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갑 전 한전 사장(현 한양대 특훈교수)이 지난달 28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전기요금 등 에너지 가격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탄소중립과 에너지전환은 달성할 수 없습니다.”
김종갑 전 한전 사장(현 한양대 특훈교수)은 <한겨레>와 새해 인터뷰에서 정부가 올해 1분기 전기요금을 동결한지 1주일 뒤에 갑자기 4월과 10월 요금인상을 허용한 것과 관련해 “정부의 에너지에 대한 이해부족과 인기영합주의가 낳은 코미디”라고 꼬집었다. 전 세계에서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는 에너지산업도 결코 키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김 전 사장은 ‘탈원전’을 둘러싼 공방에 대해 “에너지원별로 환경·안전비용 등 사회적 비용을 모두 포함한 ‘균등화 발전원가’를 계산해서 국민 부담이 얼마나 될지를 비교하지 않고서는 의미있는 토론이 불가능하다”면서, 이를 방기하고 있는 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이번 인터뷰는 정부가 지난해말 물가안정 등을 이유로 한전의 올해 1분기 전기요금 인상 계획을 불허한 직후 김 전 사장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이를 공개 비판한 것을 계기로 이뤄졌다. 산업부 차관을 포함해 공직에만 30년 이상 몸담은 그의 경력을 감안할 때 작심 발언으로 여겨졌다. 김 전 사장과 <한겨레>의 만남은 지난 6일과 지난달 28일 두차례 서울 성동구 한양대 연구실 등에서 이뤄졌다.
―지난해 6월 한전을 떠난 뒤 어떻게 지냈는지?
“지난해 가을부터 한양대 공대 대학원에서 ‘한국자본주의론’을 강의하면서, 제트(Z)세대 엔지니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평소 관심이 많던 공공부문 혁신, 에너지전환 관련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있다.”
―강의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계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어떤 때는 시장이 강조되고, 어떤 때는 정부가 강조됐다. 우리나라도 이념에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이제는 이념이나 한국을 잘 모르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실사구시 관점에서 우리한테 맞는 것을 찾아야 한다. ‘경제학의 한국화’가 필요하다. 국가 차원의 비전제시와 정책설계가 매우 중요한데, 정부마다 간판정책이 좌우로 흔들리는 바람에 국민에게 큰 부담을 줬다. 정부가 직접 다 할 수도 없고, 시장도 만능이 아니다. ‘공정하면서도 효율적인 정부’, ‘효율적이면서도 공정한 시장’의 틀을 마련하여 정권 차원을 넘어 적용해야 한다.”
―1분기 전기요금 동결을 공개 비판한 직후 정부가 4월과 10월 전기요금 인상을 허용했다.
“얼마나 웃기는 코미디인가
. 에너지에 대한 정부의 이해부족과 인기 영합주의가 낳은 결과다 . 정부가 전기요금을 1분기에는 올리지 않고, 4월부터 올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
―한전 재임 중에 “수입 콩값이 올라도 두부 가격을 올리지 않다 보니, 두부가 콩보다 싸지게 됐다”는 얘기로 전기요금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와 정부의 높은 벽에 막혀 좌절한 경우가 많았다. 2021년 초 ‘원가연계 전기요금제도’를 도입할 때 한전이 드디어 ‘천수답 경영’에서 탈피하게 됐다고 큰 기대를 했다. 소액주주들의 뜨거운 격려도 받았다. 그런데 위기상황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적용해야 할 정부의 요금 통제가 일상화됐다.”
(정부는 2021년 2·3분기에 원가연동제에 따른 요금인상을 막았다. 4분기에는 연료비 조정단가를 kwh당 3원 올렸지만, 1분기에 3원 내린 것을 되돌린 것에 불과했다.)
―에스앤에스에서 “한국이 요금을 물가관리 수단으로 삼는 유일한 선진국이고, 전기요금 인상을 통제하면 결국 한전의 적자 누적으로 국민이 더 큰 부담을 지게 된다”고 비판했는데.
