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교환·환불 중재 접수 및 처리 현황.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새 자동차를 구입한 지 6개월이 지나 발생한 기계적인 문제는 소비자 부주의 탓일까, 차량이 잘못 제작된 탓일까.
자동차 교환·환불 중재 제도 ‘레몬법’에 따르면, 소비자가 운전을 험하게 하거나 관리를 제대로 못해 발생한 문제가 된다. 레몬법은 신차 구입 뒤 1년 동안 동일한 하자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새 차로 교환해주거나 환불해주는 제도인데, 차량이 소비자에게 인도된 날부터 6개월 이내에 발견된 하자만 인도 전에 발생한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결함은 차량 설계가 잘못돼 여러 차량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문제를, 하자는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특정 차량의 문제를 말한다. 레몬법은 하자로 추정되는 차량을 대상으로 한다.
이른바 ‘한국형 레몬법’이 도입·시행된 지 올해로 4년째다. 2019년 1월부터 적용된 이 법은 새 자동차(구입 후 1년 이내 또는 주행거리 2만㎞ 이내)가 중대 하자로 3회, 일반 하자로 4회 이상 수리를 받았을 때, 차량 구매자가 제조사에 교환·환불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자 발생 횟수와 무관하게 1년 안에 누적 수리 기간이 30일을 넘은 차량도 레몬법 신청 대상이다. ‘자동차안전·하자심의위원회’에 중재 신청을 하면 전문가 3인으로 구성된 중재부가 꾸려진다.
한국형 레몬법은 미국 제도를 본떠 만들었다. 레몬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1975년 제정된 미국 연방법 ‘매그너슨-모스 보증법’의 별칭이다. 이 법에 소송이 아닌 중재 제도를 이용해 중대 하자가 있는 차량을 교환·환불해주는 내용이 처음으로 담겼다. 과일가게에서 오렌지(정상차량)를 구입했는데 집에 와 먹어보니 신맛이 나는 레몬(하자가 있는 자동차)이었다는 이야기에 빗대 레몬법이라는 별칭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이 법은 ‘덜 익은 레몬법’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도입 당시 자동차 제조사들의 반대 논리가 많이 반영된 탓에 애초 취지와 달리 소비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계속 제기돼왔다.
‘하자 추정’ 조항이 대표적이다. 국내 레몬법은 “자동차가 소유자에게 인도된 날부터 6개월 이내에 발견된 하자는 인도될 때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고 못박고 있다. 신차 인도 뒤 6개월 이내에 발생한 하자에 대해서는 자동차 제작사가 ‘하자가 아니란 사실’을 입증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반면 6개월이 지난 차량은 그렇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소비자가 하자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재위원이 직접 차량을 확인하거나 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사실 조사를 하는 등 여러 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면서도 “(하자의 추정 조항 때문에) 아무래도 6개월이 지나서 발생한 하자에 대해서는 자동차 제작사의 태도가 (소극적으로) 달라진다”고 말했다.
‘6개월’로 돼 있는 하자 추정 기간을 더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9월 발표된 레몬법 관련 논문에서 임수민 충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리콜 접수 및 신차 교환·환불 신청 접수 통계를 보면, 신차 구입 1년 이내에 하자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2년은 돼야 하자가 발생한다. 현행 규정상의 6개월이라는 기간은 연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적었다. 그는 “자동차의 복잡성에 비해 운전자가 직접 작동시켜볼 수 있는 부품 수가 매우 적고, 소유자가 관리할 수 있는 부분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를 2년6개월 이내에 발생한 하자는 자동차 제조상의 하자로 보는 쪽으로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문제는 현행법 조항이 교환·환불 대상이 되는 장치와 구조의 범위를 너무 넓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중대 하자에 해당하는 차량 부품은 동력발생장치, 동력전달장치, 주행·조종·조향·제동장치 등 총 9가지다. 법 조항만 보면, 중대 하자에 해당하는 장치가 3번 고장 나면 레몬법 신청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동차 소비자 단체들은 실제로는 동일한 하자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이정주 한국자동차소비자연맹 회장은 “주행 중에 엔진이 세 번 꺼져서 수리를 받으면 중대 하자로 인정해줘야 마땅하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들은) 세 차례 엔진 꺼짐의 원인이 다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다”며 “법에서 명시한 중대하자에 해당하는 장치에서 같은 이상 현상이 발견돼도 원인이 다르다고 하면 동일한 하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자동차 하자 원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소비자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일반 하자도 마찬가지다. 차량이나 운전대의 떨림, 소음과 같은 일반 하자도 4번 이상 발생하면 교환·환불을 해줘야 하지만, 제조사가 반복된 일반 하자의 원인을 다르게 적용하면 교환·환불이 어렵다.
공식적인 중재판결이 나오는 경우가 적다는 지적도 나온다. 레몬법이 시행된 지 4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까지 끝까지 교환·환불 판정 결과를 다툰 사례는 160건(교환·환불 10건, 기각 150건)이다. 같은 기간 처리된 총 1684건의 9.5%에 그친다. 이유는 공식적인 교환·환불 중재판결이 나오기 전에 제조사와 소비자가 합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식 판정 사례가 남는 것이 부담스러운 제조사들이 소비자에게 더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신차로 교환해주거나 환불을 해주면, 소비자는 중재 신청을 취하하는 식이다. 올 8월까지 판정 전에 합의됐다는 이유로 신청을 취하한 사례는 213건에 이른다.
한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제조사들이 합의 판정에서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걸로 예상되면 합의를 제안한다. 소비자는 시간이 지나 화가 풀린 상태이기도 하고,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제조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중재판결을 끝까지 받은 160건은 제조사의 부당한 대우에 크게 실망해 끝까지 가보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경우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중재판결 전이라도 합의에 이르렀으니 제도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소관 부처인 국토교통부도 지난해 12월 낸 설명자료에서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교환·환불 역시 개별차량의 반복된 하자에 대한 시정이란 측면에서 중재판정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도 밖에서 이뤄진 합의여서 하자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제조사와 소비자가 합의한 213건의 경우, 어떤 하자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셈이다.
교환·환불 10건도 어떤 하자였는지 공개되지 않는다. 중재 판정서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아서다. 관련 법 조항을 마련할 때 “판정서 공개 시 부작용이 크다”는 자동차 업계의 의견이 반영됐다. 당시 완성차 업체들의 의견을 취합해 전달하는 일에 관여했던 한 완성차 회사 관계자는 “당시 국토부가 중재 내용을 공개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완성차 업체들은 기밀이 유출될 수 있고, 블랙컨슈머 등에게 악용될 소지가 너무 크다는 논리로 방어했고, 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며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이케아의 365일 환불 정책이 악용되는 사례를 제시했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들은 소송이 아닌, 비공개가 원칙인 중재 절차여서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다른 중재 절차에서는 판정서 공개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과 기업 간 분쟁을 중재하는 대한상사중재원도 개인정보 등을 제외한 중재 사례를 상세하게 공개한다.
주무부처인 국토부는 공식적인 중재 제도 밖에서 합의가 이뤄지는 문제를 없애기 위해 중재 전 조정 과정을 마련하고 판정서를 공개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할 계획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조정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소비자원과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하고 있고, 개인정보 등을 삭제하고 판정 사례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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