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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3>

등록 2005-10-19 15:55수정 2005-10-19 16:01

먼하늘가까운바다 <43>
먼하늘가까운바다 <43>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 묻고 있었다 ‘최홍, 너,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거니?

공지영 43

그때 록이의 건조한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재수를 하고 있던 록이는 지금 학원 수업 중인데 잠깐만, 하더니 전화를 다시 받았다. 록이의 말은 선배 언니가 전해준 말과 같았다. 그리고 위험한 고비는 일단 넘겼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말을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다만 록이는 그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새로 시작한 출판사가 부도 직전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내 이야기 알고 계시니?”

염치가 없었지만 언니로서의 위엄을 최대한 갖추려고 노력하며 내가 물었다. 록이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응…, 하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록이의 대답은 예전의 록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록이는 언니라는 자격을 내게서 박탈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나는 가족 구성원들에게까지 밀려나는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므로 그때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록아, 어떻게 하지?”


록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 특유의 시니컬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언니를 이해할 수가 없어. 엄마와 아빠를 보고도 아직도 사랑을 믿어? 대체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짧게 통화를 마치고 나는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즈음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욕실 여기저기는 어수선하고 더러웠다. 옷을 벗으려고 하는데 거울 속으로 땀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보였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번쩍이는 번개처럼, 무엇인가가 나를 쳤다. 나는 말없이 티셔츠를 벗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무엇인가가 나를 내리쳤다. 내 몸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강렬한 감정이었다. 다 벗지 못한 티셔츠를 팔에 낀 채로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묻고 있었다.

‘최홍, 너,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거니?’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암전되어 버린 것처럼 아찔해졌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거역할 수 없는 물음이 들려왔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던 너는,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구?’

마취에서 깨어난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왔다. 가슴 한편이 갈라지는 듯했다.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 검은 장막이 서서히 걷히며 어렴풋이 사물들의 윤곽이 보였다. 이곳은 좁은 욕실, 준고의 아파트였다. 도쿄였고 일본이었다. 나는 여기서 오전에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준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둘의 여자가 일본 나이로는 스물둘이고 한국 나이로는 스물셋인 남자를 하루 종일 턱을 괴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꿈도 버리고, 가족도 배반하고, 죽음의 문턱에 선 할아버지도 외면한 채….

나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본에 도착한 이래, 대기에 언제나 머물러 있는 습기처럼 내 몸에 스며들었던 이방인의 고독이 내 마음속에서 소나기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동거한다니까 일본말을 그렇게 잘 하는 모양이야. 그 여자 너무 재수 없어.”

어학원에서 한국 남자 아이들이 수군거리곤 했었다.

“네가 바로 그 최홍이구나.”

어학원에서 마주치던 한국 여자 아이들의 야릇한 눈초리도 따라왔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결심을 해야 했다. 나는 준고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할 셈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리자고 하고 싶었다. 내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 인사했듯이 그도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내가 할아버지 이 사람은 좋은 일본인이에요, 하면 할아버지도 빙그레 웃어주실 것 같았다.

그날 역시 늦게 돌아온 준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물을 한 잔 마시더니, 자자, 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할 이야기가 있어.”

내가 묻자 그는 돌아누우며 베니 내일, 하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대체 너에게 나는 누구니?”

등을 돌리고 누운 준고의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너에게 나는 무슨 의미인 거냐구!”

그가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바다 위에 내리치는 번개처럼 밤새 내 망막에 푸른빛으로 번쩍번쩍 했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은 시간이 나니까, 홍,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침이 되자 미안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그래, 그럴게, 했다.


까만 택시 차창으로 내민 흰 손만이 내게 작별을 고한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하고 손이 말한다

쓰지 히토나리 43

연회장 앞 작은 로비에 마련된 소파에서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쓰러지듯 소파에 앉자 바로 졸음이 몰려들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를 보고 주위를 돌아보던 호텔직원이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하고 말을 건넨다.

“이 소파가 마음에 들어서요. 여기서 좀 쉬어도 될까요?”