“선진국은 통화량과 이자율 조정으로 물가관리를 하고, 공공요금은 정부 개입 없이 독립된 규제위원회가 결정한다. 우리도 전기요금을 독립규제위원회에서 산업과 국민생활을 고려해 투명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예측 가능하게 결정해야 하는데, 현실은 거리가 멀다.”
(전기요금 조정은 산업부 산하의 민관합동기구인 전기위원회에서 한다. 9명의 전기위원회 위원에는 전직관료, 교수, 시민단체, 법무법인 출신 외에 전기공사협회, 전기공사공제조합 등 전기 관련업계 2명이 포함돼 있다. 산업부의 규제를 받는 전기업계가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공공요금과 수수료를 통제해서 물가를 잡겠다는 개발연대식 정부 개입을 그만두라”는 쓴소리도 했다. 산업부에서만 30년 이상 공직생활을 했는데, 정부의 일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나?
“공공요금이나 수수료 통제는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정부는 근거도 없이 개입하는 일본식 ‘행정지도’를 철폐하고, 법령으로만 말해야 한다. ‘행정편의주의’는 많은 비능률과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
―한전 시절 “정부와 주주에게 모두 기여하는 새 모델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정부의 공기업 관리방식은 어떤가?
“정부가 목표를 제시하고 평가하되, 수단과 방법은 자율과 책임 원칙 아래 기업 특성에 맞게 추진하도록 맡겨야 한다. 특히 상장 공기업은 상법의 적용을 받도록 하고,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정착시켜야 한다. 정부는 민간기업의 소유지배구조 개선과 소액주주 보호를 강조한다. 하지만 막상 정부가 대주주인 상장 공기업에 대해서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소액주주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명백한 ‘이중잣대’이다.”
(한전은 김종갑 전 사장 재직시절인 2018년과 2019년 연결기준으로 각각 1조원과 2조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임기 마지막해인 2020년에는 4조원의 흑자로 반전했으나, 2021년에는 다시 3분기까지 1조58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정부의 전기요금 통제가 에너지산업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했는데.
“에너지는 전 세계에서 먹거리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앞으로 20년간 에너지 분야 투자는 67조 달러로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T) 분야를 합친 투자(43조 달러)의 1.5배에 달할 전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너지를 인프라로만 취급해서, 전기를 잘 만들어 제조업과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고, 국민 생활에 불편이 없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개입으로 금융처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다. 이전에 우리가 무시했던 해외 에너지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신사업에 투자해서 주가가 장부가의 3배를 넘는다. 반면 한전은 장부가의 20% 밖에 평가를 못받아 뉴욕 증시에서 찬밥 신세이다.”
―전기요금 통제가 에너지전환, 탄소중립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가 있다.
“에너지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에너지전환과 탄소중립을 위해서도 전기를 포함한 에너지 가격을 현실화해야 한다. 기업이나 국민은 시장의 가격신호에 따라 움직인다. 전기요금 통제로 수익성이 낮고 미래의 수익성도 예측할 수 없으니,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에너지 투자를 하지 않는다. 한전도 차입을 해서 투자하는 것은 부담이 크다. 그나마 한전이 기술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해상풍력사업 진출은 법으로 막혀 있다. 한전이 원가가 낮은 전기를 생산하면 결국 전기소비자인 국민의 이익으로 돌아가는데 그러지 못한다. 에너지전환의 한축은 수요관리이다. 가격 신호가 제대로 돼야 소비자도 전기를 흥청망청 쓰지 않고 절약한다. 우리는 국민 1인당 연간 1만kwh 이상을 쓰는 낭비국가이다. 독일·일본 등 대다수 나라는 전기 공급량이 줄어드는데, 우리만 늘고 있다. 가격인상 없이 어깨띠 두르고 절약운동을 외친다고 해서, 문 열고 냉방을 하는 국민의 소비행태를 바꾸지 못한다.”
김종갑 전 한전 사장(현 한양대 특훈교수)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유럽연합이 원전을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투자로 인정하는 ‘그린 택소노미’(녹색 분류체계) 초안을 공개했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선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대신 ‘감원전’을 제시하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와 신규 원전 건설 계획까지 공약했다.
