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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재소설 - 먼하늘 가까운 바다

한일 공동소설 - 먼하늘가까운바다 <35>

등록 2005-10-13 17:01수정 2005-10-13 17:01

먼하늘가까운바다 <35>
먼하늘가까운바다 <35>

“엄마한테 함께 미국 간다고 말해도 되는 거지?” 어둑한 곳에서 민준이 다시 물었다

공지영

“네가 뭐라고 대답할지 몇 가지 예측은 했는데… 그 예측 중에 이렇게 울고 있는 건 없었어. 홍, 울지 마. 내가 잘못한 거니? 결혼하자고 하면 여자들, 다 이렇게 우나?”

민준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음식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목소리로, 그만 울어, 했다. 그의 목소리 위로 준고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 우리 날마다 이렇게 함께 눈을 뜨자.

― 너 외국인하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준고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여자 첨 봤었어,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입을 빼물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내가 그렇게 하는 양이 재미있다는 듯,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미안, 미안, 하고 말했었다. 그런 그에게, 하필이면 생일날, 나는 비수를 꽂고 여기로 와 있다. 그와 동시에 실은 내 가슴에도 비수가 꽂혀 있었다. 주는 쪽과 받는 쪽, 상처라는 것은 양날의 칼을 가진 것이니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코를 마저 풀고 휴대폰을 확인하니까, 지희였다. 민준에게 눈빛으로 잠깐, 이라는 표시를 하고 폴더를 열었다. 지희는 내 목소리를 듣고 홍, 또 왜 낭창낭창한 여자애가 시집가니? 하고 물을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희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홍, 나 너무 슬퍼…. 홍, 나 좀 위로해 줘.”

소리는 너무 커서 곁에 있는 민준에게도 들리고 있었는지, 민준도 놀란 표정을 했다.

“뭐야, 너 왜 그래? 또 교수가 박사 논문 집어 던졌어? 아니면 논문이 막혀서 도저히 어찌 할 바를 모르겠는 거야?”

지희는 그냥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지희야, 왜 그래, 말 좀 해 봐, 하니까 한참 후 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 나 차였어. …그것도 제일로 비참하게 차였어. 그 사람 첨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대. 나 죽고 싶어. 홍, 나 죽고 싶어!”

민준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민준도 꽤 놀란 눈치였다. 지희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없었다. 지희는 언제나 쿨하게 학교와 집을 오가는 냉철한 대학원생이었다.

“누구? …너, 뭐야? 무슨 소리냐구?”

“홍, 나 죽을래. 논문을 쓰면 뭐하고 교수가 되면 뭐해. 세상에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들은 다 다른 여자애들이 데려가 버렸는데… 난 박사도 되고 싶고 교수도 되고 싶지만 노처녀로 그냥 늙어가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그 사람이 날 사랑 못하겠대. 너무 똑똑해서 싫대!”

“뭐 그런 나쁜 놈이 다 있어? 누구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우아한 음악이 흐르는 식당의 사람들 두엇이 나를 돌아보았다. 민준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내가 무슨 말인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지희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희가 이러는 건 십 년 동안 처음 봐, 내가 말하자 민준이 약간 착잡한 표정으로 와인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쏙 들어가서 나도 와인을 마셨다.

“민준아, 나 가 봐야겠어. 지희, 얘는 한다면 하는 아이야. 죽을 거 같애, 진짜로.”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건 내가 그에게 청혼을 받는 자리였다. 어찌해야 좋을지 약간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 말대로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준에게 미안했고, 지희도 걱정이 되었다. 갈 수도 없고 앉아 있기도 불안했다.

“가 봐. 얘기는 다른 날 하자. 내가 데려다 줄까?”

한참 있다가 민준이 말했다. 그러자 실은 이 어색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리에서 내가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미안해, 정말 지희가 걱정이 되어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준은 주차장까지 나를 따라왔다.

“엄마한테 함께 미국 간다고 말해도 되는 거지?”

