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소상공인 지원용 ‘100조원 기금’을 들고 나왔지만, 구체적인 재원마련 방안과 용처는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지출 구조조정으로 60조원을 마련하고 부가가치세(부가세) 인상과 국채 발행으로 나머지를 채운다는 거친 계획만 공개됐는데,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면 100조원이라는 숫자는 재정에 대한 불신만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내년 총지출 607조원에서 부처마다 10% 절감하면 60조원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우리 예산에서 삭감 가능한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 총지출 607조7천억원의 절반(49.8%)인 302조원가량이 법에 따라 지출 의무와 규모가 결정되는 ‘의무지출’이기 때문이다. 기초연금이나 국민연금 지출 등이 대표적인 의무지출 사업이다.
나머지 재량지출 305조원 중에서도 인건비·기본경비(45조8천억원)와 국방비(40조2천억원)처럼 사실상 의무지출이나 다름없는 예산도 꽤 된다. 실제로 ‘구조조정’이 가능한 예산은 220조원 정도로 이 가운데 60조원을 삭감하려면 30% 가까이 줄여야 하는 셈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은 “선거 때마다 지출을 몇 퍼센트씩 줄인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다”며 “그렇게 큰 규모의 구조조정을 말하는 건 그만큼 예산이 필요 없는 곳에 쓰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예산 심의권을 가진 정치권이 스스로 재정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부가세를 올려 세입을 늘리는 방안도 김 위원장 구상의 일부다. 실제로 우리나라 부가세율(10%)은 주요국에 견줘 절반 수준이라 인상 여지와 필요성이 모두 인정된다. 증세를 꾸준히 주장해온 진보진영에서도 부가세는 가장 유력한 세금 인상 후보로 꼽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치적 부담과 물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 한 번에 1∼2%포인트 이상 인상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내년 부가세 세입예산은 77조5천억원 정도인데, 부가세율을 12%까지 올린다고 가정하면 15조∼16조원을 추가로 걷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거니와 ‘세 부담 전가’의 문제도 남는다. 부가세가 오르는 만큼 소비자가격에 반영할 수 있는 소상공인은 많지 않은 탓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독점기업이거나 브랜드 가치가 있는 기업은 부가세 올린 만큼 가격도 올릴 수 있지만, 열악한 소상공인일수록 가격 전가가 어려워 이익이 감소할 수 있다”고 짚었다. 부가세 인상으로 인해 소상공인이 지게 될 세 부담과 100조원 기금을 통해 받을 이익 가운데 어떤 게 더 클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금의 용처가 효과적이고 정당성이 있다면 국채 발행도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다. 우리나라 국가 부채비율은 아직 위험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앞의 두 질문에 대해 적절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채로 조달해야 할 재원 규모가 무척 커질 수 있다. 이럴 경우 국채 가격은 내려가고 장기채 이자율은 높아져서 기업 투자 등 경기에 단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구조조정 등으로 5조∼10조원은 조달이 가능하겠지만 대체로 국채 발행을 각오해야 한다. 다만 국채 물량이 늘어나면 금리가 올라가서 앞으로 생기는 국채는 지금까지와 달리 정부의 이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며 “그전에 국가 채무 문제로 정부를 공격해온 국민의힘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물론 김 위원장이 제시한 100조원 전체가 재정으로 채워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처럼 예금보험공사나 자산관리공사가 발행한 채권으로 정부가 공적자금을 조성하고 저리로 장기대출하는 방식이라면, 당장 대규모의 재정을 투입하지 않고도 100조원 지원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또한 100조원을 내년에 바로 지출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몇 년간 나누어 지출하는 방안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도 크다. 국민의힘이 ‘100조원 기금’ 공약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구체적인 로드맵을 밝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허황한 숫자 놀이가 되지 않으려면 어디에 어떻게 쓸 건지 용처를 확실히 밝히고 걷는 방법도 구체화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그 계획에 동의할지 말지를 논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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