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년의 하굣길은 유독 길었다. 서울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구경하기 위해 느릿느릿 걸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는 세계 자동차 디자인 추세가 급변하던 시절이었다. 마차에서 유래한 둥근 곡선으로 이뤄진 차체가 종이를 접은 것 같은 박스 형태로 변했다. 서울도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 ‘아트 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CCD) 운송기기디자인학과 임범석 교수(사진)의 추억 속 한 장면이다. 임 교수가 재직중인 학교는 실용 디자인 교육으로 세계 유수의 예술대학 반열에 든다. 자동차를 좇아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 대학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공부한 임 교수는 지엠(GM) 최초의 한국인 디자인 인턴, 혼다 컨셉트카 디자이너로 일한 최초의 비일본계 아시아인이란 수식어를 달게 됐다. 또 모교의 첫 한국인 정교수가 됐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자동차 디자이너는 100명가량인데, 임 교수는 이들의 선두주자인 셈이다.
전기차나 자율주행 기술 발달하고
1인 가구 급증 등 삶의 방식 변화
기존 형태 뛰어넘는 운송수단 머잖아
“미래 기술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서울모터쇼에 아쉬움 내비쳐
‘2015 서울모터쇼’ 기간에 열린 ‘투싼 디자인 포럼’에 현대자동차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찾은 임 교수는 지난 11일에 <한겨레>와 만나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자동차와 전혀 다른 모습의 자동차가 등장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차나 스스로 달리는 자율주행 기술이 발달하고 1인 가구 급증 등 삶의 방식이 변하면서 ‘바퀴 4개가 달린 차체의 의자에 앉아 핸들을 조작하는’ 기존 자동차 형태를 뛰어넘는 새로운 운송수단 등장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 공개한 무인차 콘셉트가 ‘F015 럭셔리 인 모션’. 벤츠 제공
올해 초 독일 메르세데스벤츠는 미국 가전박람회(CES)에서 자율주행 컨셉트카 ‘F015’를 선보였다. 자동차가 알아서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운전석과 조수석이 180도로 돌아가 뒷좌석에 앉은 이들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개념을 도입했다. 애초 방직기 제작회사였던 도요타가 자동차 업종에 뛰어들었듯이, 앞으로도 전통적 업계 밖의 기업들이 자동차 시장을 넘나들 여지가 큰 셈이다. 실제 정보통신(IT) 업체인 구글은 무인 자동차를, 애플은 전기차를 개발하고 있다. 임 교수는 “행사 규모에 견줘, 급변하는 미래 기술을 아이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면서, 서울모터쇼에 대한 아쉬움을 비췄다.
임 교수는 최근 글로벌 브랜드로 급성장하고 있는 현대·기아차가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브랜드 고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고언을 남겼다. 그는 “소비자들이 바라는 것에 대응하기보다는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새로운 유행은 혹평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2009년까지 17년간 독일 베엠베(BMW) 디자인 총책임자로 일한 크리스 뱅글의 디자인도 그랬다. 특히 7시리즈에 적용된 한껏 치솟은 트렁크 라인은 ‘뱅글 엉덩이’로 불리며 베엠베 마니아와 언론으로부터 “못생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뱅글 엉덩이’는 이후 업계의 공통적 추세가 된다. 임 교수는 “독일 사람조차 1990년대 말까지 베엠베 3·5·7 시리즈에 대해 ‘같은 소시지인데 길이만 다르다’라고 헐뜯었다”면서 “베엠베는 과감한 디자인 혁신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고 전통적으로 고급 브랜드였던 메르세데스벤츠와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짚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사진 현대자동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