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기획] 제조업 패러다임 바꿔야 산다
② 제조업 생태계 복원이 관건
원청과 ‘노예계약’ 하청업체들 불황속 ‘단가 압박’에 고사 위기
소송 휘말리거나 설비 빼앗기기도…‘공정경제’ 말뿐 바뀐 거 없어
② 제조업 생태계 복원이 관건
원청과 ‘노예계약’ 하청업체들 불황속 ‘단가 압박’에 고사 위기
소송 휘말리거나 설비 빼앗기기도…‘공정경제’ 말뿐 바뀐 거 없어
충남 천안시 공업단지의 자동차 부품 업체 엠케이(MK)정공은 정밀가공 기술을 기반으로 제법 탄탄한 기술력을 인정받던 강소기업이었다. 한해 200억원가량의 매출을 올리던 이 업체는 지난해 부도가 났고, 700평 남짓한 공장은 9개월째 텅 비어 있다. 이 업체 주민국 대표는 “적자가 쌓여 손실보전을 원청에 요구했지만 오히려 금형만 빼앗기고 부도가 났다”고 말했다.
현대차 1차 협력업체인 ㅅ사에 납품하던 이 업체가 문을 닫은 건 원청업체의 납품단가 인하 압박 때문이다. 단가는 차종별로 원청업체에서 정해 내려왔다. 주 대표는 “우리가 견적을 올리는 게 아니라 원청이 단가를 정해 일방통보하는 식이다. 입찰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부도가 나기 전까지 원청은 ‘약정 시아르(CR·단가조정)’라며 납품가를 1년에 2~3%씩 3년에 걸쳐 깎았다. 엠케이정공의 거래처는 ㅅ사 한곳뿐이었다. 이른바 ‘전속거래’다. 주 대표는 “공장을 돌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원청 요구를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속거래에 묶인 하도급업체들은 사실상 제조업이 아닌 임가공업체로 전락한다. 외형은 제조업 형태지만 실상은 원청업체로부터 원자재를 사들인 뒤 주문받은 제품을 찍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단가는 원재료비 70%를 제외한 나머지 임가공비가 30%를 차지한다. 인건비도 대부분 원청에서 정한다. 엠케이공정은 원청의 잇단 납품단가 인하로 생산원가를 맞추지 못하고 공급물량까지 줄어들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원청에 손실보전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지난해 4월 20억원에 회사를 넘기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원청은 계약 이튿날 공장에 직원들을 투입해 설비를 빼내간 뒤 열흘 뒤 계약 파기를 통보했다. 주 대표는 이를 “금형 탈취”라고 말하지만, 원청업체는 “금형 회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 대표는 원청업체를 사기·특수절도 혐의로 고소했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빌린 대출금을 못 갚아 부도가 났고 공장 부지와 시설물은 은행에 압류됐다. 주 대표는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고, 급여가 밀린 직원들은 체당금(회사 도산으로 퇴직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에게 정부가 대신 지급하는 임금)을 신청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서보건 변호사는 “벼랑 끝에 몰린 2·3차 전속 협력업체 경영진들은 최후의 협상 카드를 보전하기 위해 공장을 폐쇄하거나 금형을 숨기기도 한다. 그러나 원청업체에 민사상 책임을 묻기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금형을 탈취당한 하청업체는 수개월 내 사실상 폐업이라는 벼랑 끝으로 몰리고 만다”고 말했다.
엠케이정공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현대차 2차 협력업체인 가진테크의 남아무개 대표는 지난해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진테크 역시 생산원가 이하의 납품으로 경영난에 빠져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남 대표는 손실보상과 자금 지원을 요구했지만 1차 협력업체는 복제된 금형을 만들어 공급선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금형을 협상 수단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한국지엠(GM)의 3차 협력사인 태진정밀공업은 2차 협력사에 “납품을 중단하겠다”며 손실보상을 요구하다 공갈죄로 대표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폐업했다. 현대차 협력업체였던 서진스탭스, 대진유니텍, 지아이에스, 진서테크, 두성테크 등의 대표들은 모두 원청업체로부터 고소당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공정 경제’ 정책으로 현장의 불공정 거래 관행이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이를 체감하긴 힘들다. 원청의 갑질 횡포에 견디다 못한 협력업체들이 공정거래위원회나 수사당국 등에 신고하더라도 조사 착수에 1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고 그사이 담당자도 수시로 바뀐다. 특히 대기업 원청에 맞선다는 것은 국내 현실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을 앞세운 대기업 원청들은 거의 어김없이 민형사 소송전으로 하청업체를 주저앉히는 고사 작전을 펴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납품단가 문제로 경영난을 겪는 자동차 부품 업체들은 원청업체들과 손실보상 협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원청업체는 적당한 보상을 해주고 회사를 인수하거나 금형을 돌려받는 식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부터는 “납품 중단을 무기로 돈을 뜯어내려 협박을 하고 있다”며 하청업체 경영진을 공갈죄 등으로 고소하는 강경대응 전략이 일반화되고 있다.
자동차 하청업체들은 지난해 8월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피해자협의회)를 발족했다. 스스로를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들의 연대”라고 말한다. 손영태 피해자협의회 회장은 “업황 부진이 지속되면서 갑질 피해가 크게 늘고 있다”며 “수많은 전속거래 업체들이 원청업체의 불합리한 단가 결정과 설비투자 강요 등으로 적자 발생이 불가피한 구조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천안/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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