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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여가

꼭 가봐야 할 숨은 보석 같은 여행지…여기가 ‘지상낙원’

등록 2015-03-05 15:28수정 2015-03-05 15:46

히피 청년 한대수는 “아하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춘다면”이라고 〈행복의 나라로〉에서 노래했다. 꼬끄라단의 바다를 보면서 햇살에 취하다보면 떠오르는 가사다. 신윤동욱 기자
히피 청년 한대수는 “아하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춘다면”이라고 〈행복의 나라로〉에서 노래했다. 꼬끄라단의 바다를 보면서 햇살에 취하다보면 떠오르는 가사다. 신윤동욱 기자
[한겨레21]
관광객들의 발길 아직 많이 닿지 않은
타이·인도네시아·필리핀의 여행지
1년 내내 멀지 않은 곳에서
건기의 아시아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건 특권
‘겨울 푸껫, 여름 발리’.

아시아의 바다를 여행하는 정석이다. 타이 푸껫은 겨울이 건기고, 인도네시아 발리는 여름이 건기다. 건기와 우기는 단순히 비가 오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바다가 오히려 문제다. 비가 와도 바다에 들어갈 수 있지만, 파도가 높으면 어렵다. 같은 해변도 얼굴이 다르다. 건기에 고요했던 바다가 우기에 성난 얼굴로 변한다. 물빛도 완전히 다르다. 수영장에 머물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면, 되도록 건기에 가는 것이 좋다. 한국 여행자들에게는 ‘다행히’ 인도양 계절풍 영향을 받는 타이 안다만과 태평양 계절풍 영향권에 있는 발리는 우기와 건기가 반대에 가깝다.

멈추라는 곳에서 조금 멀리 갈 것

안다만의 겨울은 황금의 날씨다. 사실 일기예보를 볼 필요도 없다. 최저기온 28℃, 최고기온 32℃를 규칙처럼 유지한다. 습도가 20% 이하인 덕분에 불쾌지수가 2% 이하다. 안다만 외딴섬 건기의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바람이 고요한 밤에는 아무런 공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진공상태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발리의 여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행기로 5~6시간 걸리는 곳에서, 1년 내내 건기의 바다를 즐길 특권은 아시아인의 것이다. 유럽의 겨울에 30℃ 이상 따듯한 수온을 가진 바다를 가려면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한다. 동서남북 둘러봐도 겨울에 따뜻한 기온과 수온을 가진 곳을 찾기 어렵다. 아프리카 셰이셀, 모리셔스 같은 곳이 있지만 몰디브처럼 ‘너무’ 비싸다. 동남아시아에 사시사철 유럽인들이 넘치는 이유다. 비행기 삯을 빼고도 남을 만큼 물가도 저렴하다. 물론 건기의 비싼 물가를 피해서 우기에 여행하는 이도 있다.

아시아의 바다를 여행하는 첫 번째 팁은 ‘자본이 멈추라는 곳에서 조금 멀리 가라’이다. 타이 푸껫, 필리핀 세부, 인도네시아 발리 등에는 해변을 따라 리조트가 즐비하다. 여행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산업이 됐다. 지어진 리조트의 객실을 메우기 위해 고객을 모셔올 미션이 여행사와 리조트에 있다. 되도록 많이, 최대한 오래, 여행자가 이곳에 머물러야 리조트의 이윤이 창출된다. 여기엔 좋은 수영장과 안락한 객실이 있다. 여행은 자본과 벌이는 일종의 게임이다. 자본이 정해놓은 루트를 완전히 피해가진 못하지만 최대한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최대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흥미진진한 게임이다. 대자본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지 않으면 천국의 바다에 이른다.

설 연휴 타이의 건기는 절정에 이른다. 바람이 착하게 분다면 대기가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느낌마저 든다. 2015년 2월, 꼬끄라단의 물빛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몰디브 랑갈리섬을 두 번 가본 어머니는 “어떤 면에선 여기가 더 좋다”고 극찬했다. 아시아 해변 여행지는 몰디브를 이상향으로 삼는다. 그래서 ‘타이의 몰디브’ ‘필리핀의 몰디브’ 같은 이름을 자처하는 지역이 숱하다. 꼬끄라단의 바닷빛은 몰디브에 버금갔다. 산호 군락이 절벽을 이루는 지형(Drop Off)을 경계로 해변에 가까운 쪽은 연두색이 층층이 변하며 물결을 이루고, 그 바깥은 검푸른 코발트색 바다가 고요했다. 멀리 섬들과 산들은 병풍처럼 바다를 감싸안아서 망망대해에 호수 같은 안정감을 선물한다.

