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한겨레> 자료 사진
국민연금의 주주 대표소송 제기 방침에 대한 재계 쪽의 난타가 이어지고 있다. 재계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심으로 의도성 짙은 여론조사를 벌이고, 토론회를 잇달아 열어 대표소송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식의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기업인을 ‘혼내고 벌주기’ 위한 수단이라는 발언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달 ‘국민연금 대표소송 추진, 이대로 괜찮은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7일엔 전경련이 같은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전경련은 앞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경영권 간섭’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은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전경련 주최 좌담회에서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정부는 그동안 국민연금의 기업 감시·규제에 걸림돌이었던 것들을 꾸준히 제거해왔고, 대표소송 제기는 이러한 기업지배의 최종 마무리 단계”라며 “‘수책위’의 결정으로 실제 소송이 이루어진다면 국민연금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상장사를 통제하는 무소불위의 기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 부회장의 발언 중 수책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영위원회 산하 3개 전문위원회 중 하나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말한다. 수책위는 국민연금의 책임 투자와 주주권 행사에 관한 사항을 검토·결정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2월 기금운용위에 상정한 대표소송 관련 지침 정비 안건에서 수책위를 대표소송 제기 결정의 주체로 삼았다. 재계 쪽의 반발이 집중된 대목이다.
국민연금 이사장을 역임한 최광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이날 좌담회에서 “기금운용위 산하 투자정책전문위와 수탁자책임전문위의 상근 전문위원 3명의 임명을 복지부가 관장하고 있다”며 “특정 시민단체나 노조 역시 위원회에 직접 참여하거나 이들의 임용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총장은 “국민이 맡긴 노후자금을 기업인을 혼내고 벌주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앞서 열린 경총 주최 토론회에서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은 보건복지부의 지침 개정안에 대해 “노동·시민사회단체에 편중된 위원회로 변경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이에 대해 “수책위의 구성을 모르고 하는 얘기이거나 오도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수책위에 정부 위원은 아예 없고, 사용자 단체와 근로자 단체, 지역 가입자 단체의 추천 위원을 각 3명씩 두고 있어 특정 단체가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없는 구조임을 일컫는다. 지역 가입자 단체 추천 위원 중 시민단체 출신이 없다는 점도 덧붙인다. 김 소장은 “수책위가 소송 제기의 최종 주체가 되더라도 기금운용본부가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는 게 아니다”며 “(국민연금의) 다른 주주권 행사에 맞춰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수책위가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게 합당하다”고 말했다. 대표성 없는 기금운용본부가 수책위 승인 없이 단독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지금의 구조가 오히려 문제라는 주장이다.
주주 대표소송은 경영진(이사)이 법·정관 위반으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우 국민연금과 같은 주주가 나서 해당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며, 승소에 따른 이익은 회사에 귀속된다. 대표소송의 근거는 1962년 상법에 도입됐지만, 실제 소 제기는 1년에 상장사 기준 2개꼴일 정도로 드물었다. 소 제기 요건(상장사 지분 0.01% 6개월 이상 보유)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더욱이 국민연금 주도로 대표소송을 제기한 예는 아직 없다. 2000년대 초반 국민연금이 대표소송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국민연금 기금운용위가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을 채택한 2018년에야 소 제기의 근거가 마련됐다. 이듬해 1월 이에 대한 구체 가이드라인이 생겨나고, 지난해엔 연내 소송을 제기한다는 국민연금 쪽의 공언까지 나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국민연금 수책위 위원인 이상훈 변호사는 “애초 일정대로라면 작년에 소 제기가 이뤄졌어야 했다”며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제기 방침은 오히려 늦은 것이고 약속 위반 상태”라고 꼬집었다. 이 변호사는 “대표소송은 기업인을 혼내기 위한 게 아니라 불법 행위를 한 경영진에 사후적으로 (주주로서) 책임을 묻고 실질적인 사전 예방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라며 ‘현대산업개발 사태’를 예로 거론했다.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잇단 사고는 산업재해를 넘어 주주, 회사, 직원들에 광범위한 손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주주 대표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재계 쪽의 거센 반발을 두고 일각에선 정권 말기에 접어들고 대선 일정을 맞고 있는 시점과 연계돼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복지부의 지침 개정안 상정 때는 재계 쪽(기금운용위 사용자 단체 추천 위원)에서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며 “재계의 최근 과잉 반응에는 대선 후보 정책 방향 길들이기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표소송 제기를 많이 할 수는 없고, 1년에 1~3건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쪽의 업무 부담이 많을 점을 고려해야 하고, 소송의 가능성을 보여주자는 취지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김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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