“이미 5~6년 전부터 국제에너지기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안에서는 탄소중립을 고려해서 원전도 친환경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그런데 미래 에너지 구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결정하려면, 먼저 에너지원별로 환경·안전비용까지 모두 포함한 ‘균등화 발전원가’를 계산해야 한다. 사회적 비용을 어느 정도로 반영할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에너지별 원가를 근거로 앞으로 국민 주머니에서 얼마를 부담해야 하는지 비교해서 국민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은 모두 하는데, 우리 정부는 하지 않고 있다. 이러니 제대로 된 토론이 안된다.”
―전 세계 원전 사업자 대표들과도 많은 의견을 나눴을텐데.
“ 먼저 원전은 완전히 안전한가라는 문제다. 현행 3세대 원전은 100%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4세대를 개발하여 안전도를 대폭 높이고 원가를 대폭 낮추어야 한다. 다음은 원전이 가장 저렴한 전력원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각국별로 상황이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나라별로 시기별로 균등화 발전원가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원전은 확대될까, 아니면 축소될까의 문제다. 탄소중립이 강조되면서 원전에 대한 수용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 신재생발전은 확대되고, 화석연료발전은 감소할 것은 분명하다.”
―정확한 원가계산이 없는 상태지만, 바람직한 원전정책에 대한 생각은?
“우선 운전 중인 원전은 안전성에 문제가 없는 한 최대한 오래 가동해야 한다. 두 번째로 원전 기술을 가지고 있는 몇몇 나라처럼 우리도 3.5 내지 4세대 기술을 적용하는 소형원전(SMR) 개발노력은 해야 한다. 상업적 적용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지금보다 안전도를 높이고 가격도 낮춰서 국내에서 분산형 전원으로 활용하고 세계시장에도 진출하여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야 한다. 세 번째로 대형 원전의 추가건설 여부는 국민의 수용성을 전제로 기존의 3세대 원전보다는, 3.5세대로 알려진 1.5기가와트 용량의 에이피알플러스(APR+) 건설을 검토하면 좋겠다.”
(APR+는 해외 기술에 의존한 기존 APR-1400과 달리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되어, 안전성이 높고 수출에도 걸림돌이 없는 100% 토종 원전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보수언론은 탈원전 때문에 한전의 적자가 확대됐다고 주장하는데?
“적자의 대부분은 석탄, 천연가스 등 연료가격이 오르는데 전기요금에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 환율변동, 이자부담 증가, 환경비용 증가, 싸게 공급하는 농업용 전기사용의 증가도 영향을 미쳤다. 원전 가동률과 발전 비중이 작아진 것을 탈원전 탓이라고 쳐도 한전 적자 요인의 18%에 불과하다.”
―농업용 외에도 한전의 요금 할인 제도는 다양하다.
“요금 할인이나 원가 이하 공급을 통해 복지·산업·농업용으로 지원하는 게 연간 4조원을 넘는다. 이런 선심쓰기로 전기요금체계가 누더기가 되면서 한전 경영이 어려워지는데, 정작 지원 효과는 별로 없다. 농업용 전기는 원가의 40% 정도로 지원하는데, 일부 기업농은 전기로 난방을 하여 바나나와 같은 열대과일을 재배한다. 이는 농업이 아니라 공업이다. 그래서 ‘한국산 바나나’는 사먹지 않는다. 국가적으로 불평등을 개선하고 복지를 늘리려면 재정을 늘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 증액을 말하기 전에 한전의 전기요금 할인에 대한 구조조정부터 대대적으로 해야 한다. 전기 외에 다른 분야에도 사실상 효과가 없는 요금 또는 수수료 할인 지원이 많다.”
―선진국은 이미 재생에너지의 발전원가가 원전보다 싸졌다. 하지만 한국은 여건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는데.
