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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40>

등록 2005-10-13 17:13

먼하늘가까운바다 <40>
먼하늘가까운바다 <40>

연인들의 과거 살점들이 점점이 흩어져 벚나무마다 하얗게 맺혀 있는 것 같았다

공지영

삼 년 전쯤인가 도쿄에서 열리는 출판 관계자 회의에 갔다가 아버지는 뜻밖에도 교토행을 제의했다.

-거기 아빠 친구가 한번 들르라고 하더라.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했다. 벚꽃이 피기 직전의 이른 봄이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내가 사랑했던 그 일본 청년과 하룻밤을 묵고 온 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그곳에 가고 싶기도 했고 똑같은 강도로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처음 사랑했던 그 사람하고 여기 왔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도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아버지에게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털어놓기에는 너무 커 버렸던 것이다.

준고와 나는 그때 사가노의 대나무 숲에서 입을 맞춘 후,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그 여인의 집을 찾아갔다. 그때 시즈코라는 희고 조용한 여인이 우리에게 대접한 차고 투명했던 포도주와 정갈한 일본 식사. 여관비 낭비하지 말라고 그녀는 하나밖에 없는 손님방에 낮은 칸막이를 두고 우리에게 자리를 두 개 깔아 주었다. 낮은 칸막이를 가운데 놓고 한 방에 우리는 누워 있었다.

-윤오, 자?

내가 물었다. 낮은 칸막이 밑의 한 뼘 되는 틈으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누워서 좀 떨어진 채로 누운 윤오, 널 보니까 너무 섹시하다…. 매혹적이야.

준고가 아직 잠들지 못한 시즈코를 의식하는 듯, 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쉬이, 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지, 누워서 우리가 입을 틀어막고 얼마나 깔깔거렸는지…. 그때 아버지의 딸인 홍이라는 여자는 결국 그 칸막이를 돌아가 준고의 품에 안겼다. 시즈코는 그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그저 조용한 교토의 아침처럼 그렇게 우리를 배웅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신간선을 타고 준고와 함께 갔던 그 여행을 떠올렸다. 청록색 지붕을 얹은 일본의 집들이 차창 밖으로 나란히 보였다. 나고야라는 이정표를 지나자 멀리 설산들의 이마에는 아직 흰눈이 덮여 있었다. 도쿄에서 교토로 가는 길을 달리는 신간선의 기차 소리가 덜컹일 때마다 교토로 가는 이 길에 뿌려졌던 준고와 홍이의 자취를 밟고 가는 것만 같았다. 젊어서 무모했던, 그러므로 순정적이었고 따라서 패배했던 사랑의 자취들.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실패했던 일본과 한국의 연인들의 과거 살점들이 점점이 흩어져 벚나무마다 하얗게 맺혀 있는 것 같았다.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서.

사가노의 죽로암 앞에서 아버지와 딸은 그렇게 각각 일본 여인과 일본 남자를 생각하며 그 대밭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즈코의 찻집으로 들어섰다. 그때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즈코의 표정을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오직 한 사람만을 사모하는 여인의 눈빛이 저런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내게 떠올랐다. 소유욕도 넘어서고, 육체도 넘어서고,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정신도 넘어서서, 바라보는 존재가 되어버린 여인의 눈빛. 그건 우리 세대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개념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나는 존경의 눈빛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동시에 평생 아버지의 등 뒤에 서 있는 엄마의 눈빛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두 여인 중에서 누구의 인생을 택하고 싶으냐고 나는 내게 물어보았다. 나는 둘 다 싫었다.

죽로암에서 차를 마시며 아버지는 시즈코와 조용조용 말을 나누었다. 별말도 아니었다. 말은 자주 끊겼고 가끔 시즈코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버지가 아빠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로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버지는 시즈코와 있을 때 더 남자다웠고, 엄마와 함께였을 때보다 더 평화로워 보였다. 그리고 이건 정말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냥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 같았다. 그 무렵 정체성의 혼란 없이 내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던 것은 아마도 그때 내가 한 명의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을까.

윤동주가 시 속에서 동생에게 물었다.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될래, 동생은 대답했다.

-사람이 되지….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 시선은 하는 수 없이 준고와 함께 묵었던 손님 방으로 향했다. 방문 밖에 걸린 붉은 등롱도, 뒷창의 푸른 대나무 숲도, 정갈한 다다미 방도 그대로였다. 그때 시즈코가 가운데에 막아주었던 키 작은 병풍이 벽 한구석에 아직도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아마 내가 혼자였다면 나는 울어버렸을 것이다.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내게 시즈코가 말했다.

-홍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홍이의 잘못이 아니야. 그렇지만 누군가가 홍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겠지.

