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각)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경제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이날 우크라이나 침공을 둘러싼 서방의 제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크렘린궁 제공.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러시아 제재 강화에 대응해 러시아 쪽이 지난 28일(현지시각) 강력한 외화 통제 카드를 꺼내 들어 러시아 지역과 거래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들에 추가 부담을 안기고 있다. 러시아 외화 통제 조처는 무역업자(대외경제활동 참여자)에 대해 올해 1월부터 확보한 외화의 80%를 매각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러시아 현지에 투자했거나 현지에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는 업체들에는 대러 금융제재에 따른 파장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정민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부연구위원은 1일 러시아 쪽의 조처에 대해 “(미국 등의 금융제재로) 자본 유출이 이어지고 루블화가 폭락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며 “현지 진출 기업들은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위원은 “러시아에선 과거 자본 유출에 따른 악영향이 실물 부문으로 파급돼 경기 둔화를 겪은 적이 여러 번 있어, 금융당국이 공격적이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자본 유출이 심해지면 총수요를 위축시켜 실물경제로 파급되고, 이게 다시 자본시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을 막겠다는 게 러시아의 의도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러시아 법인에선) 현지 생산해 현지에서 판매하는 수가 많고, 이 경우엔 (현지 통화인) 루블화가 오가기 때문에 당장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러시아 지역 밖으로 수출하고 달러를 받은 거래는 영향권에 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현지에서 수출입 업무에 종사하는 중소업체들 또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며, 러시아 쪽 조처의 직접적인 대상에 들지 않더라도 현지 자본시장이 요동치고, 루블화 가치가 들쑥날쑥 불안정해지는 데 따른 간접적인 피해도 예상된다.
러시아 일부 은행을 달러 결제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배제하는 국제사회의 제재 강화 발표를 앞뒤로 관련 기업들 사이에선 이미 위기감이 높게 형성돼 있던 터였다. ‘우크라이나 사태’ 뒤 산업통상자원부 전략물자관리원, 한국무역협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설치된 전담 창구에는 피해 사례가 잇따라 접수되고 있다. 미국 등의 대러 금융제재 이후에는 ‘대금 결제’에 얽힌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늘고 있다.
무역협회는 ‘우크라이나 사태 긴급대책반’에 유선 및 온라인을 통해 24일부터 28일까지 총 138건(101개사)의 애로 사항이 접수됐다고 이날 밝혔다. 이 중 대금 결제 관련 내용이 81건으로 58.7%를 차지했다. 물류가 43건(31.2%), 정보 부족이 10건(7.3%)으로 뒤를 이었다.
대금 결제 애로의 한 예로 러시아와 인근 국가로 화장품을 수출하는 한 업체는 우크라이나 바이어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무역협회는 전했다. 현지 바이어는 러시아 루블화 가치 폭락 사태를 맞아 대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 업체는 은행 대출금의 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컬러 강판을 수출하고 있는 한 기업은 전쟁 발발 및 금융제재 이전에 맺은 계약 건의 대금을 회수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업체는 계약 물량을 이미 배에 실어 보낸 상태이나 대금 회수 불가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며 수출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김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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