호텔직원은 영어로 물론이죠, 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마음이 놓인 나는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몇 번이나 본 영화의 잊을 수 없는 장면 같은 꿈을. 꿈에서 홍이는 내 아파트로 돌아오려 하고 있다.

아직 서툴고 불안한 홍이의 일본어 말투가 그녀의 첫인상과 겹쳐진다.

“윤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너무 좋아. 널 또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웃게 돼.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뜰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려. 오늘도 윤오를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 무렵 홍이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했다.

“윤오. 오늘도 널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

그곳에는 평화로운 행복이 가득했다.

나는 홍이와의 행복에 취해 있으면서도 현관문이 신경 쓰여 어쩔 줄 몰랐다. 곧 문이 열리고 거기에서 고바야시 칸나가 나타날 것을 꿈속에서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헤어졌는데도 칸나는 자기가 애인이라도 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지?”

기억과는 달리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형되어 있다. 입구에 서 있는 고바야시 칸나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의 거인이고 홍이는 마치 다섯 살짜리 아이 같다.

“그건 안 돼. 나한테는 애인이 있으니까.”

떨고 있는 탓에 목소리도 함께 떨렸다. 실제로는 의연히 말했었는데, 세월이 지난 탓에 그 목소리는 불안정하고 흐릿하며 시들어 가고 있었다. 고바야시 칸나는 용이 불을 뿜듯 웃기 시작했고 나와 홍이는 더욱 위축되어 방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넌 내 거야. 그런 계집애한테 널 넘겨줄 것 같아? 평생 넌 내가 지배해. 내가 널 만들어 갈 거야. 넌 내 작품이니 내가 보살펴 주지. 그러니 넌 나랑 결혼해야 돼. 그리고 내가 이혼하고 싶을 때 그때 넌 버려지는 거야.”

나는 놀라 눈을 떴다. 꿈이란 걸 알고, 물론 처음부터 꿈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슬픈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서 깬 뒤로는 잠들 수가 없어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칸나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스포츠클럽에서 땀을 흘리고 나온 다음이었다.

“지금 프런트. 이제 출발하려고. 어제는 미안해….”

나는 대충 옷을 걸치고 서둘러 프런트로 내려갔다. 로비에서 고바야시 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가방 하나가 그녀 발밑에 애완견처럼 누워 있다.

눈이 빨갛게 부은 칸나가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몇 시 비행기?”

나는 무난한 질문을 한다.

“오후야.”

“구도 선생님께도 안부 전해 줘.”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칸나가 가방을 들고 회전문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높은 천장과 안정된 분위기의 호텔 로비에는 보내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들이 작별을 아쉬워하며 여기저기 둥글게 모여 있다. 우리는 함께 회전문으로 들어가 날이 활짝 개인 밖으로 나왔다. 택시 승강장까지 걸어가며 칸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벨보이가 택시 문을 열고 칸나의 작은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서야 겨우 내 얼굴을 바라본다.

“준고. 넌 너무 말수가 없지만, 그 사람한테는 제대로 네 마음을 전해야 해. 눈을 바라보고 거짓 없는 네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거야. 그럼 반드시 그 사람도 네 진심을 알아 줄 거야. 오랜 세월의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릴 거고.”

칸나가 미소를 지었다. 놀란 나는 그래, 하고 대답을 하지만 다음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꼭 행복해야 해. 준고가 행복하길 빌어 줄게.”

칸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택시를 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조용히 닫힌 문이 우리 앞을 막았다. 당황한 나는 차창을 두드린다. 칸나가 차창을 내린다. 그리고 생끗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힘내, 꼭 네 마음을 말과 성의를 다해 전하는 거야.”

고바야시 칸나를 태운 택시가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한다. 칸나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든다. 가늘고 흰 손가락 끝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으로 그녀가 손을 흔들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멘다.

까만 택시 차창으로 내민 흰 손만이 내게 작별을 고한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하고 손이 말한다.

고맙다 칸나.

호텔 앞에 혼자 남겨진 나는 마음으로부터 칸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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