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7>
영원히 네 곁에 있어 줄게, 라고 말한 여자는 내 마음 속 호리병 안에서 아직도 울고 있었다 공지영 47 “홍, 난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어. 네가 많이 오해를 하고 있어. 고바야시 칸나도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야. 내가 그녀를 부른 게 아니라 담당 편집자 자격으로 칸나가 마음대로 쫓아온 거야.” 준고는 내가 전화를 끊기라도 할까 봐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칸나라는 여자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뛰쳐나오던 신라호텔의 어두운 주차장이 떠올랐다. 뒤집어진 가방 속에서 튀어나온 열쇠를 내가 더듬어 찾던 기억도 났다. 내가 말이 없자 준고가 다시 말했다. “그래, 칸나는 내 담당 편집자야.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를 낸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지. 하나하나 제대로 오해를 풀어 가고 싶다. 지난 일들에 대해서는 특히 시간을 가지고….” 지난 일들이라는 말에서 그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지난 일들… 그와 내가 사랑했던 그 순간들이 이렇게 한 단어로 집약되는 것이 낯설었다. 나로서는 한 생애를 살아 버린 듯 길고 선명하고 다채로웠던 수많은 일이 지난 일들이라는 한 마디로 그의 입에서 설명되고 있었다. “부탁이다. 내일 회사에 가기 전에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낼 수 없겠니?” 준고답지 않게 말이 빨랐다. 그가 얼마나 내게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 진심이 전해져 왔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글을 쓴다는 그였다.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사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 그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오해를 푼다 한들 우리는 헤어져야 할 것이다. 그는 내일이면 돌아간다. 이제 와서 오해를 푼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로서는 그를 미워한 채로 보내는 편이 나았다. 그때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했어… 보내고 싶지 않았어, 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그는 간다. 그리고 나는 남는다. 다시 시작하자고 한들, 한번 보낸 마음이 그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그건 이별보다 더한 희극 같았다. “내일 난 회사 쉬어. 집에서 할 일도 있고, 오후에는 사귀는 사람과 만나기로 했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그를 그렇게라도 체념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할아버지가 반대하신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는 희미했는데 지금은 알것 같았다. 아버지는 정말 교토의 그 사람을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내일 정말 회사를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당의 호숫가에 서서 오로지 나 혼자 그 먼 하늘을 바라보며 준고가 탄 비행기를 배웅하고 싶었다. “사인회장에 왔던 사람이구나, 네게 청혼한다고 했지….”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순간 하얏트 호텔에서 민준이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를 들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약간 화가 났다. 설사 민준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백 번 양보해서 내가 그의 아내라고 해도 준고에게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할 권리는 없었다. 나는 순간 민준의 다른 얼굴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는 다시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도 시즈코에게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쓰렸다. 준고의 슬픈 얼굴이 내 망막으로 떠올랐다.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 준고. 내가 영원히 네 곁에 있어 줄게, 라고 말한 여자는 내 마음 속 호리병 안에서 아직도 울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를 다시 만나서 좋았어. 이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아. 실은 공항에서 너와 처음 마주쳤을 때 너도 나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는 너를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알 수 있었어. 네 눈빛만 봐도 그냥 아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맨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괜찮다고 나에게 말하고 싶었다. 서른이 될 때까지, 진짜 아프리카를 찾을 때까지는 그냥 실컷 울게 해주고 싶었다. “…축하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준고가 말했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또다시 우는 모습으로 그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고마워. 조심해서 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눈물을 들키지 않을 만큼 천천히 말했다. “그래 그럴게. 행복해라….” 그가 말했다. 응, 너도 라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착한 여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자신이 싫을 것 같았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이 만남이 가져다 준 마지막에는 그저 진심으로 그를 대하고 싶었다. 그게 나쁘다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다고 해도 나는 내 진심만 말하고 싶었다. ‘준고 너는 행복하지 마. 나랑 있을 때보다 행복하지 마.’ 