“많은 나라에서 재생에너지의 균등화 발전원가가 원전보다 싸졌다. 하지만 우리 상황은 좀 다르다. 풍력 발전을 늘릴 여지는 있지만 북해보다 바람 자원이 부족하다. 태양광 자원도 중동보다 부족하다. 태양광의 원가에서 토지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는 13%인데, 중국과 독일은 2~3%에 불과하다. 재생에너지의 균등화 발전원가가 좀 더 비싸다고 해서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믹스에서 제외하는 것은 답이 아니지만, 재생에너지의 원가를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 농업진흥지역에서 주민참여형으로 영농형 태양광을 추진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쌀 생산이 80%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반대론이 있지만 남아도는 쌀을 수매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연간 2조5천억~3조원)을 줄일 수 있고, 태양광 발전도 늘리고, 농민 소득에도 도움이 된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이 2001년 1차 시행 이후 중단됐다.
“1차 개편은 영국의 민영화를 따라했지만 실패했다. 영국은 민영화 이후 투자 부진, 요금인상의 폐해가 나타나자 바로 실패를 인정하고 시정 조처를 했다. 하지만 우리는 20년이 넘도록 문제해결을 미룬 채 손 놓고 있다. 어떻게 발전자회사 간 경쟁을 시키면 효율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는지 모르겠다. 5개 화력발전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똑같아서 중복으로 인한 비능률이 훨씬 크다. 원전 수출은 역량을 총동원해도 쉽지 않은데 한전과 한수원으로 나누었다, 한전그룹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2차 구조개편을 서둘러야 한다.”
―탄소중립을 위해서도 한전이 독점한 전력 판매시장 개방을 포함한 2차 전력산업 구조개편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많은데.
“우선 전력 판매부문을 민간에 개방해 소비자의 편익을 높여야 한다. 한전과 한수원의 통합, 화력발전사의 통합도 필요하다. 6개 한전 발전자회사들이 모두 종합 에너지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했는데, 불가능한 일이다. 발전사 전부를 한전으로 통합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규모가 너무 큰 공룡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한전그룹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는 해외 기업들이 큰 실적을 내고 있다.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하기 이전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부문은 즉각 시행해야 한다. 한전과 발전자회사들의 불필요한 경쟁과 중복을 최소화하고 협업을 극대화해야 한다. 한전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해상픙력 등 재생에너지 사업과 수요관리, 전기·수소차 충전 등 연관산업 진출을 허용해야 한다.”
―한전공대(한국에너지공과대학)가 3월 개교 예정인데, 아직 건물 한 채만 달랑 지은 상태라고 보수언론이 비판했다.
“건물만 중시하는 것은 개발연대식 사고다. 콘텐츠가 핵심이다. 하버드대학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미국의 미네르바 스쿨은 캠퍼스가 없고, 올린공대는 컨테이너에서 시작했으며, 코넬테크는 처음에는 세 들어 살다가 나중에 자체 건물을 마련했다. 한전공대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 우리나라 유일의 연구와 교육모델을 지향한다. 한전에 입사시키려고 대학을 만든 것이 아니다.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괴짜형’ 학생을 선발해서 졸업할 때까지 프로젝트 연구를 시킬 계획이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연구과제를 부여하고 연구결과를 한전이나 에너지산업에서 활용하여 미래의 먹거리를 만들려 한다.”
―여야가 노동이사제 도입에 합의하자, 재계가 반발하고 있다.
“한전 시절 노조대표의 이사회 참관을 정부에 건의한 바 있다. 한전이 투명경영을 실천하려면 직원들과 소액주주에게 경영을 공개할 수 있어야 한다. 환경·사회·지배구조를 중시하는 이에스지(ESG)경영이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위해서도 노동자 대표와 소액주주 대표가 사외이사로 참가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전 경우 이사가 15명 내외인데, 이들 2명 때문에 경영이 어렵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정부가 보낸 일부 전문성이 부족한 사외이사에 비해 노동이사가 회사경영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독일의 ‘공동의사결정제도’는 감독이사회의 절반은 노동자 대표가, 나머지 절반은 주주대표가 차지한다. 다만 공기업의 노동이사제 도입은 무조건 법으로 의무화하는 대신 노사협의로 시행하도록 하는 게 좋다. 준비가 안 된 기업에 도입을 강제하는 것은 노사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이닉스반도체 대표에 이어 한국지멘스에서 한국인 최초로 회장을 맡았다. 독일기업인 지멘스의 경영방식이나 지배구조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독일의 사회적 시장주의가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자본주의에서 근로자는 하나의 생산요소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고용을 기업 목적을 함께 추구하는 동료이자 오래도록 기여해 줄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로 간주한다. 마르크스가 노동자 혁명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을 주창할 때 창업자 지멘스는 노동자 처우 개선이야말로 빠르고 지속될 수 있는 사회문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지멘스가 옳았다. 지멘스는 창업자 가문에서 경영한 120년 동안 가장 역량 있는 사람을 대표로 선임했다. 창업자의 아들은 대표가 되지 못했고 동생, 조카, 종손자 등이 맡았다. 지금도 지멘스 가문이 거의 7% 가까운 지분을 가진 대주주이지만, 경영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는다. 20명의 감독이사 중 1명으로만 참여하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긴다.”