자본이 가리키는 방향인 푸껫을 벗어나 말레이 반도 남부로 가면 숨겨진 보물이 있다. 푸껫을 마주 보는 끄라비에서 2시간을 차로 가면 뜨랑에 이른다. 푸껫을 경유할 필요도 없다. 방콕에서 녹에어(Nok Air), 에어아시아(Air Asia)가 40~50분이면 뜨랑으로 연결한다. 푸껫이나 끄라비에 비해 승객이 적어서 항공료도 대부분 저렴하다. 프로모션 타이밍을 맞추면 수하물을 부치는 비용까지 더해도 4만원이면 항공권을 손에 쥔다. 녹에어는 안다만섬들을 잇는 타이거라인 페리(Tigerline Ferry)와 연계해 방콕에서 남부의 섬들까지 이르는 항공과 배편을 패키지로 판다. 뜨랑에서 꼬끄라단까지 가는 차량과 배편을 따로 예약하면 편도 2만원 정도가 든다. 방콕에서 꼬끄라단까지 5시간이 걸리지만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갈 만한 가치가 있다.

외딴섬에는 대형 리조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형 리조트 자본이 수익을 낼 만한 규모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외딴섬일수록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에서 머물 가능성이 많아진다. 여행자의 지출이 현지인의 수입이 되는 공정여행에 한 걸음 다가선다. ‘프라이빗’(Private·사설)이라는 영어처럼 사악한 단어도 없다. 이곳은 우리 리조트의 소유니 들어오지 말라는 ‘출입금지’ 뜻이 되기 때문이다. 타이의 꼬끄라단, 꼬리뻬, 꼬응아이 같은 섬에는 ‘프라이빗’ 해변이 별로 없다. 20만원짜리 리조트에 있든, 2만원짜리 방갈로에 머물든 해변은 모두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는 사실이 있다. 며칠이 지나고, ‘여기서 흑인을 한 명도 못 봤네’. 심지어 아시아의 아름다운 외딴섬에도 백인들이 넘친다. 지나는 사람만 보면 ‘여기가 이탈리아야, 타이야’ 탄식할 정도다.

인간과 자본은 섬을 망치고

꼬끄라단의 절반은 해상국립공원이다. 꼬수린, 꼬시밀란, 꼬록 같은 타이 해상국립공원의 숙소는 텐트가 기본이다. 해변에 맞닿은 산호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다. 이런 섬들은 건기인 11월부터 4월까지만 여행자의 출입을 허용한다. 꼬끄라단의 남쪽은 국립공원이라 텐트를 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꼬끄라단에서 보낸 사흘째, 텐트에서 생활하는 슈나이처(68)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독일인 슈나이처 할아버지는 “8번째 방문”이라고 말했다. 은퇴한 그는 겨울을 동남아에서 지낸다. 텐트 대여료는 1박에 300밧, 1만원 수준이다. 슈나이처 할아버지는 꼬끄라단에서 보름을 머문다고 했다. 안다만을 거점으로 삼아 섬에서 섬으로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보통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 이 섬 저 섬을 돌며 스노클링을 즐기고 저녁에 돌아오는 하루 투어를 말한다)을 하며 네댓 달을 보낸다. 올해는 꼬리뻬~꼬끄라단~꼬응아이 순서로 다닌다. 그는 “꼬리뻬의 선셋비치를 가장 좋아하는데 럭셔리 리조트를 지으며 망가졌다”며 안타까워했다. 나무는 잘리고 해변은 파헤쳐졌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낙원(Lost Paradise)을 잃었다. 그처럼 늦기 전에 가야 할 이유다. 인간은 섬을 망치며 다닌다. 예전에 피피가 그랬고, 지금은 꼬리뻬가 그렇다.

그는 말레이시아 시파단, 필리핀 아포 등 산호가 절경인 섬들로 주유한다. 1990년대부터 타이를 다녔단 그는 “쓰나미 직후인 1월에 타이에 와서” 피해를 피했다. 쓰나미가 파괴한 자리는 자본에 기회였다. 폐허 위에 자본은 비싼 숙소를 지었다. 그는 “쓰나미 전에 피피섬에서 300밧이면 숙소를 구했지만 지금은 600밧도 어렵다”고 탄식했다. 그에게 타이에서 수중 환경이 가장 좋은 꼬수린에는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꼬시밀란과 꼬수린에서는 낮에도 쥐들이 텐트 앞으로 지나다녀서 쫓기도 어렵다”며 웃었다. 이번 여행에 꼬수린이 아니라 꼬끄라단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배낭여행자가 아닌 중년의 기자와 칠순의 노모는 텐트 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다. 여기에 언급된 여행지는 트렁크를 끌고 가는 당신을 위한 곳이다.

