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이 큰 차는 아무래도 연료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형차가 많은 미국차들이 ‘기름 먹는 하마’ 로 불렸던 이유다. 그런데 요즘 스포츠실용차(SUV) 시장에 부는 대형화 바람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아무리 스포츠실용차가 대세라 해도 헤비급 차종 출시 소식이 잇따르는 것은 이례적이다.
오는 11일 국내 출시 예정인 ‘팰리세이드’는 현대차가 처음 선보이는 크기의 스포츠실용차다. 현대차가 티저광고에서 공룡에 비유한 이 덩치 큰 차는 실은 미국 시장을 겨냥한 차다. 11월28일(현지시각) 개막한 미국 엘에이(LA)오토쇼에서 처음 공개한 것도 땅덩어리가 넓고 큰 차가 잘 팔리는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했기 때문이다. 기아차는 지난 9월 뉴욕 패션위크에 내년 미국 시장에 내놓을 대형 스포츠실용차 ‘텔루라이드’를 미리 선보였다.
대형 스포츠실용차가 인기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미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완성차 업체들이 해당 차종을 미국 소비자들에게 먼저 선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대형 에스유브이는 34만대가량 팔렸다. 같은 기간 국내에서 팔린 같은 차종은 3만여대로, 미국의 10분의1에도 못미친다. 2000년대 초 미국 시장에서 대형 에스유브이가 연간 70만대 이상 팔린 것에 견주면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2008년 금융위기 직후 20만대로 급락한 것에 비교하면 수요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대형 차급의 수요 증가세는 미국 경기의 회복세와도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팰리세이드는 국내에서 대형으로 소개되지만, 미국 기준으로는 중대형 에스유브이로 분류된다. 미국에서 중대형 차급의 수요가 가장 많은 것을 생각하면 현대차가 이제야 타깃으로 삼은 것은 늦은 감이 적지 않다. 어쨌든 팰리세이드의 등장으로 현대차의 스포츠실용차 라인업은 소형 코나에서 준중형 투싼, 중형 싼타페, 그리고 대형 차급에 이르기까지 완성도를 그려가는 중이다. 이는 현대차의 발목을 잡았던 스포츠실용차 라인업의 빈약함을 어느 정도 털어내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국산 대형 스포츠실용차 시장은 쌍용차의 ‘G4 렉스턴’과 기아차 ‘모하비’가 장악해왔다. 그러나 이 구도는 어차피 깨질 판이었다. 기아차 모하비는 이미 출시된 지 10년이 넘은 모델이고 그나마 지난해 출시된 G4 렉스턴이 신차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외에서 스포츠실용차 열풍이 거세게 부는데도 ‘신차 부재’로 파이를 키우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쌍용차 ‘G4 렉스턴’(왼쪽)과 기아차 ‘모하비’
팰리세이드는 이 구도를 뒤흔들 강력한 다크호스로 평가받는다. 팰리세이드는 차량 길이가 5m에 이른다. 현대차가 보유한 스포츠실용차 중 몸집이 가장 크다. 그동안 베라크루즈와 맥스크루즈의 후속 모델로 거론됐지만, 현대차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스포츠실용차 모델로 개발한 차”라고 설명한다. 3열 좌석에 7인승과 8인승 두 종류의 라인업으로 구성되고 동력계통(파워트레인)은 3.8ℓ 가솔린 엔진과 2.2ℓ 디젤 엔진에 8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제작됐다. 팰리세이드는 ‘큰 방호벽’, ‘울타리’라는 뜻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해변지역인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을 지었다. 내년에 국내 상륙할 쉐보레 ‘트래버스’도 시장 판도에 영향을 줄 차종이다. 한국지엠(GM)은 도입 시기를 내년 상반기에서 내년 초로 앞당길 것으로 전해졌다. 트래버스는 한국지엠 쉐보레가 앞서 들여온 중형 스포츠실용차 ‘이쿼녹스’의 상위 모델로, 미국에서 개발된 2세대 모델이다. 차 길이가 5m를 넘고(5189mm) 좌석 3열 공간과 트렁크 적재용량이 넓은 게 강점이다.
‘G4 렉스턴’으로 국산 대형 스포츠실용차 시장에서 선점 효과를 누려온 쌍용차는 이제 수성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됐다. G4 렉스턴은 지난해 5월 출시 이후 지난 10월까지 3만대 가까이 팔렸다. 모하비가 노후 모델로 허덕이는 사이 국내 대형 스포츠실용차 시장의 60%를 차지했다. 쌍용차는 지난 9월 편의 사양을 강화하고 상품성을 높인 2019년형 모델을 내놓고 방어막을 쳤다. 신형은 배기가스를 대폭 저감하는 선택적촉매환원장치(SCR)를 적용해 내년 9월 시행되는 배기가스 규제(유로 6d)를 1년 앞서 만족시켰다. 여기에 기아차의 텔루라이드까지 가세할 경우 내년 국내 대형 스포츠실용차 시장의 판은 더 커질 전망이다.
또다른 관전 포인트는 팰리세이드가 경쟁 수입 차종의 저격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동안 국내 대형 스포츠실용차 시장은 수입차 브랜드들이 강세를 보였다. 이 부문에서 수입차 선두는 포드 ‘익스플로러’다. 익스플로러는 올해 들어 10월까지 5330대가 팔렸다. 월 평균 500대 넘게 판매된 셈이다. 차량 가격과 상품성 등을 고려할 때 팰리세이드가 등장하면 익스플로러와의 경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익스플로러는 수입 대형 스포츠실용차 치고는 5천만원대의 합리적 가격이 강점이다. 혼다의 ‘파일럿’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파일럿은 8인승의 넉넉한 실내 공간과 부드러운 승차감이 강점이다. 올들어 10월까지 1019대가 판매됐다. 현재 판매중인 차는 미국 현지공장에서 생산된 3세대 모델로, 혼다는 이달 안에 부분변경한 모델을 또 내놓을 계획이다.
국내 대형 스포츠실용차 시장은 최근 5년 동안 연간 판매 기준으로 3만대 안팎에서 정체돼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고 한정된 구매층을 보유한 차종이긴 하지만 신차 출시가 적었던 게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이는 다른 차종보다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형차는 수익성이 중소형차보다 훨씬 좋기 때문에 수요만 뒷받침된다면 완성차업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차종이다. 세계적인 스포츠실용차 열풍 속에 덩치 큰 차들이 국내 좁은 시장을 어떻게 파고들지 주목된다.
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 Weconomy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 Weconomy 페이스북 바로가기: https://www.facebook.com/econoh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