거꾸로 이야기해서 준고가 일본인인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일본인이라고 해서 네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 잘못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반대하신 건가요?

내가 물었다. 시즈코는 조용히 웃었다.

-아버지를 용서하실 수 있었어요?

내가 물었다. 시즈코는 조용히 웃었다.

-아직도 아버지를 사랑하시나요? 세상에 그런 사랑이 있는 건가요?

얼굴에 잠깐 어두움이 덮이더니, 시즈코는 그냥 조용히 웃었다.


고독한 우주에서 칸나는 기댈수 있는 유일한 한 그루의 나무였다

쓰지 히토나리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우는 칸나를 나는 그저 바라본다. 칸나와의 그리운 추억들이 차례차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칸나, 이해해 줘. 난 홍이와 다시 시작하기 위해 칠 년이란 시간을 기다렸다. 네가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내가 홍이와 행복해지길 빌어 줄 순 없겠니?”

“어떻게 그런 말을!”

칸나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날보고 어떻게 해 달라고? 너희들 행복을 빌어달라고? 내가?”

“그래, 칸나. 질투나 원한 같은 건 잊어버리고 상대가 행복하기를 빌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미움이나 분쟁은 사라질 거야.”

“그럼 내 행복은 누가 빌어 주는데?”

“내가 빌어 줄게.”

칸나가 일어서더니 얼굴을 붉히며 내게 말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너야. 내가 손에 넣고 싶은 건 너뿐이라고!”

나는 칸나 뒤로 가 그녀를 안으려 했다. 칸나는 마치 아이처럼 큰 소리를 치며 난폭하게 굴었다. 양손을 휘두르며 내게 달려든다.

“칸나, 그만 해, 칸나!”

“싫어, 절대로 싫어. 절대로 인정 못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나는 칸나를 끌어안고 진정해, 하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날, 칸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내 뒤로 와 날 안았다.

-준고, 다시 시작할 순 없을까?

나는 칸나의 팔을 풀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네 곁에 있게 하잖아.

-그건 네가 내 담당편집자고 지금은 출판을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매일같이 날 집에 들이는 건 일 때문만은 아니지? 내가 이렇게 네 곁에 있는 게 실은 조금은 기쁘지?

나는 칸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칸나, 내가 널 집에 들인 게 아니라 네가 마음대로 들어온 거야.

칸나가 입술을 내밀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집에 들이지는 않아. 인정하기 싫은가 본데 그건 날 좋아하는 거라고. 나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여전하구나, 옛날과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자존심 강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그렇지만 분명 그건 칸나의 매력이기도 했다.

-오늘 자고 가도 돼?

나는 그 자리에서 아니, 하고 대답했다.

-준비해 왔어.

-뭘?

-잘 때 필요한 거 다. 잠옷하고 칫솔, 목욕타올 같은 거. 내일은 휴일이니까 여유롭지? 아침에 뭐든 만들어 줄게. 준고가 좋아하는 계란요리나 파스타라도.

칸나 덕분에 나는 분명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혼자서 소설을 써 나갔다면 밀려오는 고독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을지도 몰랐다. 갓 쓴 원고를 가장 먼저 읽는 건 칸나였다. 고독한 우주에서 칸나는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한 그루의 나무였다. 칸나가 거기 서 있는 덕에 나는 미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기대어 안심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뢰감은 날로 커져갔다. 부엌 식탁에 앉아 내 원고를 읽는 칸나의 뒷모습이 그 무렵의 내게는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좋아. 아주 잘 썼어. 이런 식으로 가면 돼.

그녀의 한 마디에 나는 몇 번이고 힘을 얻었다. 그 때문에라도 칸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 괴롭다. 작가가 될 길을 열어 준 사람이고, 지금의 나에게는 중요한 파트너이기도 하다. 만약 홍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칸나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런대로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칸나가 내게 매달렸다. 그녀의 팔에서 추락하려는 자의 마지막 힘이 배어 있다.

“내가 행복해지는 건 너와 함께하는 거야. 너랑 같이 앞으로도 훌륭한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내는 거라고.”

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슬퍼졌다. 그녀를 이렇게까지 만들 권리가 내게는 없었다.

“넌 내가 만들었어. 넌 내 빛이야. 내 모든 거라구. 난 내 행복만을 위해 빌 거야.”

“칸나. 부탁이니 진정해. 더 이상 네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어. 내 마음은 내 거니까.”

칸나를 안아 가만히 침대에 눕혔다. 칸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조용해진 칸나가 울음을 참을 때마다 침대가 함께 애처롭게 흔들렸다.

“문을 열어 둘게. 진정이 되면 칸나 방으로 가주겠어?”

칸나는 대답이 없다.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실내에 퍼진다. 나는 고바야시 칸나를 방에 남겨 두고 어슴푸레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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