타이 뜨랑의 핫야오 부두에서 섬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기는 꼬리뻬, 꼬묵, 꼬응아이, 꼬끄라단, 꼬란타, 꼬피피 등으로 가는 안다만 루트의 거점이다. 신윤동욱 기자
타이 뜨랑의 핫야오 부두에서 섬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기는 꼬리뻬, 꼬묵, 꼬응아이, 꼬끄라단, 꼬란타, 꼬피피 등으로 가는 안다만 루트의 거점이다. 신윤동욱 기자

꼬끄라단 남쪽 국립해상공원의 텐트는 1박에 300밧, 콘크리트 건물의 방은 600밧이다.  신윤동욱 기자
꼬끄라단 남쪽 국립해상공원의 텐트는 1박에 300밧, 콘크리트 건물의 방은 600밧이다. 신윤동욱 기자

슈나이처 할아버지는 2월23일 꼬응아이로 떠났다. 이곳은 기자가 3년 전 머문 적이 있다. 당시 여기서 보트투어로 꼬끄라단에 왔다가 물빛과 풍광에 반해 오게 된 것이다. 배를 타고 나가지 않고 섬의 해변 바로 앞에서 산호를 볼 수 있는 바다가 타이에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꼬끄라단은 텐트가 아닌 집에 머물면서 비치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는 아주 드문 섬이다. 하루 7만원짜리 꼬끄라단 방갈로의 행복이 몰디브 100만원짜리 수상가옥의 즐거움에 별로 뒤지지 않았다.

역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역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섬도 작을수록 아름답다. 인적이 드문 작은 섬에는 아름다운 산호와 형형색색 물고기가 있다. 일단 그런 곳에 가면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동네를 살핀다.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시간이 동네 지도를 머리에 그리는 시간이 된다. 그러면 여행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 같은 곳에서 글로 보았던 정보가 실물로 보인다. 거기에 없는 정보도 보인다. 사람이 많은 식당이 어딘지, 배편의 종류와 가격은 얼마인지, 여전히 웹에는 없는 정보가 손에 잡힌다. 더구나 섬을 돌면서 스노클링을 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른다. 꼬끄라단에서도 스노클링을 하다가 니에앙이라는 해변을 발견했다. 바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해변은 한없이 고요했고 한적했다. 백사장 뒤에는 식당을 겸한 숙소도 있었다. 썰물이면 꼬끄라단 해변과 끊기고 밀물이면 이어지는 곳으로 어머니를 불러서 식사를 했다. 이렇게 고립된 해변에 있는 식당이 맛도 좋고 가격도 싸다. 순박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타이 음식을 주문하자 가정식같이 순한 음식이 나왔다. 배낭여행자가 다수인 작은 섬은 유명 관광지보다 물가도 싸다. 꼬끄라단 해변의 뒤쪽은 정글이 울창한 산이다. 섬의 중간에 위치한 ‘파라다이스 로스트’(Paradise Lost) 리조트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 산림욕은 덤으로 따라온다. 컴컴한 저녁에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면 별들이 쏟아진다. 깊숙이, 더 깊숙이 가면 더 고요한 풍요가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가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2012년 9월, 필리핀 엘니도에서 만난 리조트 주인장 할아버지는 “배를 빌려 반대로 가보라”고 말했다. 엘니도 타운엔 고운 모래 해변이 없다. 대신 배를 타고 나가면 만나는 카르스트지형이 절경이다. 수중 환경도 ‘필리핀의 몰디브’라고 자랑할 정도로 뛰어나다. 이곳 여행자들은 아침마다 보트투어를 나간다. A코스, B코스, C코스의 투어가 있는데 가격이 놀랄 만큼 저렴하다. 지불한 비용이 미안할 정도로 맛있는 점심도 나온다. 선원들이 직접 구워주는 생선과 신선한 과일은 꿀맛이었다. 가톨릭 국가답게 무인도에 버려진 수도원도 있었다. 엘니도는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닿는 팔라완의 주도 푸에르토프린세사를 거쳐간다. 푸에르토프린세사에서 출발한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포함해 5시간을 달려 엘니도에 이른다. 피곤한 여정이지만 주변 풍광이 이동을 여행으로 만든다. 울창한 밀림이 좌우로 펼쳐지고 아름다운 해변이 가끔씩 얼굴을 내민다. 빈한한 마을이 이어지는데 대나무와 야자수가 얼마나 유용한 나무인지 깨닫게 된다. 야자수로 엮은 지붕에 대나무로 지은 2층집도 보인다. 엘니도 앞바다 섬들은 무척 아름답지만 몇 척의 배가 한꺼번에 사람들을 내리면 아름다움이 훼손된다. 리조트 할아버지의 말처럼 가족 단위로 여행한다면 배를 따로 빌려 단체관광객을 태운 배가 다니는 반대 방향으로 섬들을 돌면 더욱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나온다. 같은 장소도 사람의 수에 따라 때로 시시한 풍경이 되고, 때로 천국이 된다.