―지멘스 시절인 2014년 윤리경영 확산을 위해 만들어진 윤경이에스지포럼(옛 윤경에스엠포럼) 공동대표를 맡았고, 한전사장 재임 중에도 윤리경영을 강조했는데?
“지멘스에서 모든 국가·사회·기업·조직의 성장 발전은 지속가능경영에 달린 점을 통감했다. 미국에서 자본주의 보완장치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사회적 가치창출(CSV), 이에스지 경영을 말하지만 독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는 관행이요 문화이다. 윤경이에스지포럼의 공동대표를 8년째 맡고 있다. 지멘스는 부패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지만, “깨끗한 사업 만이 지멘스 사업이다”라는 구호 아래 윤리경영을 가장 잘 실천하는 기업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멘스 부담으로 윤리경영 확신사업을 10년간 해오고 있다. 1차사업(3년)을 전경련과 손잡고 했는데, 윤리경영 확산에 전경련 회장단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아 탈퇴했다.”
―한전 시절에는 경총을 탈퇴했는데.
“중앙단위 경총 활동은 그만두고, 광주전남지역 경총활동에만 적극 참여했다. 한전은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에 반대하는 경총과 입장이 달랐다. 한전은 소액주주 이익 보호에 더 관심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면 경총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및 대주주 의결권 제한과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에 반대했다. 또 경총이 불공정행위에 대한 제재를 규제 강화라고 반대하는데, 동의할 수 없었다. 공정위는 개선할 점이 적지 않지만, 기업들도 지배주주의 사익편취, 부당한 계열사 지원,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이 그치지 않는 것을 시정해야 한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녹취 민수빈 보조연구원
46년간 정부·공기업·민간기업 섭렵한 ‘합리론자’
김종갑 전 사장은 누구
“35년간 정부와 공기업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공공부문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이 부적절합니다. 제 뜻을 관철하지 못한 것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할 때나 잘하지’라는 비판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기대를 담아 말씀드리려 합니다.“
김 전 사장은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에 들어가자 소신 발언이 이어졌다.
김 전 사장은 1975년 행시 17회에 합격한 뒤 산업부에서만 32년을 몸담은 정통관료 출신이다. 15년간 미국 통상업무를 맡으며 최고의 통상전문가로 불렸다. 특허청장·산업부 차관을 지내고 2007년 2월 공직을 떠났다.
같은 해 3월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에 취임했다. 산업부 출신의 고위공직자가 퇴임 직후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로 간 최초의 사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회사가 2008년부터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자 스스로 임금을 깎고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도 연구개발 인력은 늘렸다. 회사는 2009년부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김 전 사장은 2011년 한국지멘스 회장에 한국인 최초로 취임해 7년간 일했다. 2018년 4월부터 한전 사장을 맡다가 2021년 6월 물러났다. 그는 한전 시절 잘한 일과 못한 일을 묻자 “특별히 잘한 일은 없어 보인다”면서 “원가연계형 요금제도 도입은 진전이었지만 정착을 시키지 못했고, 원가개념과 고객개념을 불어넣어 주식회사다운 한전을 만들겠다고 소액주주에게 약속했지만 크게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김 전 사장은 평소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이고 논리정연한 대화로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많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