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늘 푸른 섬이다. 초겨울 추위에 전국 산과 들판이 움츠러든 지금도, 제주도는 을씨년스런 구석 하나 없이 푸르다. 주황빛 보석들을 품고 삼나무 방풍림의 호위를 받는 감귤밭이 싱그럽고, 산자락으로 내리 뻗은 녹차밭·억새밭·비자나무숲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바닷가를 수놓은 동백나무숲·유채꽃밭은 아예 봄빛이다.
더 푸르기로는 사철 청청한 난대성 숲이다. 올겨울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면, 드라이브 길에 한라산 서쪽 자락 북제주군 애월읍 납읍리에 잠시 들러 상록 원시림 산책을 즐겨볼 만하다. 천천히 40분 안팎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평탄하고 아담한 숲길이다. 그러나 그 감동은 훨씬 크고 진하게 다가오는, 오래 머물고 싶은 울울창창한 숲이다.
종가시나무 팽나무 후박나무
하늘 덮고 빽빽히 우거진 비단숲
600m 흙길 느릿느릿 걷다가
나도 슬며시 마음의 뿌리 내리고…
납읍초등학교 앞에 차를 대면 산쪽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열려 있다. ‘금산(錦山)공원’으로도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375호 ‘납읍 난대림지대’다. 계단을 몇 개 오르면 곧바로 빽빽하게 우거진 숲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정면으로 흙길이 뻗어 있고, 좌우로는 나무판자를 깔고 난간을 댄 탐방로가 숲 사이로 굽이굽이 몸을 틀며 이어진다. 오른쪽 나무계단을 오르면 한굽이 돌아 흙길과 만나고, 왼쪽 계단을 오르면 제단을 거쳐 다시 흙길과 만나게 된다.
어느 쪽으로 돌아도 덩굴식물이 두툼하게 감고 올라간 종가시나무(참나무과)와 팽나무·푸조나무(느릅나무과), 후박나무 들이 하늘을 가린 채 우거져 있다. 2만여평 넓이의 이 숲에는 난대성 수목 60여종 등 15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조성된 산책로는 600m 가량. 너무 짧아 아쉬움이 남는 길이다.
지난 26일 가족과 함께 숲을 찾은 오대영(40·제주시 노형동)씨가 아름드리 후박나무 밑에서 어두컴컴한 숲을 둘러보며 말했다. “숲이 워낙 아름답고, 산행 부담도 없이 편하게 깊은 산속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아이들 데리고 가끔씩 들르지요.”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숲은 더더욱 멋진 경치를 보여 준다”고 한다. 지금 이 숲길엔 솔잎·참나무잎들이 쌓여가고, 햇살은 그만큼씩 옅어지는 숲을 비집고 들어와 그윽한 눈길을 던지고 있다.
숲의 훼손을 막으려고 만든 나무탐방로가 오히려 숲 경관을 해치는 듯하기도 하지만, 오래도록 숲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건 두말 할나위가 없다. 산책로는 외지 탐방객이 늘면서 숲 훼손이 우려되자,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설치했다. 송석대·인상정 등 정자도 만들어져 있어 쉬며 둘러볼 수 있다.
납읍리 주민들의 숲 사랑은 마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다.
숲길 안쪽엔 마을 제사를 올리는 ‘포제단(고사지낼 포 酉+甫 祭壇)’이 남아 있다. 제주도의 동제엔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마을제사인 포제와, 여성들이 주관하는 무속식 마을제사인 당굿이 병존해 온다. 전통 유림촌인 납읍리에선 유교의 영향으로 포제를 지낸다고 한다. 수백년 묵은 소나무와 후박나무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포제단엔, 포신(인물·재해를 다스리는 신)과 토신(마을 수호신), 서신(홍역·마마 신) 신위를 모신 세 개의 돌제단이 있다. 여기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제를 올린다. 본디 음력 정월의 봄제사와 음력 칠월의 가을제사로 나눠 한 해에 두번 제사를 지냈는데, 30여년 전 가을제사를 폐지하고 요즘은 봄제사만 지낸다. 납읍리 마을제는 도 무형문화재다.