하지만 그 말 역시 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였다. “꼭 행복해야 한다.”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전화기를 든 채로 앉아 있었다. 그도 전화를 끊지 못했다. 나는 스물아홉 해를 살아온 힘을 다해 인생의 한 막처럼 무거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보니 민준이 서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자의 슬프고 절망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쓰지 히토나리 47 율동 공원이다. 호수의 수면을 떠도는 옅은 안개가 부드러운 겨울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어 마치 커다란 구름이 호수 위에서 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안개가 자욱한 건 지난번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탓인지 모른다. 기온은 지난번보다 조금 높은 듯도 하나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는 변함없다. 지난번처럼 약간 높은 언덕 바로 위 전망대 가까이에 차를 세웠다. 호텔에서 빌려 온 망원경을 꺼내 삼 일 전 홍이가 모습을 나타냈던 산책로를 바라본다. “그렇군요. 여기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면 추운데 일부러 내려가실 필요가 없지요. 그럼 방한복도 필요 없겠군요.” 운전기사가 길게 뻗은 산책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망원경에 눈을 붙인 채 아닙니다, 하고 대꾸한다. “만나려면 역시 내려가야지요. 만약 그녀를 발견하면 오늘은 분명히 제 마음을 전할 작정입니다. 그때는 긴 시간 동안 밖에 있어야겠지요.” 운전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어떻게 할지 그는 꼬치꼬치 묻지 않는다. 커피라도 드시겠습니까, 하더니 차에서 내린다. 전망대에 있는 자동 판매기에서 캔 커피를 사다 줄 것이다. 그가 문을 연 순간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들이친다. 그 차가운 기운에 나는 다시 긴장한다. 그날, 나는 홍이를 만날 수 없는 괴로움에 잠을 설쳤다. 구멍이 뚫려버린 가슴속으로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밖은 맑게 개여 있는데 내 가슴속은 얼어붙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붓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주인공들과 우리가 자꾸 겹쳐진 나머지 괴로웠고 나는 자주 붓을 멈추어야 했다. 그때마다 이건 소설이니 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홍이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홍이의 마음으로 달려 볼 수밖에 없었다. 붙박이장 깊숙이 넣어 두었던 운동화를 꺼냈다. 색이 바래 칙칙해진 아디다스 운동화는 고등학교 때 신었던 낡은 것이지만 옛 친구와 재회한 듯한 반가움을 안고 모습을 드러냈다. 홍이의 추억과 함께 공원을 달렸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으로 그녀에 관한 기억을 쫓듯 전속력으로 달렸다. 한심하게 한 바퀴도 돌기 전에 숨이 턱까지 차고 옆구리에 통증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달렸다. 홍이는 어떤 마음으로 달렸을까. 그녀 마음에 가까이 가려면 그날의 홍이가 되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옆구리가 아프면 아플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해졌다. 몸이 힘든 만큼 영혼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두 바퀴째에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더는 못 가겠다는 나약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제대로 호흡을 할 수가 없어 폐에서 헉헉 신음 소리가 나는 등 형편없었다. 통증은 옆구리뿐 아니라 몸 전체로 퍼져 갔다. 그렇지만 세 바퀴째가 되자 육체적인 고통에 몸이 순응하기 시작했고 힘들수록 오히려 정신이 치유되어 가는 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너무 힘들어 바닥밖에 보지 못하던 내 눈이 힘껏 지면을 디뎌 밟는 내 발을 발견했다. 내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그리고 차올랐다. 나는 발 아래만 계속 보았다. 서서히 잡념이 사라지고 미혹도 멀어져 갔다. 내딛는 발에 맞추어 호흡이 리듬을 찾아갔다. 이노가시라 공원의 흙을 힘차게 밟는 내 발을 보며 나는 마음이 점차 가벼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가 괴로울수록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신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지지 않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그리고 네 바퀴째, 나는 어렴풋이 나와 함께 달리는 홍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홍이는 땀을 닦으며 내게 바싹 붙어서 달렸다. 홍이의 옆얼굴은 똑바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늠름한 눈매, 곧게 뻗은 코, 힘찬 턱이 나를 끌어주었다. 홍이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사는 고독과 싸우며 매일 이렇게 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달리는 그녀의 마음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웠다. 그녀는 타국에서 생활하는 외로움을 달리기로 달래며 다시 기운을 차리려 했음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나도 쉼 없이 달리게 되었다. <한국의 친구, 일본의 친구>를 쓰면서 나는 항상 달렸다. 그때의 홍이의 마음에 다가가 그녀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운전 기사가 캔 커피를 가지고 돌아온다. 드시지요, 하며 내게 하나를 건넨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는 따뜻한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제멋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거짓으로 꾸미는 게 보통이에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나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