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천변에 있는 이 자동차 극장에서는 두 개의 스크린에서 영화 2편이 동시 상영된다. 야외의 스크린은 서울의 밤하늘을 영화관의 지붕으로 둔갑시킨다.
그래도 한국이 미국보다 자전거타기에 좋은 이유
차도를 달릴 때 ‘욕’ 대신 ‘경적’ 울리고
인도를 갈 땐 ‘꺼져버리란’ 시선 대신 ‘인도 같이 쓰잔’ 표정
심성 고운 보행자가 놀랄까봐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차도를 달릴 때 ‘욕’ 대신 ‘경적’ 울리고
인도를 갈 땐 ‘꺼져버리란’ 시선 대신 ‘인도 같이 쓰잔’ 표정
심성 고운 보행자가 놀랄까봐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홍은택의 ‘서울 자전거 여행’ ③ 자전거로 퇴근한 첫날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 반이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맞이하는 아내의 얼굴에서 굳이 여행자의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상기할 필요 없이 긴 여행을 다녀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뿌듯했고 고단했다. 출근할 때는 1시간50분이 걸렸는데 퇴근할 때는 더 걸렸다. 2시간 반. 하루 출퇴근에 4시간20분을 쓴 것이다. 사실 미국 여행할 때 하루 평균 7, 8시간씩 달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중간 일과시간 12시간 가까이 주행 안 한 것도 감안하면 체력적으로 문제돼서는 안 되는 소요시간이다. 그런데 밤에 속도가 한참 처진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야간 주행에는 시야가 줄어들어서 아무래도 쭉쭉 페달을 밟아 나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대모산 자락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 오르막이라는 지형적 요인도 있다. 무엇보다 아직 사무실에 갇혀서 일하는 게 쉽지 않아 심신이 지친 탓이다. 샤워를 하고 혼절하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시 아침에 자전거를 끌고 현관을 나서면서 이렇게 얼마나 오래 통근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그래도 밤에 달리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서울 밤의 질감은 겨울에도 차갑지 않다. 불빛의 향연으로 잠들지 않는 도시. 불빛을 자전거로 휘감으며 달릴 때는 서울이 몽환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불빛이 다행히 도시의 매연과 미세 먼지까지 노출할 정도로 밝지는 않다. 한강에는 검은 물이 흐른다. 강변도로의 가로등 행렬과 가까운 강변에서부터 무수한 은박지들이 반짝이며 떼밀려 흐르다 강심에서 하나 둘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대도시에서 이 정도 공간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어둠은 불필요한 디테일들을 과감히 생략하는 시인이다. 서울의 밤, 디테일 생략하는 시인
인도로 달리는 내게는 찻길이 한강의 세찬 지류처럼 보인다. 양쪽으로 교행하는 차들의 강. 강가에 살짝 발을 담갔다가 물살에 휩쓸려 갈 것 같아 바로 발을 빼버린다. 그냥 아침에 온 길을 되짚어 인도로만 갔다는 뜻이다. 마치 바닷가에서 수영을 배울 때와 같다. 발이 땅에 닿는 곳까지만 수영하려 한다. 그러다 물결을 탈 줄 알게 되면 점차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아직은 물결이 익숙지 않다. 발이 땅에 닿는 곳, 인도로만 간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갈월 교차로에서는 후암동쪽으로 가는 길에 아예 횡단보도가 없다. 지하도로 자전거를 들고 가야 한다. 이 구간은 그래서 그냥 차도로 내려서 건너곤 했다. 신호등은 때론 마술을 부린다. 그렇게 많이 오고가는 교통의 물살도, 삼각파도도, 한 순간에 멈춘다. 내가 가는 방향에서는 정지 신호가 직진 신호로 바뀌기 전, 교차하는 쪽에서는 직진 신호가 정지 신호로 이미 바뀐 바로 그 순간이다. 모든 차가 멈춰 일시적으로 도로 광장이 조성된다. 자전거가 그 틈을 타 서둘러 출발하다가는 급물살에 휩쓸려 바위에 부딪히는 카약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만다. 이 순간에 가속해서 직진하려는, 또는 좌회전하려는, 교행 자동차가 꼭 한 두대가 있다. 사거리마다 통계를 내본다면 그 결과는 거의 90%의 확률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신호등만 보이지, 자전거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사냥으로 비유한다면 신호등의 짧은 공백은 덫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급가속하는 차량들은 표범과 같은 맹수고 자전거는 전후 좌우를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은 토끼다. 빨리 사거리를 건너고 싶은 생각에 그 진공의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지고 그래서 급출발하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면 바보다. 다름 아닌 나였다. 몇번 서둘러 건너려다 차에 받힐 위기를 모면한 뒤 충동을 억제하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어디가 자전거 타기에 좋은지에 관해 한국에서 자전거를 타는 미국인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나는 한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크게 자신있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니 양국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 운전자들은 경적을 많이 울리는 반면 미국 운전자들은 욕을 한다. 물론 둘 다 전체 인구로 보면 소수겠지만 비율로 놓고 보면 한국이 더 높은 게 사실이다. 성정이 포악해서라기보다는 아직도 민족의 DNA에 새겨져 있는 피란민 정서와 압축성장으로 내면화된 급행문화에 사로잡혀 무조건 빨리 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경적보다는 욕설이 더욱 기분 나쁘다. 미국의 운전자들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거나 차창을 열어 “길에서 꺼져 이 똥구멍아” 같은 욕을 퍼붓는다. 한국은 차 안에서 더 심한 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겉으로는 들리는 것은 경적의 기계음일 뿐이다. 그것도 과히 듣기 좋은 것은 아니다. 도시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경적이 자주 울리는 도시는 짜증이 많은 사람과 같다. 차의 경적에 대한 라이더의 대응은 두가지다. 가만히 있거나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나는 후자에 가깝지만 소리 지르고 나서는 바로 후회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보행자의 태도다. 미국 보행자들 중 일부는 운전자들처럼 전투적이다. 인도에서 꺼지라고 소리친다. 곱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은 더욱 많다. 차도로 가면 차도에서 꺼지라는 얘기를 듣는데 이를 어쩌지? 초보 라이더들은 어쩔 줄 모른다. 한국의 보행자들은 자전거가 인도로 다니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어서 가시라고 길을 비켜주기까지 한다. 혼잡한 광화문의 인도를 자전거 타고 가도 째려보는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다. 뒤에서 다가가 추월하면 “음, 자전거가 우리보다 빠르니까 먼저 가야겠지” 하는 표정들이다. 너그럽기 이를 데 없는 게 인도에는 자전거뿐 아니라 각종 배달 오토바이들도 다닌다. 보행권에 대한 인식이 약해서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만 “차도가 위험하지? 이리 와. 인도 같이 쓰자”와 같은 따뜻한 마음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건널목 급출발하려다 ‘악~’
서울에서 자전거는 자동차보다 열등한 존재다. 차도에서 환영받지 못해 보도로 보통 가지만 그것은 도로교통법 위반이다. 사진은 동호대교 북단 주변 강변도로 밑 한강 자전거 도로에서 촬영한 것이다.
홍은택/<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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