“바다는 필리핀이죠”

팔라완의 아름다움에 반해 2012년 12월, 다시 코론으로 떠났다. 팔라완 북부의 코론은 엘니도에서 작은 배로 6~7시간 정도면 이르는 곳이다. 코론은 엘니도에 비해 가기가 쉽다. 마닐라에서 부수앙가 공항으로 1시간, 공항에서 마을까지 20~30분 미니버스를 타면 도착한다. 엘니도보다 코스가 다양한 이곳의 투어는 엘니도만큼 좋았다. 이곳의 장점은 여행자 거리와 현지인 마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숙소에서 나가면 바로 시장이 있고, 학교가 나온다. 당시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때였다. 투어를 다녀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마을 광장에 꼬마들이 모여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없는 동네에서 초등학생들은 그렇게 스크린 앞에 모여 놀았다. 이들의 옆에선 중고생 형들이 크리스마스에 선보일 춤을 연습했다. 시장에서 국수를 먹다가 동네 사람과 겸상도 한다. 테이블이 한두 개뿐인 국숫집에서 마주 앉은 여고생들에게 괜스레 “수영 잘하느냐” 묻게 된다. 1천원만 내면 초대형 사이즈로 주는 망고셰이크를 밤마다 먹다가 찬 기운이 쌓여서 배탈도 난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시장에선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왔고, 꼬마들은 말춤을 췄다. 부수앙가 공항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무상지원해 지은 건물이다. 뜻밖의 섬에서 한국과 연결된 아시아를 만나게 된다.

“바다는 필리핀이죠.” 누군가 “어디가 좋으냐”고 물으면 농담처럼 답하지만 진담이다. 그만큼 필리핀 바다의 수중 환경은 뛰어나다. 문제는 태풍이다. 건기의 평온함을 만끽하러 12월에 코론에 갔다. 도착한 다음날 숙소 주인이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다. “나흘 뒤”라고 했더니 “대형 태풍이 오고 있다”는 예상치 않은 말을 했다. ‘12월 태풍’이라니 동북인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나 하루이틀 지나자 날씨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출발일 공항에 가는데 비바람이 거세졌다. 한국의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부수앙가 공항은 이륙하는 비행기가 탑승자 대기실 유리문 너머로 한눈에 보였다. 다행히 발권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렸지만, 승객들의 초조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출발 예정 20분을 앞두고 방송이 나왔다. “캔슬”(취소)이라는 말이 들렸다. 여기서 비행기를 못 타면 마닐라에서 인천으로 가는 항공편도 놓칠 상황이었다. 머리를 움켜잡고 절망하는 순간 확인차 옆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취소된 거죠?” 했더니 그가 “네 비행기가 뭐냐?”고 되물었다. 항공편명을 말하자 그는 웃으며 “다음 비행기가 취소된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 뒤 우리가 탈 비행기가 저 멀리 하늘에 나타나자 기다리던 이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타이에는 없지만 필리핀에는 태풍이라는 여행의 변수가 있다.

