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3월21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열린 경제6단체장과의 오찬 회동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윤 당선자, 손경식 경총 회장, 최진식 중견기업연합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장. 공동취재사진
“우리는 고객(투자자)을 대신해서 삼성전자가 탄소감축 계획을 너무 늦지 않게 공개하도록 지속해서 관여할 것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지난달 16일 삼성전자 주총이 끝난 직후 이례적으로 의결권 게시판을 공개했다. 블랙록은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를 중시하는 이에스지(ESG) 열풍을 선도하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달 21일 이를 보도하며 “블랙록이 비록 삼성전자의 이사 선임 안건에 찬성했지만, 속으로 단단히 벼르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분 5%를 보유한 블랙록은 그동안 온실가스 감축에 소극적인 삼성전자를 주시해왔다. 삼성전자는 2020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년보다 5% 증가했다. 경쟁사인 애플이 2017~2021년 탄소배출량을 40% 줄이고, 2030년까지 공급망과 제품 전반에 걸쳐 탄소중립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한 것과 대비된다.
네덜란드 연금투자회사인 에이피지(APG)도 지난 2월 삼성전자·에스케이텔레콤 등 국내 9개 대기업에 탄소배출 감축에 적극 나서라고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일부 대기업들은 글로벌 사회에서 ‘기후악당’으로 불린다.
“죽느냐 사느냐, 생사의 문제입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의 에이치디씨(HDC)현대산업개발 주총장에서 만난 회사 간부의 표정은 비장했다. 현산은 지난해 광주 학동 재개발 붕괴사고에 이어 지난 1월 광주 화정동 신축아파트 붕괴사고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최대 위기를 맞았다. 서울시는 학동 사고의 책임을 물어 8개월의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국토부는 화정동 사고에 대해서도 건설업 면허 등록 말소 등 최고 수위로 처벌할 것을 서울시에 요청한 상태다. 조우경 홍보팀 부장은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지만, 회사에 딸린 식구가 수천, 수만명에 달하는 만큼 기업활동을 그만두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현산은 주총에서 에이피지가 제안한 ‘안전 우선 경영’ 관련 정관변경 주주제안을 받아들여 안전경영 등에 관한 회사 의무를 명시하는 전문 신설, 이사회 내 안전보건위 설치 등의 개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이에스지 이슈에 관한 권고적 주주제안 제도 도입은 반대했다. 권고적 주주제안은 주총에서 관련 안건이 의결되더라도 권고적 효력만 갖는 제도로, 선진국에서는 이에스지 경영 활성화에 이용된다. 경제개혁연대의 노종화 변호사는 “주총에 참여한 일반주주의 97%가 제도 도입에 찬성했다”며 “산업재해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블랙록의 경고와 현산의 위기는 ‘이에스지 시대’에 한국 기업이 직면한 리스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올해 초 기업 최고경영자들에게 보낸 연례서한에서 “훌륭한 기업은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연계하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근간”이라며 “탄소배출 넷제로 세계로의 전환은 모든 기업과 산업에 변화를 불러오고 있는데, (중략) 귀하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산업재해 방지는 이에스지의 두번째 분야인 사회책임(S)의 핵심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산업안전보건을 노동기본권으로 선언하는 방안을 오는 6월 110차 총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노동 금지에 이어 산업안전보건도 노동기본권의 핵심 협약으로 확대하겠다는 의지이다. 최악의 ‘산재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한국이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획기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압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블랙록의 경고를 보도한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경제6단체와 간담회를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손경식 회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허창수 회장은 산재사고 예방을 위해 만든 중대재해법을 완화해달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대해 윤 당선자는 “기업활동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없애겠다”며 ‘친기업’,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조를 분명히 했다. 경총은 고무된 듯 지난달 28일 인수위에 ‘신정부에 바라는 기업정책 제안서’를 전달했는데, 노골적으로 이에스지에 역행하는 내용을 여럿 포함시켰다. 환경분야에서 ‘연도별 온실가스 감축목표 합리적 설정(완화)’, 사회책임 분야에서 ‘중대재해법 보완(완화)’과 재벌의 일감몰아주기 규제 완화, 지배구조 분야에서 감사위원 선출 시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폐지가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연금투자회사인 에이피지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책임투자부 박유경 총괄이사는 “경제단체가 말로는 이에스지를 강조하면서 중대재해법 완화를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며 “차라리 이에스지를 한다는 말을 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당선자와 경제계가 ‘친기업’을 내걸고 이에스지에 역행하는 움직임을 잇달아 보이는 것에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윤 당선자가 강조해온 ‘공정’ 공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적도 많다. 이에스지 평가업체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글로벌 사회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면 자칫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 당선자의 이에스지 관련 대선 공약도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빈약하다. 이에스지 공약은 10대 핵심과제 중 두번째인 ‘행복경제시대,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에 포함됐는데, 207개 세부과제 중 하나인 ‘중소·벤처기업의 이에스지 경영 지원 강화’에 단 몇줄이 들어가는 데 그쳤다. 내용도 이에스지 역량 강화 및 적용 확대를 위한 대응 시스템 구축, 대기업의 협력 중소·벤처기업 등에 이에스지 경영 역량과 기술협력 촉진 등 평이하다. 기후 관련 내용은 일곱번째 핵심과제인 ‘맑고 깨끗한 환경, 탄소중립을 도약의 계기로’에 별도로 담긴 했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인정하면서도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는 반대로 일관하다 보니 엉거주춤한 모양새가 됐다. 한 예로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국제사회에 약속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40%는 준수하되, 달성 방안은 전면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또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폐기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신재생에너지 확충과 에너지 믹스에 대한 대안 전략은 부실하기 이를 데 없다.