어둑한 곳에서 민준이 다시 물었다. 그의 얼굴도 슬퍼 보였다.


사과하면 누가 벌이라도 줘? 너희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쓰지 히토나리

집에 전화할 틈도 없을 정도로 매스컴 관계자들에게 결려 오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작가와는 나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편집장이 추석 선물을 전하러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날 작가는 기분이 좋았고 나까지 집에 들여 술잔을 돌렸다. 과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독특한 수법을 지닌 작가였다. 내가 그의 작품 중 즐겨 읽던 책을 이야기하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 소설을 쓰고 있나? 그렇다면 내 라이벌이구만.

작가는 그렇게 말하며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오십 중반의 아직 젊은 나이였다.

겨우 전화통화가 일단락됐을 때는 전철 막차에도 아슬아슬한 시간이어서, 홍이에게는 전화도 못하고 편집부를 뛰쳐나왔다.

집 안에 불이 꺼져 있어 홍이는 잠이 들었나 생각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슴푸레한 부엌 식탁의자에 앉은 홍이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직 안 잤어?

홍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곧바로 날아왔다.

─ 물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신발을 벗으며, 편집부에 정말 중요한 작가가 죽었다고 설명을 했다.

─ 우리 잡지 간판작가였어. 나도 한 번 댁까지 가서 술을 마신 적이 있는 작가야.

그래, 홍이의 낮은 목소리가 엷은 어둠을 흔들었다.

─ 그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아?

─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다.

대답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팩을 꺼내 입을 댔다.

─ 오늘 함께 외식하기로 약속했었지?

─ 신문사랑 관계자들한테 걸려오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어. 편집부 사람들이 모두 영안실로 가 사무실을 나 혼자 지키고 있었다고.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홍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미안하다고 한마디 사과하면 되잖아.

─ 난 열심히 일하고 들어왔어, 놀고 온 게 아니라고.

부드럽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목소리는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평소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폭발할 것 같았다. 둘 다 뭔가 참고 있는 것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젊음만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무언가, 사랑만으로는 서로를 지탱할 수 없는 무언가….

─ 잘못했다고 한마디 하면 되잖아. 사과하면 누가 벌이라도 줘? 너희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홍이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일어섰다. 나는 우유팩을 손에 쥔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희 일본 사람이란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이 아팠다.

─ 잘못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널 외롭게 만들었다고 왜 한마디 못하는 거야?

나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곤혹스러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휘둘려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홍이가 처음으로 나를 일본 사람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그때까지 둘 사이에는 국경 따윈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내가 일본인이고 홍이가 한국 사람이란 걸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 부탁이니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바꾸지 마.

작은 소리로 항의했지만, 흥분한 홍이 귀에는 닿지 않았다.

─ 우리는 너희한테 점령당했었어. 그걸 아직까지 우리가 사과해라, 사과해라 하는 것도 웃기고, 너무너무 싫어.

느닷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흥분한 홍이에게는 동질의 의문이었을 것이다. ‘너희들’ 안에 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더욱 위축되고 놀라 할 말을 잃었다.

─ 엄마가 왜 일본 사람하고 결혼 못하게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말했었지, 기억 나?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째서 무책임하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둘 거면서. 제대로 사과도 안 할 거면서.

홍이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안아 일으키려 했지만, 홍이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참아 왔던 것들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큰 소리로 울었다. 어떻게 손을 뻗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이성을 잃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 날 혼자 내버려 두고….

나는 그제야 내가 벌려 놓은 일을 깨달았다. 바로 내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흥분한 홍이를 달래보았지만, 그녀는 내 팔에 매달려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말수가 적고, 말을 믿지 못하는 고독한 청년으로. 온몸의 힘이 빠지고 의식이 멀어져 갔다. 내가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마루에 쓰러져 우는 홍이를 안아 일으키지도 못하고 나는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너희 일본사람…

홍이 목소리가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항상 홍이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어느새 나는 그녀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있었다.

/ 그림 이보름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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