이 숲과 마을에 얽힌 이야기 몇 개. 이곳은 본디 주민의 사사로운 출입을 막던 ‘금산(禁山)’이었다. 이 산을 신성시해 가축 방목은 물론 나뭇가지 하나, 낙엽 한 줌 긁지 못하게 했던 곳이다. 이런 전통은 마을 ‘향약’에 따라 400년 이상 지켜져 오다, 숲이 울창하고 아름다워지자 50여년 전 ‘비단 금’자를 쓰기로 하고 금산(錦山)으로 고쳤다고 한다.
‘납읍(納邑)’은 큰 고을을 들일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전엔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많아 과납(科納)으로 불렀다고 한다. 납읍리 노인학교 김순현(76) 회장은 “1600년대 부임한 제주 목사가 이곳을 지나다 땅의 지세가 좋다 하여 납읍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숲의 유래는 우리 마을이 처음 들어서던 130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고 말했다.
이 매혹적인 숲은 납읍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자연관찰원’이기도 하다. 이 학교를 거쳐간 아이들은 대대로 이 숲에서 뛰놀며, 학교 본관 앞에 걸린 현수막 글귀처럼 ‘꿈과 사랑이 영그는’ 시절을 보냈으리라.
애월(제주도)/글·사진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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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느라 먹느라…감귤체험 바쁘다
남제주군 남원읍 하례리 농업생태원 안의 감귤밭.
지금 제주도에선 감귤 수확이 한창이다. 산기슭에도 길옆에도, 삼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감귤나무들이 눈 시리게 도드라져 보이는 주황빛 감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특히 남제주군 쪽은 보이는 밭들의 다 감귤밭으로 여겨질 정도로 깔려 있다. 전국 감귤 생산량의 42%가 남제주군에서 난다. 제주도 4개 시·군 중 최대 생산지다.
남원읍 하례리 농업생태원은 온 가족이 감귤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며 한나절쯤 지낼 수 있는 농촌체험장이다. 온갖 종류의 감귤들을 살펴보며 감귤의 역사와 품종 등을 공부한 뒤 무농약 재배한 감귤체험장에서 직접 감귤을 딸 수 있다. 1인당 2000원을 내면 딴 귤을 1.5㎏까지 가져가게 한다. 단체로 미리 예약하면 감귤 염색 체험, 잼·주스 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다.
전망탑을 향해 미로를 찾아 들어가는 미로원, 감귤 재배 역사와 품종을 살펴보고 감귤과 감귤염색 제품 등을 살 수 있는 감귤판매전시관, 녹차 제다교육장 등도 둘러볼 만하다. 생태늪·인공폭포·잔디썰매장도 갖췄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국내외 76품종에 이르는, 감귤나무들을 전시한 품종별 유리온실이다. 4개의 대형 유리온실에 당유자·한라봉·레몬·팔삭·하귤 등 크고 작은 감귤류가 저마다 빛깔 고운 결실을 매달고 전시돼 있다.
감귤은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인 온주밀감과 한라봉·진지향 등이 속한 만감류가 있고 레몬·팔삭 등의 기타감귤, 당유자·진귤·병귤 등의 재래감귤로 나뉜다. 일남·흥진·대포 등이 온주밀감에 속하는 품종이다. 11월~1월은 조생종 온주밀감이 제철이다. 일반 노지 온주밀감은 12월말이면 대부분 수확이 마무리되는데, 농업생태원에선 체험객들을 위해 1월말까지 감귤 따기 등 체험행사를 벌일 계획이다.
12월23~25일엔 농업생태원에서 제3회 최남단 감귤농장 체험축제가 벌어진다. 도전 귤 따기, 감귤 잼·주스 만들기, 맛있는 귤 고르기, 귤 나르기, 감귤 스카프 염색 등 다채로운 감귤 관련 체험행사가 펼쳐진다. 남제주군 농업기술센터 (064)732-1558.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