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울 회현동 지하 쇼핑센터에 위치한 리빙사 앞에 엘피가 전시돼있는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나만의 색다른 추석 연휴를 원한다면 엘피(LP) 입문을 강추한다. 축음기(SP), 도넛판인 이피(EP), 엘피로 개량을 거듭하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음악 저장 및 재생 수단으로 각광받던 엘피는 1990년대 중반 시디(CD)에 밀려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스트리밍 등 디지털 음원이 대세인 21세기에 다시 힙한 문화로 부활했다. 1970~80년대를 추억하는 중장년 사이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엘피는 어느새 엠제트(MZ) 세대까지 사로잡고 있다. ‘마장뮤직 앤 픽처스’ 등 엘피 생산업체가 새로 문을 열고 신중현과 엽전들, 양병집, 김정미, 김추자, 김광석 등 그 시절 명반을 다시 찍어낸다. 싸이, 아이유, 잔나비뿐 아니라 방탄소년단(BTS)도 엘피 음반을 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일타 스캔들’, ‘슬기로운 의사생활 2’ 등 거의 모든 인기 드라마의 오에스티(OST)를 담은 엘피도 넘쳐난다. 교보문고 시디판매점엔 엘피 코너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엘피를 온전히 즐기려면 만만찮은 비용이 들고, 상당한 번거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엘피를 재생하는 턴테이블은 물론 증폭 장치인 앰프, 스피커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수제 턴테이블 등 하이엔드 오디오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중고시장에서 인기 있는 마란츠2265B 리시버(라디오 수신 기능을 겸한 앰프), JBL112 스피커도 100만원을 넘어선다. 하지만 맛보기로 엘피에 발을 들인다고 생각하면 10만~20만원 안팎에서도 살 수 있다.
레트로 열풍을 타고 턴테이블 기능뿐 아니라 시디, 엠피(MP)3 등 거의 모든 음원을 재생하면서 스피커와 라디오 수신 기능까지 내장한 다양한 올인원 턴테이블 오디오가 상품화했다. 온라인 쇼핑몰과 전자제품 판매점에선 6만~8만원대 올인원 턴테이블을 팔고 있다. 당근마켓 등 중고거래에선 4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 턴테이블과 스피커를 분리한 이보다 약간의 상급 기기는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에서 20만원 안팎에 판다. 엘피 마니아들은 “음질이 떨어진다”고 평가하지만 수백만원짜리 장비를 마련하지 않고 엘피의 맛을 느끼기에는 손색없다.
엘피를 손에
넣기는 더 다양하고 수월하다. 서울 동묘 인근과 동대문 풍물시장, 회현동 지하 쇼핑센터, 용산 전자랜드 등엔 엘피 판매점이 밀집해 있다. 거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는 추석 연휴 기간 더욱 활기를 띠는 동묘 벼룩시장은 값싼 엘피를 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각종 골동품과 잡동사니를 파는 노점에선 엘피 재킷 상태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2천~3천원짜리 엘피도 구할 수 있다. 물론 노점 상품은 잘 골라야 한다. 헐값이라고 너무 흠집이 많은 엘피를 사면 은은하고 따듯한 엘피 특유의 지직거림을 넘어 아예 듣지 못한다. 입문부터 불쾌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중고엘피 전문점을 찾는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엘피 수집가들 사이에 성지로 불리는 서울 회현 지하 쇼핑센터의 리빙사, 황학동의 돌레코드, 용산 전자랜드 신관 2층 필레코드 등을 찾으면 팝은 7천원, 가요는 1만~1만5천원 정도면 초보자들에게 적당한 엘피를 고를 수 있다.
엘피 전문점이 밀집한 회현 지하 쇼핑센터는 도심의 통행로 성격도 있어 추석 연휴에도 일부 업소가 문을 연다. 리빙사의 이석현 대표는 “추석 연휴엔 도심이 더 한산해 지방에서도 손님이 찾아온다”며 “50여년을 계속했는데 연휴라고 문을 닫을 수 없다. 좀 늦게 열더라도 매일 오픈할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창고에 100만장 정도의 엘피가 있는데, 내가 평생 팔아도 다 못 팔 것이다. 추석 연휴엔 염가반 코너에 좋은 물건을 많이 넣어둘 것”이라고 덧붙였다. 운이 좋으면 엘비스 프레슬리, 퀸 등 유명 뮤지션의 음반을 7천원짜리 염가반 코너에서 영접할 수 있다.
지난 22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풍물시장 초록동 엘피판매점에 엘피들이 진열돼 있다.
라스트 챤스, LP음반, LP판 등 몇몇 중고 엘피 판매점이 입주한 동대문 풍물시장에서도 5천원에서 1만원 안팎에 엘피를 살 수 있다. 음반과 재킷의 상태, 희귀도 등에 따라 정찰제 가격표가 붙어 있어 큰 고민 없이 편안하게 살펴보고 살 수 있는 게 장점이다.
턴테이블을 마련하고 엘피를 산다는 게 번거롭다면 풍물시장 2층 청춘일번가를 찾으면 된다. 옛날 전자오락실, 전당포, 만화방 등 1960~70년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점포를 세트장처럼 재현한 이곳엔 레코드방도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해철, 뉴키즈 온 더 블록 등 15장 정도의 엘피와 2대의 일체형 턴테이블을 구비한 레코드방에선 누구든 직접 턴테이블에 엘피를 얹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다른 한쪽에 청춘다방이 영업하고 있는데 1500원짜리 커피 한잔 시켜놓고 디제이 박스인 음악의 전당에 신청곡을 적어 내면 엘피를 틀어준다. 다만 풍물시장은 추석 당일(9월29일)엔 문을 닫는다.
좀 더 세련된 분위기, 고가의 음향 장비로 엘피 음악을 감상하고 싶다면 ‘엘피바’를 찾으면 된다.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 4호선 진접역 인근 ‘엘피 카페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20년대 사용하던 극장용 스피커와 고가의 수제 턴테이블을 갖추고 있다. 마니아들도 일부러 찾는 명소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홍대입구역 인근 엘피바 ‘신군 & 신양’은 팝을 틀어주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서울대 인근 ‘락락엘피바’, 신촌역 근처 ‘비틀스’ 등도 운치 있는 엘피바로 손꼽힌다. 추석 당일 문을 닫는 경우가 많으니 방문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영업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신승근 기자
sks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