처럼 앞뒤가 안 맞는 메시지를 내놓고 있는 윤석열 당선자 쪽의 속내는 뭘까.
한덕수 총리 후보자의 ‘재정건전성’ 발언이 나온 것은 지난 4월4일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에 첫 출근을 할 때였다. 그는 기자들이 50조 추경과 관련해 국채 발행 여부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세계적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 위기 대응을 위해 단기적으로 재정이나 금융이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부채가 너무 빨리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정책의 건전성에 대해 대내외적인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재정의 건전성을 가져가야(지켜야) 하고, 단기적으로도 최대한 차입이 아닌 지출 구조 등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부분이 우선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출 구조조정으로 윤 당선자의 공약을 이행하기는 불가능하다.
인수위가 지출 구조조정 대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분야는 한국판 뉴딜 예산 34조원, 탄소중립 예산 12조원 등이다. 한국판 뉴딜 사업은 연구개발(R&D), 사회간접자본(SOC), 고용 등 여러 분야에 흩어져 있는 기존 예산을 다시 묶어 ‘이름표’만 새로 붙인 것이다. 특히 뉴딜 예산 가운데 3분의 1가량(11조1천억원)은 청년 등 인력 투자에 들어가는 예산이다. 탄소중립 예산도 전기·수소차 보급 확대처럼 당장 지원을 끊기 어려운 예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앞서 기획재정부는 2021년 발생한 초과세수 가운데 추경 재원으로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이 3조3천억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추경 50조’를 만들려면 올해 본예산에서 나머지 46조7천억원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모자라는 금액은 국채를 발행해 조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무총리 후보자가 재정건전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결국 일부 공약을 폐기해 추경 규모를 줄이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새 정부는 어떤 분야의 공약을 가장 먼저 줄일까.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그 대상이 복지 공약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4월6일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새 정부에 주요 정책을 제안하는 취지로 개최한 토론회에서 정세은 충남대 교수는 “윤 당선인 쪽이 총 공약 수는 200개이고, 이를 이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266조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이행하려면 국채를 발행하거나 증세가 필요한데 오히려 감세 공약만 내놨다. 결국 복지 공약을 폐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윤 당선자 쪽이 밝힌 핵심 공약별 재원은 △코로나 대책 50조원 △기초연금 인상 35조4천억원 △병사 월급 인상 25조5천억원 △주택난 완화 및 주거복지 12조1천억원 △농업직불금 확대 9조2천억원 △생계급여 확대 7조7천억원 △부모 급여 7조2천억원 △수도권 광역급행열차(GTX) 5조원 △국민안심지원제도 4조원 등이다. 윤 당선자 쪽은 세출예산 절감으로 150조원을 충당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5년 동안 올해 재량지출 예산(정책적 의지에 따라 대상과 규모를 통제할 수 있는 예산)의 10% 수준인 30조원을 구조조정하겠다는 것이다. 또 추가 세입 증가분 116조원(매년 4.5%의 세입 증가 추정)으로 나머지 공약 이행 비용을 충당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 교수는 “이 방안은 실현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증세를 하지 않으면 공약을 이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새 정부 출범 후 재정준칙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어 장기적으로는 정부 지출을 줄일 것이다. 이 경우 재량지출에서 가장 비중이 큰 사회복지(62조1천억원) 관련 지출을 줄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복지 공약의 축소는 자산 및 소득 양극화를 더욱 악화시킨다. 코로나 팬데믹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등 저소득층이었다. 고소득층은 오히려 자산가치의 증가로 소득이 늘었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는 “한국의 피케티 지수(자산가격과 노동소득을 비교한 지수)는 2019년 기준 8.6으로 선진국의 5~6배에 달한다. 노동에 비해 자본이 가져가는 몫이 매우 크고 점점 증가하고 있다. 자산 불평등, 시장소득의 불평등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4월5일 ‘새 정부에 바란다’ 토론회)라고 했다. 저소득층은 지금 매우 절박한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하다.
윤 당선자가 부동산 세제 완화 등 대규모 감세 공약을 내놓았기 때문에 새 정부에서 증세를 추진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채 발행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최근 한덕수 후보자의 ‘재정건전성’ 발언에 대해 “재정건전성을 통상적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반드시 그 점에만 집중할 것 같으면 현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반박했다.
국채 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은 ‘국채 폭탄론’이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국채 발행을 ‘폭탄 돌리기’에 비유하며 강하게 반대해왔다. ‘국채 폭탄론’의 근거는 국채 발행이 시장금리를 올려 경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국채가 시장에 쏟아지면 국채 가격은 내려가고 금리는 오르게 된다. 국채 금리 인상은 시장금리에 영향을 줘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을 올리고 가계 이자 부담을 키워 소비까지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엔 반론이 있다. 국채는 안전자산이기 때문에 투자자의 수요가 있다. 따라서 시장에서 모두 소화된다(국채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국내 채권 발행액 규모는 3362조원인데, 이 가운데 국채는 961조원으로 그 비중이 28%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회사채다. 국채는 회사채보다 더 안전하다. 또 시장금리는 국채 금리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 등에 따른 영향이 더 크다. 나원준 경북대 교수는 “만약 시중은행이 국채 매입에 부담이 있다면 한국은행이 직접 매입하면 된다. 한은의 국채 보유량은 3% 정도로 미국 연준의 20%에 비하면 너무 적다. 한은이 국채 매입량을 늘리면 그만큼 정부의 재정정책에 여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만약 윤석열 정부가 국채 발행을 피하기 위해 추경 규모를 줄인다면 그만큼 자영업자 등에 대한 정부 지원은 줄어든다. 그 부담은 결국 자영업자 개인이 져야 한다. 국가 재정은 건전해질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개인의 부채는 늘게 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새 정부의 선택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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