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은 지난 3월 차등의결권을 활용할 수 있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기업을 상장했다. 뉴욕/연합뉴스
구글이 미국 증시에 상장한 것은 2004년이었다. 증시(나스닥) 상장을 위한 기업공개 당시 구글은 차등의결권(복수의결권) 제도를 채택했다. 일반 주식(‘클래스A’)의 10배 의결권을 지니는 ‘클래스B’ 주식을 발행해 이를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밋이 나눠 보유하는 식이었다. ‘창업가팀이 장기적이고 혁신적인 전략을 추진하는 데는 차등의결권이 필수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구글의 차등의결권 채택은 당시 자본시장에 형성돼 있던 큰 흐름을 바꾼 변곡점의 사건으로 꼽힌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자본시장 전반에 1주 1표 원칙은 기본으로 굳어져 있던 터였다. 차등의결권 부여를 법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어도 자본의 국제화 흐름에서 창업자 쪽에만 차별적인 특혜성 의결권을 주는 것은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불리한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창업가 경영권 방어 돕는다” 취지
쿠팡, 미 증시로 간 원인이란 지적도
자본시장연구원의 남길남 자본시장실장은 “나라마다 복잡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와 제각각 다르지만, 1주 1의결권은 20세기 들어 많은 국가들이 기본 원칙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세계 자본시장이 개방돼 있는 터에 투자자, 특히 기관이나 외국인 투자자로선 ‘같은 주식인데, 누구에겐 (의결권을) 더 준다’는 걸 어색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로 여겼다는 설명이다.
남 실장은 “1970~80년대 들어선 (차등의결권이) 대부분 사라지거나 힘을 잃었다”며 “스웨덴 등 북유럽에선 지금도 포지션(차등의결권 주식의 비중)이 크지만 실효성은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미디어그룹이나 가족기업 일부에서만 복수의결권을 허용해 자본시장 전체 판도로 봐서 복수의결권은 사실상 꺼져가는 불이었다.
구글은 이 불씨를 되살렸고, 이른바 ‘잘나가는’ 테크 기업(정보기술, 플랫폼 기반의 거대 기술 회사)들 상당수가 뒤를 따랐다. 외국 기업들도 차등의결권에 매력을 느껴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중국의 알리바바가 2014년 당시 차등의결권을 허용하지 않은 홍콩 증권거래소 대신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것은 그 흐름 속에 있다. 남길남 실장이 제이 리터 교수(미 플로리다대학)의 기업공개(IPO) 데이터를 인용해 재구성한 통계를 보면, 2020년 미국에서 기업공개를 한 165개 업체 중 차등의결권 구조를 가진 곳은 32개로 19.4%를 차지했다. 42개 테크 기업 중 차등의결권 기업은 18개로 42.9%에 이른다.
법적으론 미국 기업이지만 주 사업장을 한국에 둔 쿠팡도 올해 3월 미국 증시에 상장함에 따라 국내에서 차등의결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고 가열됐다.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일반 주식의 29배에 이르는 클래스B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뒤 차등의결권을 금지하고 있는 경직적인 국내 법체계 탓에 우량한 기업을 미국 증시에 뺏겼다는 식의 비판이 나왔다. 이는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법안 추진에 힘을 실어준 요인으로 꼽힌다.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에 샛길을 열어주는 법안은 현재 최종 처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2일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의 지분율이 30% 미만일 경우 10배의 의결권을 지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창업주의 의결권 강화로 경영권을 쉽게 방어할 수 있도록 해 장기투자를 이끌겠다는 취지다. 벤처기업협회는 이날 논평에서 “복수의결권이 도입되면 벤처 창업자가 안정적인 경영권을 토대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남은 입법 과정도 신속히 국회를 통과해 현장에서 시행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법안은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정된 것이긴 해도 주식 1주당 의결권은 1개로 같다는 상법(제369조 1항)의 대원칙 ‘1주 1표’에 균열을 내는 내용이다. 시민사회에서 논쟁거리로 떠올라 있는 까닭이다. 지난달 25일 국회 상임위 전체회의 당시 제기된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반대 논리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류 의원은 “(복수의결권 도입은) 주주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며 기존 소수 주주의 권리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장(고려대 경영학 교수)은 “정부에선 복수의결권을 허용해주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짜리 회사)으로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여러 나라의 사례에서 보듯 이미 유니콘 수준으로 커져 협상력을 지닌 회사들이 ‘전리품’으로 갖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뿐 아니라 “홍콩, 싱가포르, 영국에서도 (복수의결권에 문을 열어준 건) 거래소 간 ‘하향 평준화’의 결과였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김 소장은 법안의 취지와 달리 벤처 활성화로 이어지기 어렵고, 더 큰 문제는 해당 기업의 상장 뒤에 나타날 상황이라고 덧붙인다. 상장 3년 뒤엔 복수의결권 주식을 보통주로 전환하게 돼 있는 대목을 일컫는다. 창업자 쪽의 지분율이 갑자기 10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지고, 해당 기업은 지배권 변동이란 중대 상황을 맞게 된다. 이는 3년이란 일몰 조항을 늘리거나 없애야 한다는 여론의 비등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이 때문에 다른 여러 기업의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막을 명분은 차츰 사라지고, 1주 1표 원칙에 생겨난 틈새가 넓게 퍼지는 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관측이다. 김 소장은 이를 두고 “표 대결에서 결코 지지 않는 ‘기득권의 참호 구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도 ‘차등의결권’ 국회 통과 눈앞
주주 차별, 3년 일몰 논란 이어질듯
이와는 약간 다른 결의 문제 제기도 있다. 남 실장은 “(복수의결권 허용 방식이) 상법 개정이 아니고 특별법 형태로 우회하는 것이라 어색하며 국제적으로 유사 사례가 없는 독특한 포지션(입장)”이라고 말했다. 테크 기업과 증권거래소 간 협상, 거래소 간 경쟁에 따라 복수의결권 채택으로 이어진 외국 사례들과 달리 비상장 벤처에 한해 특별한 조건을 다는 식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이 때문에 거래소의 경쟁력 높이기, 투자자 보호 같은 주요 과제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는 것이다.
결은 좀 달라도 법안의 효과에 대한 전망은 비슷하다. 남 실장은 “법이 통과되더라도 (벤처 활성화라는 취지대로) 잘 작동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복수의결권을 찬성하는 쪽에선 짧은 일몰 조항 따위를 들어 너무 미흡하다는 불만을, 반대하는 쪽에선 머잖은 미래에 닥칠 위험성을 띠고 있다는 경고음을 내는 사정과 맞물려 있는 지점이다. 1주 1표 원칙을 깨는 상징적 의미만큼 현장에서 파괴력이 크게 나타나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에 앞서 정책을 둘러싼 불신감이 찬반 양쪽 모두에 짙게 깔려 있다는 문제점은 작아 보이지 않는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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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친 뒤 산업 현장 취재를 맡고 있다. <민스키의 눈으로 본 금융위기의 기원>, <휴버먼의 자본론>,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관료제 유토피아> 등을 번역해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