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기획] 제조업 패러다임 바꿔야 산다
② 제조업 생태계 복원이 관건
수십년 관행 ‘전속거래’ 혁신 걸림돌로
애초 ‘납품·생산 안정’ 긍정 효과
대기업 손실 떠넘기는 ‘굴레’ 변질
협력업체 이익률, 원청 절반도 안 돼
제조업 활력 회복 ‘공정한 생태계’ 시급
② 제조업 생태계 복원이 관건
수십년 관행 ‘전속거래’ 혁신 걸림돌로
애초 ‘납품·생산 안정’ 긍정 효과
대기업 손실 떠넘기는 ‘굴레’ 변질
협력업체 이익률, 원청 절반도 안 돼
제조업 활력 회복 ‘공정한 생태계’ 시급
국내 주력 제조업의 부진이 지속되면서 수많은 중소 제조업체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대기업들은 업황이 어려울수록 ‘이익 최대화, 비용 최소화’ 전략을 강화하게 마련이고, 그 부담이 1·2·3차 협력업체들에 순차적으로 전가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원청업체가 ‘약정 시아르(CR·단가조정)’라는 명목 아래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상황에서 연구개발 능력이나 부품 경쟁력을 키우기는커녕 경영 수지를 맞추기도 힘들어졌다는 것이 하청업체들의 토로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성장과 혁신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로 압축성장 과정에서 수십년간 지속돼온 ‘하도급 전속거래’를 지목한다.
최근 5년간 공정거래위원회에 접수된 하도급법 위반 신고 처리내역을 보면, 총 신고 건수 7298건 중 경고 이상의 제재는 547건, 고발은 20건에 불과하다. 원청업체가 하도급법을 위반하더라도 가장 강력한 제재인 고발 조처를 당할 확률은 0.3%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가 ‘공정경제’와 ‘경제민주화’를 강조하지만 현장에서의 변화는 여전히 체감하기 힘들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 실태 조사에서, ‘(2013년 도입된) 납품단가 조정협의권을 사용한 적 있느냐’는 물음에 44%가 ‘신원 노출에 따른 거래상 불이익 우려’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는 최근까지 접수된 피해 사례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나 중소벤처기업부 소관 법률에 따른 법적 구제를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고 했다. 법문상 구제 제도는 존재하나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적 적자로 유동성 위기에 몰린 2·3차 하청업체들은 원청업체에 단가 개선이나 자금 지원을 요청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물량 축소나 거래 단절이라는 불이익이다. 법과 현실의 괴리에 치이고 거래 중단이란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하청업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납품 거부’다. 원청업체와 협상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지만 현실에선 이조차 봉쇄당하기 일쑤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전속거래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더 벌릴 뿐 아니라 국내 제조산업 전체 생태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연구원이 최근 10년간(2008~2017년) 자동차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을 조사한 것을 보면, 현대차가 8.1%, 현대차 소속 부품계열사가 8.2%인 반면 현대차와 전속거래를 하는 350여개 협력사는 3.6%로 절반에도 못 미쳤다. 2015년 기준 삼성전자 전속 협력업체의 영업이익률은 삼성전자의 3분의 1 수준이다.
최근에는 제조 대기업들의 부진이 악화하면서 전속거래 업체들이 외려 비전속거래 업체들보다 경영 실적이 뒤처지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를 제외한 국내 중견 부품업체 100곳 가운데 31곳이 지난해 상반기 영업적자를 냈다. 조사 대상 기업들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액은 3.8% 줄었으나, 영업이익은 반 토막 났다. 지난해 6월에는 중소 부품업체인 리한이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작업)을 신청한 데 이어 금문산업과 이원솔루텍 등이 잇따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공급사슬 구조의 맨 아랫단부터 업황 부진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원가를 절감하면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면 상대 기업에 제공해 단가 경쟁을 시키는 불공정한 거래 환경에서 누가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을 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전속거래 관행이 처음부터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건 아니다. 중소 협력업체 입장에선 안정된 공급망을 확보하고 대기업들은 효율적으로 관리 생산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현대·기아차는 ‘직서열 생산방식(JIS)’이라고 불리는 자체 방식으로 전속거래 관행을 심화시켰다. 생산 현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완성차 조립 순서에 맞춰 정해진 시간에 부품을 투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속’은 ‘종속’을 뜻하게 됐고, 협력업체 처지에선 원청업체와의 거래 종료는 곧 ‘폐업’을 의미하는 상황이 됐다.
수십년간 이어져온 이런 전속거래 문제를 단번에 풀기는 어렵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개정한 하도급법에 따라 앞으로 전속거래를 강요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밝혔지만, 문제는 자생력을 박탈당한 기존 거래 업체들이다. ‘돌고래를 사육하다 갑자기 바다에 풀어주면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기존 전속거래 업체들엔 대안 없이 행해지는 전속거래 해제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산업연구원의 이항구 선임연구위원은 “기존의 하도급 관계를 파트너 관계로, 수직적 거래를 수평적 거래로 개선하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한다”며 “정부가 전속거래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협력업체에 대해서는 자생력 강화를 위한 종합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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