필리핀 엘니도 부두에 아침이면 ‘방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타이에서 ‘롱테일보트’라고 부르는 통통배를 타고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물속과 경이로운 지형을 보러 나선다. 위키미디어
필리핀 엘니도 부두에 아침이면 ‘방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타이에서 ‘롱테일보트’라고 부르는 통통배를 타고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물속과 경이로운 지형을 보러 나선다. 위키미디어
발리는 절반은 세상 눈치를 보느라 갔다. “타이만 가니?” 모두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동남아에서 가장 ‘고급진’ 휴양지 발리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발리는 바다가 좋지 않다는 평가를 숱하게 보아서, 스노클링이 가능한 섬을 찾아갈 궁리를 했다. 대형 리조트가 밀집한 발리 서쪽에서 차로 2시간, 배로 2시간을 가면 길리가 나온다. 롬복에 가까운 섬이다. 사실 발리가 아니라 길리에 가고 싶어서 발리에 갔다. 그곳은 해변 스노클링을 해도 거북이가 지나간다는 섬이다. 발리에서 길리까지 배편으로 2시간이 걸리지만 두 섬의 지배적인 종교는 완전히 다르다. 힌두의 섬에서 무슬림의 땅으로 변하는 것이다. 보트에서 본 길리의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우기가 시작된 그곳의 바다는 기대한 물빛이 아니었다. 기대를 접고 들어간 바다엔 정말로 거북이가 여기저기 있었고, 어종도 다양했다. 특히 빨려들 듯 검붉은 석양은 아름답다 못해 무서웠다. 사실 길리는 길리 트라왕간, 길리 메노, 길리 아이르가 나란히 이어진 세 개의 섬이다. 다음에 간다면 가장 큰 섬인 트라왕간이 아니라 메노의 3만원짜리 방갈로에 머물겠다. 그런 숙소도 가보고 알았다. 그렇게 저렴한 천국은 발품을 팔아야 보인다.

발리 말고 ‘길리’

발리에서 하루 동안 고용한 현지인 가이드는 한국어가 능통했다. “형님, 형님” 하면서 여행지 설명도 능했다. 그렇게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지만 그는 한국어 학원도 다닌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인 여행사에서 일하며 배운 한국어다. 언젠가 희망은 한국에 가보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의 숭고함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익힌 언어로 아들과 아내의 생계를 꾸린다. 길리 트라왕간의 어느 저녁 동네 마실을 도는데, 식당에서 분명히 돼지로 보이는 고기를 굽고 있었다. 여기는 무슬림 섬이다. 눈이 의심스러워 “돼지고기냐?”고 묻자 고기를 굽던 그는 “그렇다”고 했다. 다시 “무슬림 아니냐?”고 묻자 그는 슬쩍 미소를 보였다. 이렇게 반가운 세속적인 무슬림이라니, 먹고사는 일의 숭고함은 종교적 순결을 넘어선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바다도, 육지도 그렇다. 산호가 가장 아름다운 지형은 해변에서 시작된 산호가 절벽을 이루며 떨어지는 곳이다. 산호의 성벽에 사는 물고기 떼도 장관을 만든다. 육지도 다르지 않다. 지난 2월24일, 꼬끄라단에서 푸껫으로 나오는 길은 멀었다. 뜨랑에서 푸껫으로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차창 너머로 말레이반도의 역사가 스쳤다. 타이 남부에는 무슬림이 많다. 뜨랑에서 끄라비를 거쳐 푸껫에 이르는 버스에 히잡을 쓴 여성이 자주 탔다. 차창 밖에는 중국계 타이인들이 춘절을 맞아 가게마다 걸어놓은 홍등이 즐비했다. 타이식 불교사원, 중국식 도교사원, 이슬람 모스크가 번갈아 스쳐갔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도망간 곳도 섬이다. 피피섬 현지인 마을의 중심엔 모스크가 있다. 육지에서 불교도에 밀려난 무슬림들이 안다만섬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차창에 스치는 풍경이 켜켜이 쌓여온 역사의 풍경이 된다.

싸우고 떠나고 만나고

푸껫은 말레이어로 ‘언덕’이라는 뜻이다. 지명에서 보듯이 타이 남부는 말레이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제국주의 시대 주석 광산 노동자 등으로 이주해온 중국인의 후손도 적잖게 산다. 어쩌면 뜨랑은 불교와 한자로 상징되는 ‘우리의’ 동아시아 세계가 끝나는 경계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슬람이 주도적인 핫야이가 나오고, 무슬림 반군이 분리독립 투쟁을 벌이는 혼란의 지역에 이른다. 필리핀 팔라완도 남부의 이슬람, 북부의 가톨릭 문화가 경계를 이룬다. 팔라완은 코론과 엘니도가 속한 북부는 여행이 가능하지만, 푸에르토프린세사 이남은 한국 외교부가 철수 권고를 내린 곳이다. 발리와 길리(혹은 롬복) 사이의 바다도 힌두와 이슬람 문화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역에서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는 싸우고 떠나고 만났다. 혹시나 일주일 휴가를 간다면, 경계 너머의 세계로 가보라. 그곳에 숨막히는 아시아의 바다와 역사가 있다.

꼬끄라단(타이)·팔라완(필리핀)·길리(인도네시아)=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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