유럽연합의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강화와 2026년 철강 등에 대한 탄소국경제 도입은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인 이에스지에 소홀할 경우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무역장벽’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올해 최고경영자에 대한 연례서한에서 “탄소배출 넷제로 전환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느냐”며 “(멸종한) 도도새와 (영원히 사는) 불사조 가운데 어떤 존재가 될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스지 정보 공시가 금융시장에서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공시 의무화와 함께 공시기준의 글로벌 표준을 만드는 작업도 빨라지고 있다.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은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설립을 공식화했다. 서재교 우리사회적경제연구소장은 “향후 몇년 안에 이에스지 지표가 기존 재무정보 지표보다 더 중시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많은 국내 기업이 이에스지 시대를 맞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일부 기업은 말로만 이에스지를 내세우고 실제로는 이를 외면하고 있어 이른바 ‘이에스지 워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업들이 이에스지 경영 선언과 함께 앞다퉈 설치하고 있는 이에스지위원회도 ‘보여주기’에 그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리더스인덱스(대표 박주근)의 분석에 따르면,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 169개 가운데 3월 현재 이에스지위원회를 설치한 기업은 88개로, 1년 전보다 80% 급증했다. 하지만 기업별 위원회 개최는 연평균 2.9회에 그치고, 위원회 안건 중에서 이에스지 관련 사항도 31.3%에 불과하다. 위원회의 구성원도 이에스지 전문가는 1~2명뿐이다.
이에스지는 자본시장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투자운용사들은 이에스지 지표를 보고 투자 대상을 결정한다. 탄소감축에 소극적이거나, 산업재해가 빈발하는 기업은 투자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에스지 평가등급이 낮으면 아예 자본조달이 불가능할 수 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이에스지는 ‘게임 체인저’ 기능을 하고 있다”며 “기업들의 초기 적응에 비용부담이 크더라도 신속하게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정부가 기업을 위하는 진짜 친기업”이라고 강조했다. 박유경 총괄이사도 “대통령 당선자가 산업재해 기업을 봐주는 게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아니다”라며 “한국의 산업재해 실정을 접하는 해외 금융기관들은 주요 7개국(G7) 회의에까지 초대되는 나라가 왜 이러냐며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산재 다발 기업의 ESG 점수가 높은 이유는?
포스코·현대제철·현대산업개발 ‘산재기업’ 오명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사회 분야 최고 A+ 부여
MSCI 최저 CCC와 대조…평가신뢰 훼손 우려
한국거래소의 이에스지(ESG) 포털은 국내 기업에 대한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과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의 이에스지 평가등급을 보여준다. 기업지배구조원의 등급은 S, A+, A, B+, B, C, D 등 일곱 단계로 이뤄져 있다. 세계 3대 평가기관 중 하나인 엠에스시아이의 등급은 AAA(최상), AA, A, BBB(평균), BB, B, CCC(최하위) 등 일곱 단계로 나뉜다.
산재 다발 기업에 대한 평가에서 두 기관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금속노조의 주장에 따르면, 포스코는 2018년부터 2021년 2월까지 38개월 동안 155건의 산재가 발생했다. 이 중 사망사고는 16건으로 모두 21명(포스코는 14명이라고 주장)의 노동자가 숨졌다. 중대재해법 시행 직전인 지난 1월에도 포항제철소에서 용역업체 노동자가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기업지배구조원은 2021년 포스코에 대해 두번째 등급인 A+를 부여해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산재가 포함된 사회책임(S) 분야도 A+였다. 반면 엠에스시아이는 2017~2021년 5년간 내리 네번째인 BBB를 부여해 업계 평균 수준으로 평가했다.
현대제철 역시 산재 다발 기업이라는 오명을 듣는다. 2007년부터 33명이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이 때문에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특별감독까지 했다. 회사는 안전예산을 1600억원까지 늘려 사고 예방에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중대재해법 시행 뒤에도 2명의 노동자가 잇달아 숨졌다. 기업지배구조원은 올해 세번째 등급인 A를 부여해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사회책임 분야도 역시 A였다. 반면 엠에스시아이는 2019~2022년 4년 내내 최하위인 CCC를 부여했다.
에이치디씨(HDC)현대산업개발은 지난해 6월과 올해 1월 광주에서 잇달아 대형 붕괴사고가 발생해 다수의 인명 피해가 났다. 기업지배구조원은 2019~2022년 4년 연속 다섯번째 등급인 B를 부여해 ‘약간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사회책임 분야도 B였다. 반면 엠에스시아이는 여섯번째 등급인 B를 부여해 ‘매우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평가기관에 따라 이에스지 등급에 차이가 나는 것은 활용하는 이에스지 정보의 종류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기관마다 적용하는 환경(E)·사회책임(S)·지배구조(G) 평가요소와 가중치도 다르다. 하지만 국내 평가기관이 산재 빈발 기업에 부여하는 등급이 글로벌 평가기관보다 지나치게 후한 것은 평가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다.
네덜란드 연금투자회사인 에이피지(APG)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책임투자부 박유경 총괄이사는 “상습적으로 산재 사망사고가 나는 기업에 높은 등급을 주는 것은 자칫 ‘이에스지 워싱’을 도와주는 꼴이 될 수 있다”며 “중대사고가 나면 충분히 평가점수를 디스카운트(감점)하는 방향으로 평가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